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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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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했던 [[대한민국]]의 삼국 시대를 이룬 삼국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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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사 ==
7=== 건국 ===
8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민인 온조와 비류 세력이 건국한 것으로 도읍을 위례성[*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 부근]으로 잡았다. 이는 우수한 철기 문화를 가진 유이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 한 것이다. 처음에는 마한의 소국이었으나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해 가며 점점 세력을 키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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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체제 정비 ===
11고이왕의 체제 정비로써 백제는 국가 기틀이 마련되었고 점점 강성해질 수 있었다. 한강 유역의 소국들을 장악하였으며, 관등제와 관복제를 정비하고, 해상을 통해 중국의 문물을 수입함으로써 삼국 중 처음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또한, 중국 남조의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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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전성기 ===
14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마한 영역을 모두 차지하여 전라도의 비옥한 곡창 지대를 확보하였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이 전사하였다. 또한, 황해도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산둥반도, 요서지방, 규슈 지역에도 세력을 떨쳤다. 이렇게 위례성(한성)을 중심으로 서남해를 모두 장악함으로써 안정적인 해상 교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고 선진 문물과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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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쇠퇴 ===
17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엄청난 정복 활동으로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남진 정책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게 되면서 백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강 유역을 모두 빼앗겼으며 웅진(지금의 공주 부근)으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또한, 나제 동맹을 강화하였다. 백제는 미숙한 외교, 해상 교역 침체, 권력 다툼 등으로 더욱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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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중흥 ===
20백제가 쇠퇴하던 중 동성왕은 왕권을 강화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남조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신라와의 동맹을 굳게 하였다. 또한,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귀족 세력의 반발로 동성왕이 피살되었다. 동성왕 다음의 무령왕 역시 백제를 중흥하고자 하였는데,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반란 세력을 토벌하였으며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22담로 설치를 통해 지방을 통제하기도 하였으며 백제는 점점 국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무령왕 다음의 성왕은 교통이 편리한 사비성(지금의 부여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국호를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남부여라 하였다. 또한 제도 정비 및 불교 진흥으로 나라가 강성해졌다. 결국 한강 유역을 되찾기에 이르렀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다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성왕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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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멸망 ===
23백제는 성왕이 죽음으로써 더욱 약해졌고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함경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매우 강해졌다. 백제의 의자왕은 초기에 대야성(지금의 합천 부근)을 공격하는 등 신라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후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백제는 위기에 빠졌다. 신라는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백제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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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백제 부흥 운동 ===
26백제가 멸망한 이후 충청도 지역에서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주류성에서 복신 등이 의자왕의 아들 푸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가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4년간 저항하였으나 지도층 내분, 백강 전투 패배로 부흥 세력은 토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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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화 ==
29=== 학문 ===
30백제는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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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종교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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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수도 ==
35초기에는 위례성에 도읍을 두었으나, 이후 웅진과 사비로 천도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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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역사 ==
38=== 건국 ===
39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하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두 형제는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건국했지만, 이후 비류 세력이 온조에 합류하며 하나가 되었고 원래 십제였던 국명도 백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비류가 건국 후 땅이 좋지 않아 실패하고 자결한 뒤 합쳐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현대에는 우수한 철기 문화를 가진 유이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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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초기 백제는 마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였으나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해 가며 점점 세력을 키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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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체제 정비 ===
44고이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며 국가 체제를 확립해 나가게 된다. 관등제, 관복제, 율령 반포 등이 이뤄졌으며,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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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전성기 ===
47근초고왕 대에 백제는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남으로는 마한 전역을 복속시켜 전라도의 비옥한 곡창 지대를 확보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황해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시키고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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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이 시기 백제는 한성을 중심으로 서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안정적인 교역망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선진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며 국부를 쌓았다. 372년에는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 유명한 칠지도 역시 이 시기에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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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한편 이른바 요서 경략설이라고 하여 중국 사서 송서, 양서에 기반해 백제가 요서 지방을 지배했다는 설이 있으나[* 산둥반도나 규슈까지 넓혀지기도 한다.], 그 범위와 성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이 활발하다. 기록의 해석과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으로 인해 '진출'보다는 '교역 거점 확보'나 '문화적 영향력 행사' 정도로 보는 시각도 많다. 그래도 당시 백제의 해상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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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쇠퇴 ===
545세기 들어 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엄청난 정복 활동으로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벌이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게 되면서 백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개로왕은 고구려 첩자 도림의 계략에 빠져 국력을 낭비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들인 문주왕은 긴급히 남쪽으로 피신해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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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또한 한강 유역 상실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해상 교역로의 위축은 국가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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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중흥 ===
59백제가 쇠퇴하던 중 동성왕은 왕권을 강화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남조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탐라를 복속시켰으며 신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였다. 또한,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귀족 세력의 반발로 동성왕이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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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동성왕 다음의 무령왕 역시 백제를 중흥하고자 하였는데,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22담로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하고,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또한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며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1971년 우연히 발굴된 그의 무덤인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백제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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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무령왕 다음의 성왕은 교통이 편리한 사비성(지금의 부여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국호를 일시적으로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남부여라 하였다. 또한 제도 정비 및 불교 진흥으로 나라가 강성해졌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일시적으로 되찾는 데 성공하나, 신라의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다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출전한 성왕은 관산성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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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멸망 ===
66성왕의 전사 이후 백제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를 발판 삼아 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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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의자왕은 즉위 초반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대야성(지금의 합천 부근)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등 신라에 대한 군사적 성과를 거뒀으나,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귀족 세력과의 갈등, 그리고 연이은 군사 활동의 피로 누적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소모되었다. 신라는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백제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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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한편 흔히 알려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는 패망국의 군주를 폄하하기 위한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으며[* 삼천궁녀 이야기는 조선시대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며, 실제 역사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귀족층의 이반이 멸망의 주요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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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백제 부흥 운동 ===
73백제가 멸망한 이후 충청도 지역에서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주류성에서 복신 등이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가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나당연합군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200여 개 성을 회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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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그러나 부흥 운동 지도부 내의 권력 다툼과 분열, 그리고 왜의 수군 지원군이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부흥 운동은 동력을 상실하고 결국 4년 만에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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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문화 ==
78백제는 세련되고 온화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특히 건축, 공예, 불교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또한, 활발한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 왕조들 및 일본과 교류하며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요한 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다시 일본에 전파되어 아스카 문화 등 일본 고대 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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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학문 ===
81백제는 일찍부터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교육했으며, 역박사, 의박사 등 전문 기술직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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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종교 ===
86=== 고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