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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 Phong Nhị and Phong Nhất massacre
퐁니 퐁넛 학살은 1968년 2월 베트남 꽝남성에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양민학살이다. 대략 74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1. 상세 ✎ ⊖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한참이던 1968년 남베트남 전역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받은 미군과 남베트남군 그리고 한국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구정 공세가 격해지면서 남베트남 측은 반격을 하고자 했다. 이는 1964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의 청룡부대는 구정공세가 시작되던 1968년 1월 30일부터 2월 29일까지 여단 규모로 이른바 ‘괴룡 1호 작전’을 벌였다. 당연히 이 작전은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작전이었고,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청룡부대의 주둔지 호이안시는 물론 디엔반현 등을 공격하자 전 여단이 나서 베트콩 수색 소탕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의 청룡부대는 베트남 중부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서 민간인 학살을 벌였는데, 그게 바로 퐁니 퐁넛 학살이다. 1968년 2월 12일 오전 08시 15분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퐁넛 마을에 진입한 한국군은 공격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오전 11시 05분 중대의 선두부대는 퐁니촌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공격한 중대에서 부상자 1명이 생겨 후송하였다. 최영언 소대장은 중대장 김석현 대위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고, 중대장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응답을 한다. 결국 한국군 1소대와 2소대가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그 결과 대략 69명에서 7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당시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 응우옌 티탄 씨는 8살에 한국군이 쏜 총에 가족들을 잃었다고 한다. 2016년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관련 다큐를 보면 다음과 같은 그녀의 증언이 나온다.
퐁니와 퐁넛은 행정구역상 촌이었다. 두촌을 합해도 200가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퐁니 퐁 넛은 미국과 남베트남측이 만든 기준에 따르면 안전 마을이었다. 퐁니 퐁넛 학살 이후 남베트남 정부가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자 미군은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고, 주월 미군 사령부 감찰부는 조사결과를 주월 미군 사령관 및 군부 고위 장성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기밀문서로 분류되었다가 결국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2000년 6월 1일 기밀 해제되었다.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졌던 한국군 민간인 학살들 중에 유일하게 사진 자료가 존재하는 사건이었다.
퐁니 퐁넛 학살이 일어났던 마을은 한국사람들이 자주들리는 다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대략 12~13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시골마을인데, 그곳에는 한국군 학살 증오비가 있다. 그 증오비에는 대략 74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나이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78살의 노인부터 엄마 배속에 있던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에서 한국군의 잔혹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의 청룡부대는 베트남 중부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서 민간인 학살을 벌였는데, 그게 바로 퐁니 퐁넛 학살이다. 1968년 2월 12일 오전 08시 15분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퐁넛 마을에 진입한 한국군은 공격방향을 서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오전 11시 05분 중대의 선두부대는 퐁니촌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공격한 중대에서 부상자 1명이 생겨 후송하였다. 최영언 소대장은 중대장 김석현 대위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고, 중대장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응답을 한다. 결국 한국군 1소대와 2소대가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그 결과 대략 69명에서 7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당시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 응우옌 티탄 씨는 8살에 한국군이 쏜 총에 가족들을 잃었다고 한다. 2016년 뉴스타파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관련 다큐를 보면 다음과 같은 그녀의 증언이 나온다.
예전에 사실은 지금의 한국인들을 아직 못 만났을 때 한국인에 대해서 원망이 있었거든요. 한국인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한국군이 방공호에 들어오려고 했었는데 입구가 너무 작아서 못 들어왔어요. 그래서 한국군들이 손에 수류탄을 보여주면서 올라오라고 했어요. 이모가 다 데리고 같이 나왔어요. 우리가 안 올라가면 수류탄을 방공호 안으로 던지잖아요. 언니와 저는 도랑에 있었는데 언니와 오빠의 친구도 다 쓰러졌어요. 5살이 된 남동생은 우물에 가다가 총을 맞아 입이 다 날아갔어요.
퐁니와 퐁넛은 행정구역상 촌이었다. 두촌을 합해도 200가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퐁니 퐁 넛은 미국과 남베트남측이 만든 기준에 따르면 안전 마을이었다. 퐁니 퐁넛 학살 이후 남베트남 정부가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자 미군은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고, 주월 미군 사령부 감찰부는 조사결과를 주월 미군 사령관 및 군부 고위 장성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기밀문서로 분류되었다가 결국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2000년 6월 1일 기밀 해제되었다.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졌던 한국군 민간인 학살들 중에 유일하게 사진 자료가 존재하는 사건이었다.
퐁니 퐁넛 학살이 일어났던 마을은 한국사람들이 자주들리는 다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대략 12~13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시골마을인데, 그곳에는 한국군 학살 증오비가 있다. 그 증오비에는 대략 74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나이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78살의 노인부터 엄마 배속에 있던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에서 한국군의 잔혹함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