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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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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7월 25일 미군들은 영동군 일대의 주민에게 후방 피난을 지시하여 5~600명의 피난민이 미군 유도하에 남쪽으로 피난을 시작했다. 7월 26일 피난민 행렬이 노근리에 이르자 미군 항공기의 기관총 사격과 폭격이 일어나 다수 피난민이 즉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피난민들은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했으나, 26일부터 29일까지 굴다리 내부에 미군에 의한 사격이 이뤄졌다. 7월 29일 미군이 철수하면서 사격이 멈춘 뒤 일부 생존자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수십년이 흐른 뒤 1900년대에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 규명이 요구되었고, AP 통신 보도, 미국 정부 조사 발표,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이뤄졌다.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1년 노근리 평화공원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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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 7월 25일 미군들은 영동군 일대의 주민에게 후방 피난을 지시하여 5~600명의 피난민이 미군 유도하에 남쪽으로 피난을 시작했다. 7월 26일 피난민 행렬이 노근리에 이르자 미군 항공기의 기관총 사격과 폭격이 일어나 다수 피난민이 즉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이에 피난민들은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했으나, 26일부터 29일까지 굴다리 내부에 미군에 의한 사격이 이뤄졌다. 7월 29일 미군이 철수하면서 사격이 멈춘 뒤 일부 생존자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수십년이 흐른 뒤 1900년대에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 규명이 요구되었고, AP 통신 보도, 미국 정부 조사 발표, 클린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이뤄졌다. 2004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11년 노근리 평화공원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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