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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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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가져온 문서/진보위키]] [[외부:https://pbs.twimg.com/media/D9fSaA7VAAAognp.jpg:large|width=300]] 쩐흥다오(陳興道, Trần Hưng Đạo)는 베트남의 황족이자 군인으로, 아명은 진국준(Trần Quốc Tuấn), 시호는 흥도대왕(興道大王, Hưng Đạo Đại Vương)[* 인무흥도대왕(仁武興道大王)]이다. 몽월전쟁 당시 국공에 봉해지며 몽골의 침입을 두 차례나 막았다. == 생애 == 1228년 안생왕(An Sinh vương) 진류(Trần Liễu)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황실에서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크게 중용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삼촌이자 당시 황제였던 태종(Thái Tông) 진경(Trần Cảnh)의 도움으로 제1차 몽월전쟁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285년 몽골과 책봉 문제로 시비가 붙어 몽골군이 남침하자, 대군을 이끌고 몽골군의 침입에 저항했다. 처음에는 병력의 질적 차이와 황족들의 배신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베트남의 기후와 풍토병에 적응하지 못하는 몽골군의 심리를 적절히 이용하여 청야전술로 구사했고, 점성의 왕자 제만과 므엉족들의 지원까지 더해 몽골군 지휘관 사도(Sügetü) 장군까지 전사하는 대승을 거뒀다. 몽골 황제 세조(元世) 홀필렬(Qubilai)은 우마르(Omar) 장군을 지휘관으로 삼아 1287년 다시 침략군을 보냈고, 우마르 장군의 함대와 진흥도 장군의 함대는 박당강(Sông Bạch Đằng)에서 최후의 결전을 맞이했다. 허나 진흥도 장군은 우마르 장군의 함대가 박당강에 당도하기 전 수심에 미리 날카롭게 깎은 나무 기둥을 촘촘이 심어뒀으며, 우마르 장군의 몽골 함대가 진흥도 장군의 함대로 오는 순간 나무 기둥에 꿰여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진흥도 장군의 베트남 함대는 화공을 가해 우마르 장군의 몽골 함대를 무찔렀다. 몽골군의 대패 소식을 들은 홀필렬은 노하여 재침공을 준비하지만, 얼마 못 가 붕어하였고, 진흥도 장군은 제국을 지킨 공으로 황제로부터 대왕에 봉해졌다. 이후 1300년 그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고, 그의 서거 소식에 많은 베트남 백성들은 물론 베트남과 함께 싸운 점성의 왕자 제만과 백성들도 크게 슬퍼하였다. [Include(틀:가져옴, O=진보위키, C=[[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sa/3.0/|CC BY-NC-SA 3.0]], L=[[https://web.archive.org/web/20210401071142/https://jinbowiki.org/wiki/index.php/%EC%A7%84%ED%9D%A5%EB%8F%8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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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가져온 문서/진보위키]] [[외부:https://pbs.twimg.com/media/D9fSaA7VAAAognp.jpg:large|width=300]] 쩐흥다오(陳興道, Trần Hưng Đạo)는 베트남의 황족이자 군인으로, 아명은 진국준(Trần Quốc Tuấn), 시호는 흥도대왕(興道大王, Hưng Đạo Đại Vương)[* 인무흥도대왕(仁武興道大王)]이다. 몽월전쟁 당시 국공에 봉해지며 몽골의 침입을 두 차례나 막았다. == 생애 == 1228년 안생왕(An Sinh vương) 진류(Trần Liễu)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황실에서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크게 중용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삼촌이자 당시 황제였던 태종(Thái Tông) 진경(Trần Cảnh)의 도움으로 제1차 몽월전쟁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285년 몽골과 책봉 문제로 시비가 붙어 몽골군이 남침하자, 대군을 이끌고 몽골군의 침입에 저항했다. 처음에는 병력의 질적 차이와 황족들의 배신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베트남의 기후와 풍토병에 적응하지 못하는 몽골군의 심리를 적절히 이용하여 청야전술로 구사했고, 점성의 왕자 제만과 므엉족들의 지원까지 더해 몽골군 지휘관 사도(Sügetü) 장군까지 전사하는 대승을 거뒀다. 몽골 황제 세조(元世) 홀필렬(Qubilai)은 우마르(Omar) 장군을 지휘관으로 삼아 1287년 다시 침략군을 보냈고, 우마르 장군의 함대와 진흥도 장군의 함대는 박당강(Sông Bạch Đằng)에서 최후의 결전을 맞이했다. 허나 진흥도 장군은 우마르 장군의 함대가 박당강에 당도하기 전 수심에 미리 날카롭게 깎은 나무 기둥을 촘촘이 심어뒀으며, 우마르 장군의 몽골 함대가 진흥도 장군의 함대로 오는 순간 나무 기둥에 꿰여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진흥도 장군의 베트남 함대는 화공을 가해 우마르 장군의 몽골 함대를 무찔렀다. 몽골군의 대패 소식을 들은 홀필렬은 노하여 재침공을 준비하지만, 얼마 못 가 붕어하였고, 진흥도 장군은 제국을 지킨 공으로 황제로부터 대왕에 봉해졌다. 이후 1300년 그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하였고, 그의 서거 소식에 많은 베트남 백성들은 물론 베트남과 함께 싸운 점성의 왕자 제만과 백성들도 크게 슬퍼하였다. [Include(틀:가져옴, O=진보위키, C=[[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sa/3.0/|CC BY-NC-SA 3.0]], L=[[https://web.archive.org/web/20210401071142/https://jinbowiki.org/wiki/index.php/%EC%A7%84%ED%9D%A5%EB%8F%84|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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