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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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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30,21781
=== 첫 아내, 타치아나 === 불가코프는 이 여성이 1908년에 키예프의 자기 고모 집에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고, 이후 문학적 취미를 같이하였다. 불가코프는 2학년 때 낙제하고 말았는데, 타치아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거의 같이 붙어있다시피 했으며, 샤를 구노의 《파우스트》 또한 1년에 10차례 이상 관람했다고 한다. 양쪽의 부모 모두 두 사람의 교제를 불안해하였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1913년 4월에 결혼한다. 이후 잠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그 시간은 1914년 8월,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고 만다. 전쟁이 터지자 불가코프는 적십자에 자원하여 야전 병원으로 의료 활동을 나갔고, 아내 타치아나 또한 간호사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적군과 백군의 접전지나 두메 산골로 주로 돌아다녀야 했던 불가코프 부부의 삶은 우울하기 그지 없었고, 1921년에 모스크바에 정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종전 후 모스크바는 산업 기반의 파괴와 몰려드는 유입 인구로 인해 극심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 이 때문에 불가코프는 생계를 위해 글쓰기와 문인과의 교류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아내와의 관계는 소홀해졌다. 불가코프가 생계를 위해 이리저리 애쓰는 동안 타치아나는 자주 집을 비웠었다고 한다. 이에 점점 심화되던 가정 불화는 불가코프가 1924년에 열린 어느 파티에서 류보프 예브겐예브나 벨로제르스카야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면서 거의 완전히 선을 넘게 된다. 결국 1924년 4월에는 공식적으로 타치아나와 이혼하였다. 이 때 불가코프는 자신이 총각으로 행세하는 것이 더 나으며 이혼은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며 타치아나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후 몇달 동안은 여전히 타치아나와 함께 사도바야 거리 10번지 50호에서 살았지만 이는 류보프와의 마땅한 거주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 사도바야 거리보다 훨씬 조용하고 안락한 곳을 찾자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하고 류보프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1925년 4월 30일에 공식적인 혼인 신고를 하지만 그 몇달 전부터 류보프를 '아내'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이 때 불가코프가 타치아나를 어느 정도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실상 타치아나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모자 만들기 기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훗날 불가코프는 사망 직전에 이르러 자신의 몰인정한 처사를 반성하고 타치아나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 용서는 당시 시베리아에 있었던 타치아나에게 닿지 못한다. 이러한 불유쾌한 측면들은 1989, 90년에 KGB 비밀 서고가 공개됨에 따라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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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아내, 타치아나 === 불가코프는 이 여성이 1908년에 키예프의 자기 고모 집에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고, 이후 문학적 취미를 같이하였다. 불가코프는 2학년 때 낙제하고 말았는데, 타치아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거의 같이 붙어있다시피 했으며, 샤를 구노의 《파우스트》 또한 1년에 10차례 이상 관람했다고 한다. 양쪽의 부모 모두 두 사람의 교제를 불안해하였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1913년 4월에 결혼한다. 이후 잠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그 시간은 1914년 8월,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고 만다. 전쟁이 터지자 불가코프는 적십자에 자원하여 야전 병원으로 의료 활동을 나갔고, 아내 타치아나 또한 간호사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적군과 백군의 접전지나 두메 산골로 주로 돌아다녀야 했던 불가코프 부부의 삶은 우울하기 그지 없었고, 1921년에 모스크바에 정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종전 후 모스크바는 산업 기반의 파괴와 몰려드는 유입 인구로 인해 극심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 이 때문에 불가코프는 생계를 위해 글쓰기와 문인과의 교류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아내와의 관계는 소홀해졌다. 불가코프가 생계를 위해 이리저리 애쓰는 동안 타치아나는 자주 집을 비웠었다고 한다. 이에 점점 심화되던 가정 불화는 불가코프가 1924년에 열린 어느 파티에서 류보프 예브겐예브나 벨로제르스카야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면서 거의 완전히 선을 넘게 된다. 결국 1924년 4월에는 공식적으로 타치아나와 이혼하였다. 이 때 불가코프는 자신이 총각으로 행세하는 것이 더 나으며 이혼은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며 타치아나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후 몇달 동안은 여전히 타치아나와 함께 사도바야 거리 10번지 50호에서 살았지만 이는 류보프와의 마땅한 거주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 사도바야 거리보다 훨씬 조용하고 안락한 곳을 찾자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하고 류보프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1925년 4월 30일에 공식적인 혼인 신고를 하지만 그 몇달 전부터 류보프를 '아내'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이 때 불가코프가 타치아나를 어느 정도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실상 타치아나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모자 만들기 기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훗날 불가코프는 사망 직전에 이르러 자신의 몰인정한 처사를 반성하고 타치아나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 용서는 당시 시베리아에 있었던 타치아나에게 닿지 못한다. 이러한 불유쾌한 측면들은 1989, 90년에 KGB 비밀 서고가 공개됨에 따라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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