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쭌이 회의(중국어: 遵義 会議, 준의 회의)는 중국 공산당의 장정 기간 중인 1935년 8월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있었던 당대회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 그동안 코민테른의 배경으로 당권을 쥐고 있던 보구, 그리고 군권을 쥐고 있던 오토 브라운은 물러나고 마오쩌둥이 이 두 권력을 모두 쥐게 된다.
이 회의의 세부사항은 1985년까지도 발표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옌안 해방구를 방문하여 대장정을 취재한 에드거 스노우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에도 거의 묘사되지 않고 있다.
1. 배경 ✎ ⊖
국민당의 장제스는 북벌와중인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북벌을 돕던 공산당원을 학살했다. 이에 공산당은 무장투쟁으로 전환하여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기획했으나 모두 진압당하고 오직 마오쩌둥만이 게릴라전술로 성공적인 해방구를 건설했다. 마오쩌둥과 홍군은 4차에 걸친 국민당의 초공작전을 모두 분쇄하고 더욱 영역을 넓혔지만, 해방구로 여러 공산당 간부들이 도피해오면서 마오쩌둥의 지도력은 흔들리게 된다. 특히 코민테른의 배경을 업은 러시아 유학파인 28인의 볼셰비키가 해방구에 오면서 마오쩌둥은 당권과 군권을 상실하고 실권 없는 상징적인 위치로 격하된다.
장제스는 1934년 제5차 초공전을 일으켰고 여기에 당권을 쥔 보구와 군권을 쥔 오토 브라운은 그동안 벌여왔던 마오쩌둥의 게릴라전술을 벌이고 정면으로 맞선다는 방침을 세운다. 하지만 이런 방침은 큰 피해를 야기했고, 4만명의 병력뿐만 아니라 그동안 지배하고 있던 촌락을 모두 상실했다. 결국 10월 16일 당중앙은 장시 해방구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도피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장제스는 1934년 제5차 초공전을 일으켰고 여기에 당권을 쥔 보구와 군권을 쥔 오토 브라운은 그동안 벌여왔던 마오쩌둥의 게릴라전술을 벌이고 정면으로 맞선다는 방침을 세운다. 하지만 이런 방침은 큰 피해를 야기했고, 4만명의 병력뿐만 아니라 그동안 지배하고 있던 촌락을 모두 상실했다. 결국 10월 16일 당중앙은 장시 해방구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도피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2. 참가자 ✎ ⊖
국민당군의 맹추격을 받아 병력이 급감한 가운데 해가 바뀐 1935년 구이저우성 준의에서 당대회가 열렸다. 열린 날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현재는 1월 15-17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회의의 참석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나중에 당간부가 된 천윈의 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둥비우 등의 몇몇이 더 참가했다고 한다.
- 정치국 위원: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장원톈, 보구
- 후보위원: 류사오치, 덩파, 카이펑, 왕자샹
- 홍군 총사령부 및 각 부대 책임자: 류보청, 리푸춘, 린뱌오, 녜룽전, 펑더화이, 양상쿤, 리쭤란
- 옵저버: 오토 브라운, 우슈취안(오토 브라운의 통역), 덩샤오핑, 류샤오원
이외에도 둥비우 등의 몇몇이 더 참가했다고 한다.
3. 경과 ✎ ⊖
쭌이회의는 3일동안 갑론을박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때 마오쩌둥의 전략이 지지를 받았고, 그동안 당과 군을 이끌었던 보구와 오토 브라운은 실권에서 멀어졌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중앙통치기구를 개조하고 마오쩌둥이 정치국 상임위원장을 맡는다. 2. 장원톈은 결의안의 초안을 작성하고 상임위원회가 이를 검토한후 각 지부에 발송해 토론시킨다. 3. 상임위원회는 적절히 분업을 하달한다. 4. 그동안 당을 이끌어왔던 삼인단(보구, 오토브라운, 저우언라이)은 물러난다. 저우언라이 대신 주더가 최고군사지휘권을 갖고 마오쩌둥을 청치국상임위원장으로 삼아 중공당의 군사지휘권에 합류시킨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중앙통치기구를 개조하고 마오쩌둥이 정치국 상임위원장을 맡는다. 2. 장원톈은 결의안의 초안을 작성하고 상임위원회가 이를 검토한후 각 지부에 발송해 토론시킨다. 3. 상임위원회는 적절히 분업을 하달한다. 4. 그동안 당을 이끌어왔던 삼인단(보구, 오토브라운, 저우언라이)은 물러난다. 저우언라이 대신 주더가 최고군사지휘권을 갖고 마오쩌둥을 청치국상임위원장으로 삼아 중공당의 군사지휘권에 합류시킨다.
4. 영향 ✎ ⊖
이 회의를 끝으로 중공당 내에서 코민테른과 스탈린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고, 마오쩌둥의 독자노선이 득세한다. 중국에서는 이 회의를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