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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니 학살사건(영어: Wounded Knee Massacre)는 미국이 서부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해 평원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척박한 소위 '인디언 보호구역'에 강제로 수용하면서 벌어진 인디언 전쟁 말기 1890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참혹한 원주민 학살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에서 최후의 자유로운 아메리카 원주민은 사라졌다.
1. 배경 ✎ ⊖
평원 원주민인 수우족은 미국에 맞서 리틀 빅 혼 전투에서와 같이 한방 먹이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무기와 병력, 전술의 압도적인 차이로 인해 내내 쫓겨다니는 처지였다. 게다가 백인들은 평원 원주민들의 식량인 들소를 조직적으로 무차별 학살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점점 버틸 수가 없어졌고 오랜 기간 미국에 저항해 오던 추장들인 앉은 소, 붉은 구름 등은 초라할 정도로 줄어든 자신들의 부족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주민들은 집단적 멘탈붕괴에 빠졌다. 이 때 파이우트 족 출신의 워보카라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망령의 춤(ghost dance)'이라는 종교의식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는 원주민들이 망령의 춤을 열심히 추면 다음 해 봄에 백인들은 흙에 파묻히고 들소와 야생마가 돌아오며, 망령의 춤을 춘 원주민들은 땅이 흙에 덮일 동안 하늘로 올라가 그간 백인들에게 학살당한 원주민과 함께 이승으로 돌아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의식만 다르지 기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이 종교운동은 수용소의 원주민들에게 급격히 퍼졌고 모든 희망을 잃은 원주민들은 하루종일 망령의 춤을 추는 데만 집중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망령의 춤을 금지하고 추장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와중에 존경받는 추장이었던 앉은 소가 체포 과정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주민들은 집단적 멘탈붕괴에 빠졌다. 이 때 파이우트 족 출신의 워보카라는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망령의 춤(ghost dance)'이라는 종교의식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는 원주민들이 망령의 춤을 열심히 추면 다음 해 봄에 백인들은 흙에 파묻히고 들소와 야생마가 돌아오며, 망령의 춤을 춘 원주민들은 땅이 흙에 덮일 동안 하늘로 올라가 그간 백인들에게 학살당한 원주민과 함께 이승으로 돌아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의식만 다르지 기독교와 다를 것이 없는 이 종교운동은 수용소의 원주민들에게 급격히 퍼졌고 모든 희망을 잃은 원주민들은 하루종일 망령의 춤을 추는 데만 집중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망령의 춤을 금지하고 추장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와중에 존경받는 추장이었던 앉은 소가 체포 과정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2. 전개 ✎ ⊖
앉은 소의 부족들은 수백명 단위로 흩어져 망령의 춤을 출 수 있는 장소로 도망을 쳤고, 그 중 한 무리는 12월 17일 미네콘주 족 추장 큰발(Big Foot)에게 의탁하였다. 큰 발은 앞서 망령의 춤 확산 과정에서 과부가 대부분인 6백명 정도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는데, 앉은 소의 피살 소식을 들은 추장은 붉은 구름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길 바라면서 약 350명의 부족민을 이끌고 붉은 구름이 있는 파인 릿지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추장 큰발은 폐렴에 걸려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한 편, 12월 17일에 이미 미국 당국은 망령의 춤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큰발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고, 유독 학살사건에 많이 연루되기로 유명한 미국 제 7기병대는 이들을 잡기 위해 출동하였다. 12월 28일 큰발의 부족과 제 7기병대는 포큐파인 크릭에서 조우하였고 큰발은 즉시 항복하였다. 제 7기병대는 이들을 운디드 니(Wounded Knee)라고 불리는 작은 강 근처의 기지로 이송하고 그 다음 날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소총 두 정을 빼고 원주민들이 모든 무장을 해제했을 때, 그 중 귀가 들리지 않는 검은 코요테(로 추정되는)라는 수우족 병사가 말을 알아듣지 못해 총을 내려놓지 않았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누가 쏘았고 누가 맞았는지 모를 총성이 울리자 제 7기병대는 집단 광기에 빠져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아비규환 끝에 추장 큰발을 포함한 약 300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미군 쪽에서도 팀킬로 인한 25명의 사망자와 39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3. 학살 이후 ✎ ⊖
미국 당국은 뻔뻔하게도 이 사건을 학살이 아닌 전투로 규정하고 미군 20명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로부터 83년이 지난 1973년 2월 27일에는 이 때 학살당한 오글라라 부족 출신 아메리카 인디언 운동(AIM)활동가 약 200명이 부패한 인디언 보호구역 정부를 탄핵하고 보호구역의 열악한 실태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운디드 니를 71일간 점거했다가 미국 정부에게 무력진압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은 언론의 조명을 크게 받아서 원주민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긴 했지만, 보호구역 정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정부의 묵인 하에 정치깡패를 고용해 3년간 약 60여명의 인디언 활동가를 암살했다. 미국 당국은 이 사건에 대해 보도통제를 하고,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원주민 복장을 하고 나와 이 사건에 대한 항의표시로 말론 브란도의 아카데미 수상 거부 의사를 대신 발표한 사친 리틀페더(Sacheen Littlefeather)에게 무대에서 체포위협을 하는 등 최소한 70년대까진 이 사건에 대해 아무 반성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