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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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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798
== 생애 == 이탈리아 파도바의 좌파 노동자 집안에서 1933년에 태어났다. 불과 2세에 아버지를 파시스트들에게 잃었고, 성장한 후에는 파도바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내면서 사회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 이탈리아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전후 50~60년대를 거쳐 북부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북부의 급진적 노동자 정치세력이 성장하는 시점에서,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걸고 사회 탄압이 극심했다. 이 와중에 기존 좌파 정당인 이탈리아 사회당은 63년 보수당인 기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우경화의 기미를 보였고, 이에 노동자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공산당은 소련에 비판적이어서 스탈린을 싫어하는 유로코뮤니스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역시 40년대에 기민당과 결탁한 전력이 있었으며, 노동자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데도 노동자들의 정치파업을 막았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는 투쟁 지속, 붉은 여단 등의 비의회 좌파 운동이 활발해졌고, 마침 정신을 차리고 기민당과의 비타협 노선을 밝힌 공산당까지 합쳐 대략 35%의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의회좌파 운동은 노선투쟁이 심각하여 서로 암살 테러를 벌이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네그리는 50년대 중반부터 교수를 병행하면서 노동조합 조직가로써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비의회 좌파 운동에서 사상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네그리는 공장 안 명령 체계처럼 일사불란함을 유지하고 싶어하던 노동조합들에게 반대하고 노동자들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라고 한다. 이를 노동조합 외부로 확장시킨 것이 자율주의 운동이다. 그러다가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 수상 납치살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탄압을 받게 되자 네그리는 1979년 알도 모로 수상 살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네그리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는데, 오히려 네그리는 이 때 붉은 여단의 무장투쟁을 비판하는 문서에 서명했다가 최우선 암살 대상으로 찍힌 상태였으며 자율주의 운동의 특별한 스탠스 때문에 기존 좌파 정당으로부터도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이 때 활약한 것이 이탈리아 언론으로, 이탈리아 언론을 장악한 사람은 그 유명한 베를루스코니라서 특정 정파의 유력한 사상가 중 한명일 뿐인 네그리를 좌파의 마왕(까띠보 마에스트로 - 검은 지휘자)쯤 되는 위치인 양 선동하였다. 베를루스코니는 후술할 네그리의 망명 해제 과정에서도 이번엔 정치인으로써 빅엿을 먹인다. 네그리는 수감 생활 중 1983년 의원 면책 특권을 받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면책 특권으로 잠시 풀려나지만, 면책 특권 박탈을 위한 소송이 시작되고 두 달 후 기어이 하원에서 면책특권을 박탈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네그리는 체포될 때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의 철학자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망명 생활 중 파리 제 8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철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7년 아직도 수배와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자율주의 운동가들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다시 수감되었다. 네그리가 재수감될때 전세계적인 구명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부터는 가택 연금으로 전환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연금에서 풀려났다. 이후 활발한 저술, 강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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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이탈리아 파도바의 좌파 노동자 집안에서 1933년에 태어났다. 불과 2세에 아버지를 파시스트들에게 잃었고, 성장한 후에는 파도바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내면서 사회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 이탈리아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전후 50~60년대를 거쳐 북부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북부의 급진적 노동자 정치세력이 성장하는 시점에서,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걸고 사회 탄압이 극심했다. 이 와중에 기존 좌파 정당인 이탈리아 사회당은 63년 보수당인 기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면서 우경화의 기미를 보였고, 이에 노동자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한편 이탈리아 공산당은 소련에 비판적이어서 스탈린을 싫어하는 유로코뮤니스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역시 40년대에 기민당과 결탁한 전력이 있었으며, 노동자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는데도 노동자들의 정치파업을 막았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는 투쟁 지속, 붉은 여단 등의 비의회 좌파 운동이 활발해졌고, 마침 정신을 차리고 기민당과의 비타협 노선을 밝힌 공산당까지 합쳐 대략 35%의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의회좌파 운동은 노선투쟁이 심각하여 서로 암살 테러를 벌이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네그리는 50년대 중반부터 교수를 병행하면서 노동조합 조직가로써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비의회 좌파 운동에서 사상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네그리는 공장 안 명령 체계처럼 일사불란함을 유지하고 싶어하던 노동조합들에게 반대하고 노동자들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노동자주의(오페라이스모)라고 한다. 이를 노동조합 외부로 확장시킨 것이 자율주의 운동이다. 그러다가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 수상 납치살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탄압을 받게 되자 네그리는 1979년 알도 모로 수상 살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네그리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는데, 오히려 네그리는 이 때 붉은 여단의 무장투쟁을 비판하는 문서에 서명했다가 최우선 암살 대상으로 찍힌 상태였으며 자율주의 운동의 특별한 스탠스 때문에 기존 좌파 정당으로부터도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이 때 활약한 것이 이탈리아 언론으로, 이탈리아 언론을 장악한 사람은 그 유명한 베를루스코니라서 특정 정파의 유력한 사상가 중 한명일 뿐인 네그리를 좌파의 마왕(까띠보 마에스트로 - 검은 지휘자)쯤 되는 위치인 양 선동하였다. 베를루스코니는 후술할 네그리의 망명 해제 과정에서도 이번엔 정치인으로써 빅엿을 먹인다. 네그리는 수감 생활 중 1983년 의원 면책 특권을 받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면책 특권으로 잠시 풀려나지만, 면책 특권 박탈을 위한 소송이 시작되고 두 달 후 기어이 하원에서 면책특권을 박탈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네그리는 체포될 때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의 철학자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망명 생활 중 파리 제 8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철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7년 아직도 수배와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자율주의 운동가들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다시 수감되었다. 네그리가 재수감될때 전세계적인 구명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부터는 가택 연금으로 전환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연금에서 풀려났다. 이후 활발한 저술, 강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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