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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최근 수정 시각 : 2023-03-09 01:00:12 | 조회수 : 4
张飞 / Zhang Fei, ?(1) ~ 221.

중국 삼국시대의 장수. 자는 익덕(益德)이다.(2) 유비, 관우와 의형제를 맺었다.(3)

목차

1.
1.1. 초기
1.2. 서주
1.3. 장판파
1.4. 익주/한중
1.5. 사망
2. 가족
3. 영상

1.

1.1. 초기

정확한 출신에 대해선 기록이 없어 불명이며, 유비와 동향인 탁군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몰락한 명문가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의 성격이나 하후씨와의 결혼(4)으로 미루어 추정할 뿐 별 다른 근거는 없으며 시서화에 능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민간 전승으로 전해질뿐이다. 연의에선 이 설을 어느정도 차용했는지 도원결의 후 장비의 재산이 군자금으로 쓰이는 것으로 나온다.

정사 장비전과 관우전을 보면 연의만큼은 아니더라도 유비, 관우와 가까운 사이였을 것으로 보이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함께 의용군을 일으켜 거병하였다. 그 뒤 평원상이 된 유비의 아래에서 관우와 함께 별부사마가 되었다.

1.2. 서주

유비가 서주를 다스리게 된 후 유비가 원술과 싸우러 나갈 때 하비를 지키고 있다가, 조표와 다투다 그의 배신으로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기고 유비에게 합류하였다. 이후 여포 토벌전이 벌어진 뒤 조조에 의해 중랑장에 임명되었으며, 유비가 원술 토벌을 빌미로 조조에게서 빠져나갈 때 함께 빠져나왔다. 이 때 진의록을 죽이기도 했다.

하후연전의 위략에 따르면 200년에 땔나무를 하러 나온 하후씨를 잡아 아내로 삼았다고 한다. 납치혼과 정략혼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어 어느 하나가 옳다고 말하긴 어렵다.

1.3. 장판파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


원소 패망 후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하면서 제갈량을 받아들이자 제갈량전에 따르면 관우와 함께 매우 언짢아했다고 전해진다. 유표 사망 후 유비가 조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당양 장판에서 절체 절명의 위기를 맞자 기병 20기만을 데리고 장판교에서 조조군의 추격을 멈췄고, 유비는 탈출할 수 있었다.

1.4. 익주/한중

남군 공방전에서 주유와 함께 조인과 맞섰으며, 유비가 강남을 얻은 뒤엔 남군태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익주에서 제갈량과 함께 군현들을 평정했으며, 파서태수로 임명되었다.

한중공방전의 탕거 전투에서 장합의 별동대를 기습해 격파하였으나, 유비의 명령으로 마초, 오란과 함께 하변에 주둔(5)했다가 조휴의 활약으로 오란은 사망하고 마초와 함께 퇴각하였다. 이후 한중공방전에서 배후인 파군을 지켰으며,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우장군, 가절에 임명되었다. 위연전에 따르면 한중태수도 생각할 수 있었으나 한중태수는 위연이 임명되었다.

211년 유비가 황제가 되자 거기장군, 사례교위로 임명되었다.

1.5. 사망

이릉대전을 준비하면서 장비도 낭중에서 1만명을 이끌고 강주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휘하의 범강, 장달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사망하였다. 이들은 수급을 들고 오나라로 도주했는데, 이들이 왜 장비를 살해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성격과 유비의 직감으로 보아 부하를 지나치게 학대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260년 환후로 시호가 내려졌다.

2. 가족

아내인 하후씨 아래로 2남 2녀를 뒀다. 두 딸은 모두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 장포
  • 장소
  • 경애황후
  • 장황후

3. 영상

(1) 167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논란이 있다.
(2) 연의에선 翼德으로, 더할 익이 아닌 날개 익이다.
(3) 삼형제 중 실제로는 관우가 나이가 제일 많지만 유비가 맏형이 되었는데, 장비는 확실하게 막내다.
(4) 납치혼이 아닌 정략혼일 경우
(5) 이는 오란이 교두보를 쉽게 마련하기 위한 작전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