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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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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남부 독일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에서 태생이다. 1931년 뮌헨으로 이사했다. 뮌헨은 바그너를 후원한 음악과 무대의 도시이고, 반(反)인상주의를 표방하며 자아와 영혼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 표출의 예술로 정의되는 독일 표현주의 유파인 '청기사'파를 배태한 고장이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었고, 히틀러가 나치스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에드가 엔데는 독일 최초의 초현실주의 화가 가운데 하나로, 엔데는 여러 화가와 조각가, 문학가와 그들의 아이들 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또한 나치 치하인 1936년 초등 학교에 입학했고, 유겐트에 입단해야 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그림은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예술 활동을 금지당한다. 엔데는 주변의 친한 예술가들이 나치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보고 강제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결국 집에서 들은 이야기는 밖에서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이차 세계 대전 즈음, 아버지에게 징집 영장이 발부되자 학업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나치의 눈을 피해 도망했다. 그는 1943년부터 시와 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나 소망은 극작품을 쓰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대학을 중퇴하고, 20세인 1949년 장학금을 받으며 연극학교에 들어가 1950년에 수련을 마쳤으나 그의 작품을 채택하려는 극단은 없었다. 이후 노래 가사, 라디오·텔레비전 각본을 쓰기도 하고 무대 감독을 맡아 보기도 하지만 그가 버는 돈은 그 사이에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 자신이 사는 집세를 내는 데도 충분치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예술적·문학적인 위기도 다가온다. '뭔가 전혀 다른 일'을 시도하는 것밖에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학창 시절 친구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책 텍스트를 써 달라고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어떤 계획이나 의도 없이 단순히 '글을 지어 내는 즐거움'에 몸을 맡기게 되는데, 그 결과 1년 후인 1958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라는 두툼한 원고가 완성된다. 하지만 열한 군데 출판사를 전전하는 동안 이 원고를 출간하려고 나서는 데는 없었다. 에리히 케스트너에게도 원고를 보내 보지만 응답이 없었다. 원고가 완성된 지 1년 반 후에, 티네만이라는 출판사는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할 수 있도록 원고를 개작하라는 조건과 함께 원고를 채택한다. 그리하여 1960년에 1권이 나오고, 1961년에 2권이 나오게 되었는데 독일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고 라디오와 TV 시리즈로 방송되는 등 이 작품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후 그의 대표작인 『모모』가 나오기까지는 10년이 넘는 공백이 있다. 그 사이에 엔데는 다시 극작품을 쓰려는 시도에 몰두한다. 그의 공백이 일부 설명될 수 있는 국면이다. 물론 그 사이에 결혼을 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있다. 그는 1971년 로마 근교로 이사한다. 그가 독일을 떠난 것은 문학계의 분위기 때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당시 독일 문학계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으로 독자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향을 의도하지 않는 작품은 도피문학으로 간주했고, 엔데는 이런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로마에서의 전원생활은 엔데의 삶을 바꾼다. 이 작품 역시 독일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처음 반응은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에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판매 부수가 늘고 역시 여러 나라 말로 소개된다. 한국에서도 1977년,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차경아의 번역으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 번역본은 말 그대로 대박을 치며 엔데를 고무시켰고, 이 때의 인연을 계기로 차경아는 엔데의 대표작들을 연달아 번역하는 건 물론 창작 과정에 엔데와 논의를 주고 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1977년에 일본을 여행하고 가부키와 노가쿠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 극 형식의 나지막한 암시, 기본 요소들은 관객들이 당연히 지성과 감성,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갖고 있으리라 전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관객에게 지극한 경의를 증명한다.” 같은 해 쓰기 시작하여 2년 후 탈고한 『끝없는 이야기』로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이 작품은 1980년에 차경아 씨 번역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1995년, 위암으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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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남부 독일 가르미쉬-파르텐키르헨에서 태생이다. 1931년 뮌헨으로 이사했다. 뮌헨은 바그너를 후원한 음악과 무대의 도시이고, 반(反)인상주의를 표방하며 자아와 영혼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 표출의 예술로 정의되는 독일 표현주의 유파인 '청기사'파를 배태한 고장이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었고, 히틀러가 나치스에 가담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에드가 엔데는 독일 최초의 초현실주의 화가 가운데 하나로, 엔데는 여러 화가와 조각가, 문학가와 그들의 아이들 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또한 나치 치하인 1936년 초등 학교에 입학했고, 유겐트에 입단해야 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그림은 퇴폐 예술로 낙인찍혀 예술 활동을 금지당한다. 엔데는 주변의 친한 예술가들이 나치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보고 강제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결국 집에서 들은 이야기는 밖에서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이차 세계 대전 즈음, 아버지에게 징집 영장이 발부되자 학업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나치의 눈을 피해 도망했다. 그는 1943년부터 시와 단편을 쓰기 시작했으나 소망은 극작품을 쓰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대학을 중퇴하고, 20세인 1949년 장학금을 받으며 연극학교에 들어가 1950년에 수련을 마쳤으나 그의 작품을 채택하려는 극단은 없었다. 이후 노래 가사, 라디오·텔레비전 각본을 쓰기도 하고 무대 감독을 맡아 보기도 하지만 그가 버는 돈은 그 사이에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 자신이 사는 집세를 내는 데도 충분치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예술적·문학적인 위기도 다가온다. '뭔가 전혀 다른 일'을 시도하는 것밖에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학창 시절 친구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책 텍스트를 써 달라고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어떤 계획이나 의도 없이 단순히 '글을 지어 내는 즐거움'에 몸을 맡기게 되는데, 그 결과 1년 후인 1958년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라는 두툼한 원고가 완성된다. 하지만 열한 군데 출판사를 전전하는 동안 이 원고를 출간하려고 나서는 데는 없었다. 에리히 케스트너에게도 원고를 보내 보지만 응답이 없었다. 원고가 완성된 지 1년 반 후에, 티네만이라는 출판사는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할 수 있도록 원고를 개작하라는 조건과 함께 원고를 채택한다. 그리하여 1960년에 1권이 나오고, 1961년에 2권이 나오게 되었는데 독일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고 라디오와 TV 시리즈로 방송되는 등 이 작품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후 그의 대표작인 『모모』가 나오기까지는 10년이 넘는 공백이 있다. 그 사이에 엔데는 다시 극작품을 쓰려는 시도에 몰두한다. 그의 공백이 일부 설명될 수 있는 국면이다. 물론 그 사이에 결혼을 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있다. 그는 1971년 로마 근교로 이사한다. 그가 독일을 떠난 것은 문학계의 분위기 때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당시 독일 문학계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으로 독자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향을 의도하지 않는 작품은 도피문학으로 간주했고, 엔데는 이런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로마에서의 전원생활은 엔데의 삶을 바꾼다. 이 작품 역시 독일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처음 반응은 『짐 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에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판매 부수가 늘고 역시 여러 나라 말로 소개된다. 한국에서도 1977년,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차경아의 번역으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 번역본은 말 그대로 대박을 치며 엔데를 고무시켰고, 이 때의 인연을 계기로 차경아는 엔데의 대표작들을 연달아 번역하는 건 물론 창작 과정에 엔데와 논의를 주고 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1977년에 일본을 여행하고 가부키와 노가쿠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 극 형식의 나지막한 암시, 기본 요소들은 관객들이 당연히 지성과 감성,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갖고 있으리라 전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관객에게 지극한 경의를 증명한다.” 같은 해 쓰기 시작하여 2년 후 탈고한 『끝없는 이야기』로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이 작품은 1980년에 차경아 씨 번역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1995년, 위암으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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