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斤里 良民 虐殺 事件 / No Gun Ri massacre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1)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미군 제7기병연대에 의해 주곡리 등에서 피난중이던 피난민들에게 폭격, 기관총 사격이 이뤄졌으며, 약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1)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미군 제7기병연대에 의해 주곡리 등에서 피난중이던 피난민들에게 폭격, 기관총 사격이 이뤄졌으며, 약 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 배경 ✎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발발 이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미군은 급히 병력을 투입했지만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났고, 7월 하순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지역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며 후퇴하던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피난민 행렬 속에 북한군 병력이 위장 잠입하여 미군 후방을 교란하거나 정보를 빼내는 것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북한군이 피난민을 이용한 전술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2), 이는 피난민 전체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피난민 행렬 속에 북한군 병력이 위장 잠입하여 미군 후방을 교란하거나 정보를 빼내는 것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북한군이 피난민을 이용한 전술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2), 이는 피난민 전체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2. 전개 ✎ ⊖
7월 25일 미군들은 영동군 일대의 주민에게 후방 피난을 지시하여 5~600명의 피난민이 미군 유도하에 남쪽으로 피난을 시작했다.
7월 26일 피난민 행렬이 노근리에 이르자 미군 항공기의 기관총 사격과 폭격이 일어나 다수 피난민이 즉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피난민들은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했으나, 26일부터 29일까지 굴다리 내부에 미군에 의한 사격이 이뤄졌다. 7월 29일 미군이 철수하면서 사격이 멈춘 뒤 일부 생존자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수십년이 흐른 뒤 1900년대에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 규명이 요구되었고, AP 통신 보도, 미국 정부 조사 발표,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이뤄졌다.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1년 노근리 평화공원이 지어졌다.
7월 26일 피난민 행렬이 노근리에 이르자 미군 항공기의 기관총 사격과 폭격이 일어나 다수 피난민이 즉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피난민들은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했으나, 26일부터 29일까지 굴다리 내부에 미군에 의한 사격이 이뤄졌다. 7월 29일 미군이 철수하면서 사격이 멈춘 뒤 일부 생존자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수십년이 흐른 뒤 1900년대에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 규명이 요구되었고, AP 통신 보도, 미국 정부 조사 발표,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이뤄졌다.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1년 노근리 평화공원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