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가져온 문서/진보위키
长征
중국 공산당이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장시성 루이진에서 산시성 옌안까지 도보로 근거지를 옮긴 사건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대장정이라고 하지만, 정식 명칭은 장정이다.
1. 배경 ✎ ⊖
1927년 4월 12일 장제스의 쿠데타 및 배신으로 동지의 8할을 잃은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저우언라이의 지도로 1927년 8월 1일 난창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지도부는 쫓기게 된다. 그보다 조금 이후인 9월 1일 마오쩌둥은 자신의 고향인 창사에서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나 다시 중과부적으로 참패하고 도주, 남쪽 징강산에서 해방구를 열게 된다. 여기에 난창봉기의 패잔병들은 주더의 지도아래 징강산으로 도피해 와서 중국공농홍군이 성립한다. 두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주모군이라고 하기도 한다.
홍군은 장제스의 토벌작전을 차례로 분쇄하면서 성장했고 지배영역을 넓혀간다. 홍군의 이런 성장은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지주들을 추방하고, 세금을 줄여주며 홍군의 엄격한 군기에 대한 농민들의 폭발적인 지지 떄문이었다. 홍군은 장시성 루이진(서금)을 중심으로 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150,000 제곱킬로미터의 영역(1)를 지배할 만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장제스는 4번에 걸친 초공작전에서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공산당을 토벌하려다가 일본에게 빈틈을 보여서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빼앗기고, 일본의 지속적인 공세를 감당하지 못해서 1933년 5월에는 일본과 협정을 맺고 산해관 이북의 일본 지배를 용인했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용인한 장제스는 홍군과 소비에트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공세를 준비했다. 일본과의 대결에는 겨우 5만의 병력을 마지못해 내보내던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해서는 총병력 100만을 준비했고, 전직 독일군 총참모장을 맡았던 한스 폰 젝트 대장을 거액으로 초빙해왔고, 미국에서 각종 최신형 전투기들을 구입했다. 또한 4번에 걸친 참패에서 장제스군 특유의 나쁜 군기로 약탈, 방화, 강간같은 비행 때문에 지역민들이 모두 홍군편을 든 것을 교훈삼아 병사들에게 충분히 급료를 주고 군기감시를 전담하는 부대를 운용하게 되었다.
또한 홍군의 기동전에 번번히 보급부대가 털려 패하던 실패를 교훈을 되새겨 독일인 군사고문단의 조언에 따라 소비에트 주위로 보급용 도로를 놓고 토치카를 건설하면서 천천히 나가는 방식으로 전진을 했다.
홍군은 장제스의 토벌작전을 차례로 분쇄하면서 성장했고 지배영역을 넓혀간다. 홍군의 이런 성장은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해 지주들을 추방하고, 세금을 줄여주며 홍군의 엄격한 군기에 대한 농민들의 폭발적인 지지 떄문이었다. 홍군은 장시성 루이진(서금)을 중심으로 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150,000 제곱킬로미터의 영역(1)를 지배할 만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장제스는 4번에 걸친 초공작전에서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공산당을 토벌하려다가 일본에게 빈틈을 보여서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빼앗기고, 일본의 지속적인 공세를 감당하지 못해서 1933년 5월에는 일본과 협정을 맺고 산해관 이북의 일본 지배를 용인했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용인한 장제스는 홍군과 소비에트에 대해서는 어마어마한 공세를 준비했다. 일본과의 대결에는 겨우 5만의 병력을 마지못해 내보내던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해서는 총병력 100만을 준비했고, 전직 독일군 총참모장을 맡았던 한스 폰 젝트 대장을 거액으로 초빙해왔고, 미국에서 각종 최신형 전투기들을 구입했다. 또한 4번에 걸친 참패에서 장제스군 특유의 나쁜 군기로 약탈, 방화, 강간같은 비행 때문에 지역민들이 모두 홍군편을 든 것을 교훈삼아 병사들에게 충분히 급료를 주고 군기감시를 전담하는 부대를 운용하게 되었다.
또한 홍군의 기동전에 번번히 보급부대가 털려 패하던 실패를 교훈을 되새겨 독일인 군사고문단의 조언에 따라 소비에트 주위로 보급용 도로를 놓고 토치카를 건설하면서 천천히 나가는 방식으로 전진을 했다.
2. 소비에트의 내부사정 ✎ ⊖
징강산 해방구가 발전한 루이진 해방구는 1931년부터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마오쩌둥이 주석이 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마오쩌둥의 지도력은 약화되었다. 그 이유는 국민당군의 수배에 도피중이던 공산당 고관들이 해방구로 옴에 따라서 당의 지도적 위치가 아니었던 마오쩌둥의 영향력은 점점 감퇴되었다. 여기에 국공합작 초기에 소련에 가서 소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고 온 젊은이들이 코민테른의 배경을 업고 해방구로 돌아와 당권을 장악했다. 여기에 스탈린은 군사고문으로 독일인 오토 브라운을 파견했는데 그는 마오쩌둥-주더의 전술인 유격전을 버리고 적백내전에서 승리한 소련의 예를 따라 국민당군과 정규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