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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편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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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41
== 배경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발발 이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미군은 급히 병력을 투입했지만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났고, 7월 하순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지역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며 후퇴하던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피난민 행렬 속에 북한군 병력이 위장 잠입하여 미군 후방을 교란하거나 정보를 빼내는 것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북한군이 피난민을 이용한 전술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이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당시 미군 지휘부와 일선 병사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인식이었다.], 이는 피난민 전체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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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발발 이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미군은 급히 병력을 투입했지만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났고, 7월 하순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지역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며 후퇴하던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피난민 행렬 속에 북한군 병력이 위장 잠입하여 미군 후방을 교란하거나 정보를 빼내는 것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북한군이 피난민을 이용한 전술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이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당시 미군 지휘부와 일선 병사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인식이었다.], 이는 피난민 전체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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