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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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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2061
== 역사 == 조선인들이 만주로 흘러들어간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이미 흥선대원군이 당백전 뿌리던 시절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몰려갔는데, 이 지방은 청나라가 여진족의 발상지로써 그린벨트로 묶어놓은 곳이였다. 아무리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도 중원에서 먼 만주까지 전부 관할을 할 수 없는 노릇이였다. 결국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틈을 타 살기 힘든 고향에서 탈출한 조선인들이 남만주(요녕), 북만주(길림), 간도, 연해주 등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런 추세가 당백전 인플레이션과 함께 조선의 민생이 악화 되면서 본격적으로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이 만주로 흘러들어간다. 이런 유입민들이 꽤 많은 걸 청나라인들이 모르던 게 아니였다. 처음에는 밀입국자를 처벌도 해보고 지금 중국 처럼 탈조자들을 도로 조송시키거나 그 사람들이 일군 농산물을 압수하기 까지 했으나, 군데군데 만주족들이 살던 마을에 세경살이를 하던 조선사람들이 점점 조선인들이 흘러들어오니까 끼리끼리 똘똘 뭉치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이 사람들의 권익을 수용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만주에 유입되던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은 거기 살던 만주족 원주민보다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식자층이 많았고, 조선과 청나라를 오고 가던 보부상 행상인들도 많았을 테니 장삿속이 밝은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간도라고 부르는, 북만주 지역에는 함경도 출신 포수들이 수렵을 해서 가죽을 팔아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굴러들어온 돌들이 박힌 돌들을 몰아내던 상황이였다. 결국 청나라는 민족 동화 정책으로 동네 대표로 청나라인을 선출해 세우는 지극히 중화인민공화국 스러운 방식으로 관리를 하게 되는데, 이미 만주에서 산전수전 거쳐서 생활하던 중국 관화를 할 줄 알던 사람들을 바지 청나라 사람으로 세우고 변발을 시켜 이 사람의 자식 등으로 가족관계등록을 하게 되며 바지 청나라 사람의 조선 성을 물려받아 만주계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상황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는데, 일제에 의해 만주에 철도가 세워지면서 한반도 사람들이 건설 용역으로 유입이 되기도 하고,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도시화 되고 있던 만주로 돈을 벌러 가는 사람들도 꾸준하게 흘러 들어갔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족인 윤동주는 이 당시에 이미 그의 고조 할아버지가 만주로 떠난 뒤의 4세대 였다. 그가 일본 유학을 하며 썼던 시 '별 헤는 밤' 에 그의 당시 만주의 풍경이 간접적으로 나오는데,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 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녔던 1930년대에 중국 여자애들은 만주 출신인 그에겐 '이국소녀' 였던 것이다. 한반도인의 디아스포라 이후에 만주는 이 정도로 조선인들의 영역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되니 독립군이 만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였고, 일제의 괴뢰 만주국이였던 때에는 일제가 독립군을 진압하고자 연변을 공격하는데 이 때 벌어진 전투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이다. 봉오동에서 얼마나 저항이 거셌는지 일제가 독립군 진압에 실패하자, 연변의 민간인이 살던 동네들에 대규모 학살을 강행하는데 이게 훈춘 사건 등이 있었던 간도 참변이다. 청산리 대첩의 무대도 만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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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조선인들이 만주로 흘러들어간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이미 흥선대원군이 당백전 뿌리던 시절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몰려갔는데, 이 지방은 청나라가 여진족의 발상지로써 그린벨트로 묶어놓은 곳이였다. 아무리 강력한 중앙집권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도 중원에서 먼 만주까지 전부 관할을 할 수 없는 노릇이였다. 결국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틈을 타 살기 힘든 고향에서 탈출한 조선인들이 남만주(요녕), 북만주(길림), 간도, 연해주 등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런 추세가 당백전 인플레이션과 함께 조선의 민생이 악화 되면서 본격적으로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이 만주로 흘러들어간다. 이런 유입민들이 꽤 많은 걸 청나라인들이 모르던 게 아니였다. 처음에는 밀입국자를 처벌도 해보고 지금 중국 처럼 탈조자들을 도로 조송시키거나 그 사람들이 일군 농산물을 압수하기 까지 했으나, 군데군데 만주족들이 살던 마을에 세경살이를 하던 조선사람들이 점점 조선인들이 흘러들어오니까 끼리끼리 똘똘 뭉치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이 사람들의 권익을 수용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만주에 유입되던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은 거기 살던 만주족 원주민보다 한자를 읽을 줄 아는 식자층이 많았고, 조선과 청나라를 오고 가던 보부상 행상인들도 많았을 테니 장삿속이 밝은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간도라고 부르는, 북만주 지역에는 함경도 출신 포수들이 수렵을 해서 가죽을 팔아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굴러들어온 돌들이 박힌 돌들을 몰아내던 상황이였다. 결국 청나라는 민족 동화 정책으로 동네 대표로 청나라인을 선출해 세우는 지극히 중화인민공화국 스러운 방식으로 관리를 하게 되는데, 이미 만주에서 산전수전 거쳐서 생활하던 중국 관화를 할 줄 알던 사람들을 바지 청나라 사람으로 세우고 변발을 시켜 이 사람의 자식 등으로 가족관계등록을 하게 되며 바지 청나라 사람의 조선 성을 물려받아 만주계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상황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는데, 일제에 의해 만주에 철도가 세워지면서 한반도 사람들이 건설 용역으로 유입이 되기도 하고,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도시화 되고 있던 만주로 돈을 벌러 가는 사람들도 꾸준하게 흘러 들어갔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족인 윤동주는 이 당시에 이미 그의 고조 할아버지가 만주로 떠난 뒤의 4세대 였다. 그가 일본 유학을 하며 썼던 시 '별 헤는 밤' 에 그의 당시 만주의 풍경이 간접적으로 나오는데,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 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녔던 1930년대에 중국 여자애들은 만주 출신인 그에겐 '이국소녀' 였던 것이다. 한반도인의 디아스포라 이후에 만주는 이 정도로 조선인들의 영역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되니 독립군이 만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였고, 일제의 괴뢰 만주국이였던 때에는 일제가 독립군을 진압하고자 연변을 공격하는데 이 때 벌어진 전투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이다. 봉오동에서 얼마나 저항이 거셌는지 일제가 독립군 진압에 실패하자, 연변의 민간인이 살던 동네들에 대규모 학살을 강행하는데 이게 훈춘 사건 등이 있었던 간도 참변이다. 청산리 대첩의 무대도 만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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