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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 울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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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3014
=== 고독과 쇠락의 말년 === 1932년부터는 할리우드 생활을 청산하고 뉴욕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1957년까지 함께 살았다. 다만 어머니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는 듯. 자신의 수입으로 충분히 고급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허름한 호텔을 전전하였다. 말년에 건강이 안좋아 고생을 하였다. 아마도 젊어서부터 지나친 흡연과 음주를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5년에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다쳐서 다리를 못쓰게 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자주 있는데, 바로 자신이 다리와 관련된 비극을 겪게 된다. 1967년 맞지 않는 신발을 억지로 신고다니다가 발에 괴저현상이 왔는데, 치료는커녕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면서 고통을 참다가, 결국 의사를 찾았을 때에는 너무 늦어버려서 무릎 위까지 절단해야만 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도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그나마 거의 가지도 않았지만) 파티에서 그의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을 만나도 무례하게 물리칠 정도였다. 당연히 지인이라고는 손꼽을 정도밖에 없어서 작품을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일이라고는 없었으며, 있다고 해도, 자신이 쓰던 레밍턴 휴대용 타자기(《흑의의 신부》)나, 자신이 싫어한 호텔방(《환상의 여인》)정도였다. 자신의 나이를 세살, 때때로 일곱살까지 속이기도 했고, 결코 스스로 나서서 어린 시절이나 그외 사적인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기회만 되면 자신을 나타내는 문서에서 자신의 정보에 대해 속이려고 하였다. 가끔 론 굴랏(Ron Goulart)같은 젊은 숭배자들과의 교제로 사회적 교류를 유지하였지만, 말년의 그는 더욱 폐쇄적이 되어 버려서 1968년 트뤼포 감독이 만든 자신의 작품의 시사회가 뉴욕시에서 열렸을 때조차도 참석하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발표하는 작품도 거의 없어졌고, 고독한 말년을 보냈다. 다리수술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8년 9월 25일 한 차례 발작이 왔고 그는 이겨내지 못했다. 사망당시 몸무게는 40kg에 불과했다. 그의 죽음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미국의 유력지에 한 줄의 기사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독한 작가의 최후였다. 유해는 뉴욕 주 하츠데일(Hartsdale)의 페른클리프(Ferncliff) 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시가 약 85만불 정도인 자산을 모교에 남겨서 어머니를 기념하는 장학금(컬럼비아 대학 저널리즘 전공)에 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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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과 쇠락의 말년 === 1932년부터는 할리우드 생활을 청산하고 뉴욕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1957년까지 함께 살았다. 다만 어머니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는 듯. 자신의 수입으로 충분히 고급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허름한 호텔을 전전하였다. 말년에 건강이 안좋아 고생을 하였다. 아마도 젊어서부터 지나친 흡연과 음주를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5년에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다쳐서 다리를 못쓰게 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자주 있는데, 바로 자신이 다리와 관련된 비극을 겪게 된다. 1967년 맞지 않는 신발을 억지로 신고다니다가 발에 괴저현상이 왔는데, 치료는커녕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면서 고통을 참다가, 결국 의사를 찾았을 때에는 너무 늦어버려서 무릎 위까지 절단해야만 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도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그나마 거의 가지도 않았지만) 파티에서 그의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을 만나도 무례하게 물리칠 정도였다. 당연히 지인이라고는 손꼽을 정도밖에 없어서 작품을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일이라고는 없었으며, 있다고 해도, 자신이 쓰던 레밍턴 휴대용 타자기(《흑의의 신부》)나, 자신이 싫어한 호텔방(《환상의 여인》)정도였다. 자신의 나이를 세살, 때때로 일곱살까지 속이기도 했고, 결코 스스로 나서서 어린 시절이나 그외 사적인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기회만 되면 자신을 나타내는 문서에서 자신의 정보에 대해 속이려고 하였다. 가끔 론 굴랏(Ron Goulart)같은 젊은 숭배자들과의 교제로 사회적 교류를 유지하였지만, 말년의 그는 더욱 폐쇄적이 되어 버려서 1968년 트뤼포 감독이 만든 자신의 작품의 시사회가 뉴욕시에서 열렸을 때조차도 참석하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발표하는 작품도 거의 없어졌고, 고독한 말년을 보냈다. 다리수술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8년 9월 25일 한 차례 발작이 왔고 그는 이겨내지 못했다. 사망당시 몸무게는 40kg에 불과했다. 그의 죽음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미국의 유력지에 한 줄의 기사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독한 작가의 최후였다. 유해는 뉴욕 주 하츠데일(Hartsdale)의 페른클리프(Ferncliff) 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시가 약 85만불 정도인 자산을 모교에 남겨서 어머니를 기념하는 장학금(컬럼비아 대학 저널리즘 전공)에 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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