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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r5)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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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br]대조선국|<table align=right><-2> [[외부:https://i.imgur.com/DobhK6b.png|width=250]] ||
|| 건국 || 1392년 ||
|| 멸망 || 1910년 ||
|| 수도 || 한양 ||
|| 정치 || 전제군주 ||
|| 종교 || 유교 ||

朝鮮 / Joseon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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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만든 국가다. 1392년에 건국하고 1910년에 망하여 약 500년을 존속했으며, 여기서 이름을 따온 조선왕조 500년이란 사극도 있다.

== 역사 ==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 폐위 후 창왕, 창왕 폐위 후 공양왕을 거쳐 1392년 공양왕을 폐위하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왕조가 건국되었다.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inter:나무위키:1차 왕자의 난]]이 벌어져 정종에 이어 태종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태종 다음 유명한 세종대왕이 즉위하며 한글 개발, [[장영실]]과 같은 인재 등용, 농서 편찬 등으로 전성기를 맞이한다.

세종에 이어 문종이 즉위했으냐 건강 악화로 약 2년만에 사망하였다. 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수양대군이 [[inter:나무위키:계유정난]]을 일으켜 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집현전 폐지 등 실책과 치적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다. 세조 사망 후 예종이 즉위했으나 1년만에 사망하고 성종이 즉위했으며, 성종 다음으로 즉위한 것이 유명한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inter:나무위키: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중종 때 [[조광조]]가 개혁을 주도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며 사망했으나, [[사림파]]들은 계속 힘을 키우고 사화를 이겨내며 조선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반상 구별, 군사, 과학기술 천시, 남존여비 강화 등이 이뤄졌다. 중종에 이어 인종과 명종이 즉위했으며, [[이황]]과 [[이이]]가 등장하면서 성리학이 크게 발전하였으나 동시에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의 당쟁도 생겼다. 동시기 [[일본]]은 [[inter:나무위키:센고쿠 시대]]를 보내며 조총과 같은 신무기가 도입되면서 군사력이 크게 늘어났고, 이는 임진왜란의 초기 전세를 짐작하게끔 만들었다.

선조 즉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나 명나라의 지원, 의병 거병, [[이순신]]이라는 명장의 활약으로 정유재란까지 이어진 7년간의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왜란 종결 후에도 [[inter:나무위키:재조지은]]에 중시하여 명나라 사대와 청나라 괄시가 이어졌고, 이는 광해군 폐위 후 인조가 즉위하면서 [[inter:나무위키:정묘호란]], [[inter:나무위키:병자호란]]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inter:나무위키:삼전도의 굴욕]] 후 인조에 이어 효종이 즉위하였으며, 북벌을 추진하다가 종기, 정확히는 의료사고로 사망하였다.

효종의 뒤로 현종이 즉위했는데, 그의 집권기에 [[inter:나무위키:예송논쟁]]과 [[inter:나무위키:경신대기근]]이 일어났다. 이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현종은 단명했고, 숙종이 즉위한다. 이 시기에 유명한 인물로 송시열이 있다. 숙종이 40년 이상 재위한 것에 비해 그 뒤의 경종은 약 4년밖에 재위 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그 다음으로 영조, 정조가 즉위한다. 탕평책이 펼쳐지고 5일장, 화폐 통용 등 상업 활성화, 서민 문화 발달 등으로 조선은 중흥기를 맞이한다. 김홍도, 신윤복 같은 유명한 화가가 활동한 것도 이 때이며, 장용영 조직, 규장각 부활, 수원 화성 건설도 이뤄졌다.

정조후 순조, 철종이 즉위하며 19세기가 열렸으나, 세도 정치, 삼정의 문란으로 난세가 펼쳐졌다. 이에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집권해 서원 철폐, 호포제 실시 등 개혁을 주도했으나 천주교 탄압과 함께 척화비로 대표되는 통상 거부로 서양 문물 도입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전에 [[inter:나무위키:병인양요]], [[inter:나무위키:신미양요]]가 일어난 것도 있지만서도… 그 뒤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으나, [[inter:나무위키:여흥 민씨]]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상태에서 지지부진한 근대화는 결국 [[inter:나무위키:가쓰라-태프트 밀약]]에 힘입어 [[일본]]이 [[inter:나무위키:을사조약]]과 [[inter:나무위키:경술국치]]로 조선-대한제국을 멸망시키도록 만들었다.

== 신분제 ==
고려에 비해 [[노비]]와 같은 신분제가 강화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는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명분론이나 리일분수(특히 [[이황]]에 의해)[* 이승환, 「리일분수 담론의 사회 현실적 의미과 기능 - 성리학의 신분제 정당화 문제를 중심으로」, 철학연구 57권, 2018.]과 무관치 않으며, [[조광조]] 등의 발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신분제가 완전히 철폐된 것은 1894년 [[inter:나무위키:갑오개혁]]을 통해서였다. 특히 노비가 아닌 양인 중에서도 신량역천은 각종 차별에 시달렸다.[* 신종한, 「근대 신분제도의 변동과 일상생활의 재편」, 동양학 47호, 2010.][* 김중섭, 「조선 전기 백정 정책과 사회적 지위」, 조선시대사학보 68호, 2014.]

== 영상 ==
[youtube(3Plu6lw3Q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