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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win Rudolf Josef Alexander Schrödinger(1), 1881년 8월 12일 ~ 1961년 1월 4일
오스트리아 태생의 이론물리학자로, 양자역학에서의 슈뢰딩거 방정식을 창안한 사람이다. 일반인들에게는 그가 코펜하겐 해석을 비난하기 위해 만든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의 방정식 - 슈뢰딩거 방정식은 비상대론적이며, 그것을 고안할 때 동료 수학자 헤르만 바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1. 삶 ✎ ⊖
그의 아버지였던 루돌프 슈뢰딩거는 옷감공장 사장으로서, 식물학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의 조부는 화공학과 교수였다. 그는 1898년 k.k.아카데믹 김나지움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1906년 7월 11일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의 어떤 대학에도 입학할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 이후 빈 대학에 입학하여 이론물리를 하제뇌를 교수로부터, 실험물리를 엑스너 교수로부터 배웠으며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포병장교와 군 사관학교의 교사로써 복무하였다.
1927년에는 막스 플랑크의 추천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의하였으며 1933년부터는 옥스포드 대학에 초청받아 교수로서 재직하였다. 같은 해 노벨 물리학상을 영국의 폴 디락과 함께 수상하였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그와 그의 부인 안네마리 슈뢰딩거는 여행객으로 변장하고 오스트리아를 탈출했으며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걸쳐 옥스포드로 되돌아갔다. 그 이후 겐트 대학에서 잠시 교수로서 재직했다.
1940년 수학자이자 아일랜드의 수상이었던 에몽 드 발레라가 그를 초청하여 더블린 고등과학연구소 창립 멤버가 되었다. 1944년 아일랜드 체류 당시 그의 유명한 저서인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저술하였고, 1956년까지는 아일랜드에 체류하면서 1950년 이후로 포럼 알프바흐에 참여하기 위해 매년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였다. 1956년 귀국하였고, 빈 대학교의 명예교수직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그의 이름을 딴 ""슈뢰딩거 상""을 제정하였고, 그 상을 수여받았다.
1960년 5월, 만성 폐질환이 재발하여 빈과 인즈부르크에 있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후 의사의 권고로 알프바흐로 부인과 함께 요양을 떠났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1961년 1월 4일 그 곳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1월 9일 알프바흐에서 거행되었으며, 그 곳에 묻혔다.
1927년에는 막스 플랑크의 추천으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의하였으며 1933년부터는 옥스포드 대학에 초청받아 교수로서 재직하였다. 같은 해 노벨 물리학상을 영국의 폴 디락과 함께 수상하였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그와 그의 부인 안네마리 슈뢰딩거는 여행객으로 변장하고 오스트리아를 탈출했으며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걸쳐 옥스포드로 되돌아갔다. 그 이후 겐트 대학에서 잠시 교수로서 재직했다.
1940년 수학자이자 아일랜드의 수상이었던 에몽 드 발레라가 그를 초청하여 더블린 고등과학연구소 창립 멤버가 되었다. 1944년 아일랜드 체류 당시 그의 유명한 저서인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저술하였고, 1956년까지는 아일랜드에 체류하면서 1950년 이후로 포럼 알프바흐에 참여하기 위해 매년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였다. 1956년 귀국하였고, 빈 대학교의 명예교수직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그의 이름을 딴 ""슈뢰딩거 상""을 제정하였고, 그 상을 수여받았다.
1960년 5월, 만성 폐질환이 재발하여 빈과 인즈부르크에 있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후 의사의 권고로 알프바흐로 부인과 함께 요양을 떠났다. 그러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1961년 1월 4일 그 곳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1월 9일 알프바흐에서 거행되었으며, 그 곳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