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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최근 수정 시각 : 2023-08-12 23:43:48 | 조회수 : 254

Михаил Афанасьевич Булгаков / Mikhail Afanasyevich Bulgakov, 1891년 5월 15일 ~ 1940년 3월 10일

러시아의 소설가 및 극작가. 만년의 걸작인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유명하다.

목차

1. 생애
1.1. 가족
1.2. 유년
1.3.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
1.4. 모스크바 정착
1.5. 작가로서의 전성기
1.6. 몰락의 시작
1.7. 작가로서의 고립
1.8. 만년
2. 결혼 관계
2.1. 첫 아내, 타치아나
2.2. 두번째 아내, 류보프
2.3. 세번째 아내, 엘레나
3. 사후 평가
3.1. 복권 과정
4. 번역서
4.1. 소설
4.2. 희곡
5. 참고

1. 생애

1.1. 가족

키예프 태생. 양친 모두 성직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부계는 전통적으로 성직자 집안이었고 아버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불가코프(1859~1907) 또한 키예프신학교 종교사 전공교수였다. 신학자로서는 서유럽의 종교 전반(가톨릭에서부터 감리교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라틴어와 희랍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서(西)슬라브어(폴란드어, 체코어) 등에도 통달했다고 한다. 미하일 불가코프 또한 아버지를 학자로서 존경하였으며 훗날 '녹색 그림자가 드리워진 램프의 심상은 내게 아주 중요한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년 시절 책상에 앉아 글을 쓰던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유래하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 바바라 미하일로브나 불가코프(1869~1922)는 사교(司敎)의 딸이었다. 아파나시가 학자로서 불가코프의 종교관에 영향을 주었다면, 바바라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남긴다. 바바라의 처녀 때 성은 투르빈이었는데, 미하일 불가코프는 훗날 첫 장편 소설인 『백위군』과 이를 개작한 희곡 『투르빈네의 날들』의 주인공 가문에 이 성을 붙였다.

불가코프 부부는 모두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미하일 불가코프는 그 중 장남이었다. 그의 동생들은 다음과 같다. 베라(1892), 나데즈다(나댜, 1893), 바바라(바랴, 1895), 니콜라이(콜랴, 1898), 이반(바냐, 1900), 옐레나(룔랴, 1902).

1.2. 유년

3남 4녀 중 장남. 1901년에 키예프 제1김나지움에 입학했을 때부터 고골, 알렉산드르 푸슈킨, 톨스토이, 레스토이, 살티코프-쉬체드린 등의 문학 작품에 심취하였다. 1906년에는 가족들이 안드레예브스키 언덕 13번지의 넓은 아파트로 이주한다. 이 집에서의 거주 경험은 훗날 『백위군』의 투르빈 가족이 거주하는 '알렉세예프스키 언덕 13번지'의 묘사에 반영되었다. 1907년에는 아버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가 48세의 나이에 신장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미하일 불가코프가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훗날 불가코프는 49세 때 같은 병을 앓게 된다.

부친의 사망 후 수입의 감소로 인해 가세는 기울어갔지만, 가족들 내의 삶은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불가코프보다 7세 연하였던 사촌 콘스탄틴을 비롯한 여러 사촌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집안에 생기를 더했고, 부친의 학계·교계 동료들의 도움을 통해 일곱 남매 모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예의 독서·음악·공연 취미도 지속했다. 특히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모두 40차례 이상 관람했을 정도로 열심히 관람했다. 단지 샤를 구노의 오페라만이 아니라 여러 극에서 메피스토펠레스로 출연했던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이나 레프 시비랴코프에도 관심을 가졌다.

샬리아핀은 소위 '메소드 연기'의 달인으로, 《파우스트》외에도 『돈 키호테』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였는데, 그가 메피스토펠레스로 분장을 하면 상대역 배우조차 정말로 공포에 떨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연기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메피스토펠레스가 순결한 마르게리트를 타락시키려고 자연의 힘을 구하는 장면 다음에 그는 무대 뒤쪽에 나무처럼 서 있었어요. 그래요, 진짜 나무 같았죠. 그런데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진 거에요. 어떻게 그랬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어요. 마치 흑마술 같았다니까요. 그런데 막이 끝날 즈음에 어떤 키 큰 존재(샬리아핀은 약 190cm였다)가 내 위로 나타나는가 싶더니 무서운 거미가 창문을 둘러싼 채 파우스트와 나를 포위하는 것 같은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페라가 아니고 현실 공포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막이 내린 다음에야 메피스토펠레스는 샬리아핀으로 돌아왔어요. 그제야 한숨을 쉴 수 있었지요. 정말 샬리아핀의 연기는 마법 같은 놀라움이었습니다."(1)


또한 불가코프의 책상 앞에는 키예프의 유명한 베이스 시비랴코프가 메피스토펠레스로 분한 사진이 ‘꿈은 때로 현실이 된다’는 구절과 함께 걸려 있었다고 한다.
불가코프의 연극열은 단순 감상에 그치지 않고, 동생·친구들과 함께 집이나 키예프 시 외곽의 별장에서 아마추어 연극을 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때는 아예 오페라 가수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1909년 키예프 의과대학에 진학함에 따라 이 꿈은 완전히 접는다. 의사였던 두 외삼촌과 훗날 양부가 되는 이반 파블로비치 보스크레센스키의 권유에 따른 결정이었다.

의사로서의 경험은 훗날 불가코프가 작가로 전업한 이후 역시 의사였던 안톤 체호프와 비켄티 베렌사예프를 문학적 전범으로 삼게 되는 한 동기를 제공한다. 특히 후자와는 모스크바 시절에 친교를 맺기도 했다. 의대에 진학하면서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는 다위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불가코프의 누이 나댜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훗날의 양부 보스크레센스키의 무신론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며, 1910년부터는 가족들과 종교적 견해를 달리하여 가족과 격렬한 언쟁을 자주 벌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의대생으로서의 학업도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불가코프가 의학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음에도 이리 된데는 사라코프 출신의 타치아나 니콜라예브나 라파라는 여성과의 관계 탓이 컸다. 여기에 불가코프가 습작 활동을 틈틈히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활동하는데 거의 마음을 굳히고 말았다. 불가코프의 누이 나댜에 따르면 1912년에 불가코프가 자신의 단편 몇 편을 보여주더니 그 이전에 작가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쪽의 부모 모두 두 사람의 교제를 불안해하였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1913년 4월에 결혼한다. 3학년을 마친 뒤였다. 이후 잠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그 시간은 1914년 8월, 전쟁의 발발로 종말을 맞고 만다.

1.3.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

사라토프에 있는 장모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첫 의료 활동을 하던 중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맞이한다. 이듬해 적십자사에 자원하여 곧바로 최전선에 보내졌다. 아내 타치아나도 간호사로 취직하였다. 1916년 3월, 졸업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임시 졸업 증명서를 받아 카메네츠, 체르노비츠 등 전선의 야전병원에서 일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적십자의 임지 발령에 따라 스몰렌스크 현의 스이체프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 니콜리스코예에 파견된다. 이 때의 이야기는 단편 소설 「수탉이 수놓여진 수건」(1925)의 첫머리에 기술되었다. 1916년 10월에 정식으로 키예프 의대를 졸업. 졸업 성적은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고 한다.

1917년 9월에는 모스크바 근교의 소도시 뱌지마로 자리를 옮긴다. 불가코프의 파견지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궁벽한 소도시였다. 불가코프의 생활 또한 대체로 단조로우면서도 고통스러웠던 듯싶다. 실제로 불가코프는 1917년 12월 31일, 누이동생에게 “미칠 만큼 모스크바나 키예프로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흘러간다. 나는 특히 키예프로 가고 있다.”라고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 때의 경험은 단편집 『한 젊은 의사의 수기』(1925~1926)에 반영되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겨졌다. 내 주위에는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는 십일월의 어둠뿐이다. 집은 온통 눈에 파묻혔고 굴뚝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 삶의 스물네 해 동안 줄곧 거대한 도시에서 살았으므로 눈보라가 울부짖는 일은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눈보라는 진짜로 울부짖는다는 것이 밝혀졌다.(2)


의사로서는 매독의 전파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환자들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자신은 복무 중에 최소 두차례 이상의 중상을 입었다. 특히 디프테리아 치료 중에 얻은 병으로 인해 적십자 복무에서 해제되어 고향 키예프로 돌아온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불가코프를 꽤나 오랫동안 괴롭혀서, 이때문에 불가코프는 심각한 모르핀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의사로서 진통제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아내의 도움을 통해 1918년에는 모르핀 중독을 완전히 떨쳐낸다. 이러한 경험은 특히 『한 젊은 의사의 수기』에 수록되었던 「모르핀」에 잘 나타난다.

1918년 2월, 적십자 복무에서 해제되어 아내와 함께 고향 키예프로 돌아간다. 불가코프는 키예프로 돌아온 직후 개업의가 되지만, 이때의 키예프는 이미 그가 꿈꿔왔던 고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예프는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있던 독일 점령군과 그들의 괴뢰 정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볼셰비키 혁명군, 백위군 등이 뒤엉켜 싸우는 참혹한 전쟁터가 된지 오래였으며 그때그때의 전황에 따라 불가코프의 소속도 수없이 바뀌어야 했다.

1919년 2월, 키예프에서 퇴각하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군위군으로 징집되지만 탈영한다.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는 뱌지마에서 쓴 단편들을 토대로 「현 의사의 습작」, 「병」, 「개화」를 쓴다. 8월에는 퇴각하던 붉은 군대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키예프를 떠났다가 10월 중순, 붉은 군대와 함께 다시 키예프로 돌아온다. 시가전 도중 백위군 측 포로가 된다. 포로 전원이 총살될 위기에 처했지만 백군은 티푸스를 치료할 의사를 찾는다. 마침내 군의관으로 복무하겠다고 말한 불가코프를 제외한 모든 포로들이 총살되었다. 11월에는 백위군과 함께 키에프를 떠나 러시아 남부 캅카스로 향한다. 11월, 첫 출판물인 에세이 「미래의 전망」이 신문 《그로즈니》에 실린다. 그러나 11월 말 혹은 12월 초에 블라디캅카스에 도착하여 군병원에서 일한다. 12월 말, 병원 일을 그만두고 블라디캅카스 지역 신문의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1920년 1~2월, 블라디캅카스 지역 신문에 문예소품 「카페에서」와 「환희의 대가」가 실린다. 2월 말 혹은 3월 초에 발진 티푸스를 심하게 앓는다. 이 병으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하려던 꿈이 좌절되고 만다. 이는 작가가 질병을 운명의 화신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3) 이 무렵 백위군은 블라디캅카스 지역에서 퇴각하고, 불가코프는 소비에트 권력 하의 블라디캅카스에 남겨지게 된다. 이것으로 불가코프의 백위군 군의관 복무는 끝났지만 이 경력은 불가코프가 의사직을 혐오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애당초 불가코프는 딱히 의사 일을 싫어하지 않았었다. 불가코프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B. 포포프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의사직을 아주 훌륭하고 매혹적인 일로 여겼다고 한다.(4) 의대 재학 시절에도 의사와 관련된 습작을 쓴 적이 있고, 작가로 전업을 결심한 뒤에도 의사에 관련된 단편집인 『한 젊은 의사의 수기』를 썼다. 그러나 앞서 거론한 군의관 경험은 불가코프로 하여금 백군·적군 양측과 더불어 의사란 직업마저 극도로 혐오하게 만든다. 훗날 『백위군』과 《투르빈네의 날들》이 사상 문제를 일으키면서 불가코프의 상황이 난처해진 까닭도 있었다. 결국에는 소비에트 군사위원회가 군의관 소환령을 내렸을 때도 '이미 오래전에 의학에 대한 극단적 혐오로 인하여 의술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였다'는 내용의 정식 소견서를 보내고는 의사 자격증을 포기하였다.

1920년 4월 초부터 불가코프는 의사직을 그만두고 블라디캅카스 혁명위원회 인민교육부 예술지국에서 일하며 문예 활동을 시작한다. 문학의 밤, 강연회, 콘서트, 공연 기획 등에 참여하였고 스스로도 『자기방어』, 『투르빈 형제들』 등의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지만, 이 때부터 사상을 의심받아 불온 작가로 낙인찍히기 시작한다. 불가코프는 혁명 이후의 '인습 타파' 정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특히혁명 전에 활동했던 작가들을 계급 성분과 연결지어 비판하던 분위기를 몹시 싫어하였는데, 10월 26일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알렉산드르 푸슈킨을 옹호하였다가 청중과 지역 언론의 지탄을 받는다. 결국 11월에는 예술지국에서 해고되었다.

1921년 1월 말 내지 2월 초에는 희곡 『파리 코뮌니스트들』을 집필하여 앞서 발표한 두 희곡과 함께 모스크바 공산주의 드라마 작업실로 보내지만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다. 5월 말에는 블라디캅카스를 떠나 바쿠를 거쳐 티플리스에서 희곡을 무대에 올리려 하지만 성사되지 못한다. 7월 말에는 흑해 연안 도시 바툼으로 떠나 프랑스와 독일에 망명 신청을 하여 허가를 얻어내지만,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출국을 금지당한다. 이후 9월 초에 고향 키예프로 떠났다가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다.

1차 대전과 내전이 불가코프에게 입힌 상처는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전이 발발하자 불가코프의 가족들은 주로 백군 쪽에 가담했고, 소비에트 연방의 찬성 이후에는 가족들이 대부분 파리로 망명하는 바람에 남동생을 제외한 형제들과도 헤어지고 말았다. 불가코프 자신도 망명하고자 했지만 병이나 당국의 금지 처분에 의해 성사되지 못했다. 더욱이 전황에 따라 소속과 거주지를 갈아치워가며 몸소 체험하고 목격했던 전쟁의 참상들은 불가코프가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회의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30년에 불가코프가 소비에트 정부에 보낸 편지도 이를 뒷받침한다. 불가코프는 혁명과 함께 파괴된 옛 가치들, 그중에서도 ‘정신적인 것의 중심’으로서 ‘집’의 파괴를 아쉬워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작가로서의 불가코프에 결정적인 의식 변화를 가져온다.

1.4. 모스크바 정착

내전이 끝난 이때부터 불가코프는 아내와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다만 불가코프가 모스크바로 향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불가코프는 내전 때 헤어진 가족들을 그리워하였고, 망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모스크바행도 한달 앞서 아내를 미리 보내놓고는 계속해서 망명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선택한 길이었다. 정착 무렵의 상황을 불가코프는 3년 뒤의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1년말에 여기에 영원히 살아 남으려고 돈도 없이, 물건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5)


이들의 모스크바 정착은 순탄치 못했다. 특히 1921년 겨울에는 극심한 혹한이 몰아쳐 거의 죽을 고비에 놓이기까지 했다. 이 위기는 불가코프의 처남인 안드레이 젬스키가 방 한 칸을 빌려주어 간신히 넘긴다. 이곳이 바로 파트리아르흐 연못가 근처의 사도바야 거리 10번지였다. 그러나 불가코프는 이 공동 아파트에서의 생활을 진심으로 혐오하였다. 이 아파트에서 불가코프는 다시 한번 문화 교양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불가코프는 훗날 자신의 작품에 알코올 중독자, 아내 구타자 등 아파트의 주민들에서 연상한 풍자적인 캐릭터들을 많이 남겼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안누시카, 주민조합장 니카노르 이바노비치 보소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생활 수준 또한 빈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키예프의 지인들도 거의 연락이 끊긴데다가 내전의 여파 때문에 수도 모스크바조차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거의 빈손으로 모스크바에 오다시피 한 불가코프 부부로서는 내전 전 키예프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부르주아적 삶을 꿈꿀수조차 없었다. 이에 불가코프는 글을 써서 돈을 벌어보려고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또한 쉽지 않았다. 첫 직장이었던 문화부 문학지국에서는 부서가 통폐합되는 바람에 얼마 못가 해고당했고, 이어 들어간 신문사에서는 신문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역시 쫓겨났다. 특히 1922년 초에는 그해 1월에 어머니가 티푸스로 사망했었다는 소식마저 듣는다. 이는 훗날 첫 장편인 『백위군』의 첫 장면이 투르빈네 가족의 어머니 장례식으로 시작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1.5. 작가로서의 전성기

젊은 시절 불가코프의 성격은 썩 좋지 못했던 것 같다. 불가코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인 편이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겨진 일기들은 불가코프가 특히 건강을 심각하게 염려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그가 의사 출신으로서 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같은 병에 걸릴지도 못한다는 두려움, 류머티즘의 위험성 등의 영향도 컸다. 심지어 병이 급작스럽게 생길 것을 우려하여 혼자 있는 것을 매우 꺼려하였고, 길가에서 혼자 걷는 것엔 거의 공포까지 가졌다. 오늘날 알려진 교양 있는 신사로서의 이미지는 사실 말년에 가서야 형성된 것이다. 30세 이전의 불가코프는 뻔뻔할 정도로 자의식에 가득차고 드센, 그리고 무엇보다 대작가가 되고자 하는 야심에 불타는 젊은이였던 것 같다. 아울러, 이 때의 그는 상당한 애주가였다.

야심찬 작가이자 가장이었던 그는 자신의 야망 때문이나 생계 때문이나 글쓰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는 불가코프가 자신의 문학 세계를 상당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는다. 생계를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계속 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와중에 그 고유의 문학관이 정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두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저널리스트에서 본격적인 소설가/극작가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922년부터 24년까지는 베를린에서 발행되던 《전야》지에 22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 신문은 독일로 넘어간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만든 언론으로, 처음에는 볼셰비키 정부 또한 이 신문의 발행을 환영하였다. 이 당시에도 불가코프는 애초에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가졌던 혐오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 신문에 기고한 글들 또한 볼셰비키 정권과 레닌의 신 경제 정책을 풍자하고자 한 글들이었다.

훗날 기밀 해제된 KGB 비밀 문서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러시아의 정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923년 초에는 장차 유럽이 공산주의자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으로 양분될 것이라는 예견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 때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러시아 정교회는 이후 티콘 총대주교를 세우지만 계속되는 반종교 정책으로 인해, 사실상 볼셰비키 정권에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었다.

불가코프가 기고했던 또다른 신문은 철도 노조의 기관지였다. 이 신문에서 불가코프는 특유의 유머 글들을 기고하였고, 이 글들을 통해 1920년대 모스크바 문학계의 중요 인사로 떠올랐다. 훗날 불가코프 자신은 이 신문에 기고했던 유머러스한 글들이 시간 낭비였다며 평가절하했지만,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불가코프는 최소한 1920년대 중반까지 작가로서 인정받는다. 불가코프는 당대의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2년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 출신의 작가였던 비켄티 베레사예프가 불가코프의 『한 시골 의사의 수기』에 수록된 단편들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이 강연을 들은 불가코프는 그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후 베레사에프는 1920년대 초에 불가코프를 이리저리 후원하게 된다. 이외에도 불가코프는 숱한 문학 클럽 모임에 참여하였으며, 당대의 신작들을 찾아 읽었다.

또한 19세기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을 특히 탐독하며 그를 문학적 전범으로 삼았다. 특히 예브게니 쟈마찐으로부터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구성 장치와 세태에 뿌리를 둔 판타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던 중편 「디아볼리아다」, 그리고 「치치코프의 모험」이 고골의 『죽은 혼』에서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었다. 여기에 『비운의 달걀』(1925)에는 허버트 조지 웰즈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SF적 기법을 빌려 소비에트의 과학 정책을 풍자하고자 했던 이 작품은 소비에트의 검열을 받아, 1987년에야 정식 출간이 허용된다.

그러나 1923년에는 『투르빈 형제들』과 『물라의 아들들』이 여전히 상영되고 있었음에도 돌연 이 두 작품을 포함한 다섯 작품의 원고를 태워버린 바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회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던듯 싶다. 이후 『물라의 아이들』은 1960년대에 사본이 발견됨으로서 복원되지만, 『투르빈 형제들』은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투르빈 형제들』은 1905년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불가코프가 자신의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처음 시도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훗날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원고도 태워버리는데, 이 두 가지 일화는 다시 쓰여진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거장이 원고를 태우고, 볼란드가 그 원고를 복원해주는 장면으로 삽입된다.

1924년에는 타치아나와의 생활을 청산하고 두 번째 아내 류보프 벨로제르스카야와 결혼한다.

1925년 초에는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1924년에 발표했던 첫 장편 소설 『백위군』은 당시 문학계의 주요 인사였던 시인 막시밀리안 볼로신으로부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라는 격찬까지 받았고, 중편집 『디아볼리아다』도 막 출간될 예정이었다. 류보프와의 결혼까지 원만하게 해결되는 상황에서 불가코프는 1925년 4월 3일,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부터 비밀리에 섭외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 예술극장 감독이었던 보리스 베르실로프는 불가코프에게 『백위군』의 각색을 요청한다. 이 당시 보리스 베르실로프는 물론이고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어느 누구도 소설 『백위군』 전체를 읽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백위군』은 1924년 12월에야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 자체는 불가코프의 구미에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해 1월부터 연극 버전 『백위군』의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불가코프는 그 자신이 1923년에 불태워버렸던 『투르빈 형제들』의 내용을 더하여 연극 『백위군』의 각색을 시도한다. 이 당시 불가코프가 얼마나 환희에 차 있었는지는 훗날의 미완성작 《Театральный роман》(Theatrical Novel, 1936~1939)에 잘 드러나 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뒤 쓴 회고담격인 이 소설에서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 처음 들렀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약 30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객석(auditorium)에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 두 개의 램프가 희미차게 탔고, 막은 열려 있었으며 무대는 내 입을 딱 벌어지게 했다. 무대는 장엄했으며 신비로웠고 적막했다. 어둠이 가장자리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중앙에서는 황금말의 형상이 다리를 감춘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여기가 내 세계군..." 나는 내가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며 속삭였다.


여기서 말하는 '황금말의 형상'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엠블렘인 '체호프의 갈매기'를 패러디한 것으로서, 극장 막에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불가코프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관계는 첫 만남 때의 호의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일단 『백위군』의 각색 작업부터가 쉽지 않았다. 불가코프가 이 분야의 초짜가 아니었음에도 각색 작업은 난항을 겪었는데, 모스크바 예술 극장 측의 요구와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불가코프는 1925년 9월에 『백위군』의 첫 각색을 마친다. 그러나 극장 측은 5부작으로 구성된 희곡을 극장에서 하루만에 공연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보낸다. 불가코프가 10월에 바실리 류츠스키(Luzhsky)에게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극장 측의 혹평에 꽤나 분개했던 듯 싶다. 처음에는 자신의 원고를 관철하고자 했지만 극장 측이 불가코프의 틀어진 감정을 잘 달랜 결과 결국 4부작으로의 재각색에 들어간다.

각색된 희곡으로 6개월간의 리허설을 하지만 드레스 리허설에 들어갔을 때 상연 가능 공연 목록을 관장하는 레퍼토리 총국이 이 연극에 제동을 건다. 불가코프와 레퍼토리 총국 간의 평생에 걸친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레퍼토리 총국은 희곡 『백위군』에 백위군을 옹호하는 혐의가 있다며 상연 불가 처분을 내린다. 불가코프는 격한 항의문을 보내지만 결국 상당 수준의 각색을 강요당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가 유태인을 고문하는 장면이 삭제당하고 엔딩 또한 친 볼셰비키적으로 각색당한다. 또한 공연이 마무리 될 때는 인터내셔널가가 연주되며 막이 내려야 했다. 또한 백위군을 연상시키는 '백'이라는 글자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제목 또한 『투르빈네의 날들』로 개명당한다. 막상 상연된 『투르빈네의 날들』은 큰 성공을 거둔다. 스탈린 또한 《투르빈네의 날들》을 대단히 호평하였다.

1.6. 몰락의 시작

192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호평받는 작가였던 불가코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1924년부터 소련 사회를 장악한 스탈린의 지배 체제가 보다 강고해짐에 따라 소련의 사회적 분위기가 점차 경직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불가코프의 작품에 대한 비판이 점차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백위군』의 첫 각색작을 탈고하기 두달 전에 중단편집 『디아볼리아다』를 발표할 때부터 점차 불가코프를 경계하는 시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디아볼리아다』도 출간 직후에 압수되었다가 1926년 4월에 재간이 허용된다.

1926년 5월에는 스탈린 정권을 풍자한 소설 『개의 심장』과 관련하여 가택 수색을 당해 『개의 심장』 원고와 일기 등을 압수당한다. 이 일기는 불가코프는 아내인 류보프에게도 비밀로 하고서 써왔던 일기로, 이 일기가 압수된 사건은 불가코프에게 개인적으로도 큰 타격을 준다. 국가보안국의 심문에서 불가코프는 『개의 심장』에 반소비에트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와 함께 자신은 "언제나 양심에 따라 보이는 대로 쓰며, 소비에트의 부정적 현상들 속에서 본능적으로 거대한 먹이를 본다. 나는 풍자가다."라고 밝힌다.[6]

10월에 상연된 『투르빈네의 날들』과 이후의 두번째 희곡 『조이카의 아파트』가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이때부터 불가코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토록 격한 검열을 받았음에도 『투르빈네의 날들』은 혁명 후 문학 중에서 백위군을 단순 악역 이상의 무언가로 묘사하고자 했던 첫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이 점이 좌익 비평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물론 레퍼토리 총국 소속의 비평가들이 불가코프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였다. 비평가들은 불가코프가 소비에트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하고, 내전을 다룬 작품들 속에서 반동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불가코프를 반소비에트·반혁명적 작가로 낙인찍었고, 불가코프의 작품들을 ‘혁명에 찬 악의에 찬 비방문’, ‘엉터리 성상화가’가 그린 ‘백위군 순교자들의 성화’라고 부르며 '불가코프주의를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훗날 불가코프 자신이 헤아린 바에 따르면 『백위군』 발표 이후 십 년 간 각종 신문과 잡지에 실린 불가코프 관련 글 중 그에 대한 비판이 298편에 달했던 데 반해 그에 대해 긍정적인 글은 단 세 편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반 관객 사이에서는 불가코프의 희곡이 상당한 호평을 받았는데, 평단과 일반 대중의 이런 괴리는 이후 불가코프가 생전에 발표한 거의 모든 작품들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졌다.
불가코프도 1927년 2월 7일 메이에르홀트 극장에서 열린 토론회 등을 통해 루나차르스키나 오를린스키와 같은 비평가들의 견해에 적극 대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혹독해진 비판들은 불가코프를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에 빠뜨렸다. 1928년 2월에는 동생들을 만나고자 해외 여행 허가를 요청하지만 모스크바 시 당국에 의해 거절당한다. 압수당한 『개의 심장』을 대신하여 새로 집필한 『질주』를 새 공연 목록에 올리기로 결정하지만 이마저 1928년 5월에 상연 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 다음달에는 『투르빈네의 날들』과 『조이카의 아파트』 또한 상연이 금지되었다. 1928년 9월 26일에는 뜻밖에도 희곡 『적자색 섬』의 공연을 허가받지만 불가사의와도 같았던 이 결정은 외려 불가코프에 대한 거센 비판의 빌미가 된다.

10월에는 막심 고리키의 참석 하에 희곡 『질주』에 대한 논의가 열린다. 여기서 고리키가 레퍼토리 총국의 활동을 비판하고 『질주』의 예술성을 옹호한 결과 질주의 상연 허가가 내려졌다. 그러나 고리키가 모스크바를 떠나자 레퍼토리 총국은 다시 『질주』의 상연을 금지한다. 12월에는 시인 베지멘스키(이반 베즈돔니의 원형),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알렉산드르 류힌의 원형), 보고류보프 등이 불가코프를 규탄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극작가 빌-벨로체르코프스키, 피켈 등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스탈린에게 반소비에트적 죄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낸다. 어찌 보면 불가코프에 대한 러시아 문학계의 비판은, 오히려 스탈린의 그것보다 더 가혹한 측면이 컸다. 1929년 2월, 스탈린은 불가코프를 고발했던 극작가 빌-벨로체르콥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불가코프의 작품을 두둔한다. 이 편지에 따르면 스탈린은 『적자색 섬』을 해로운 작품이라고 하면서도 "『질주』가 반소비에트적 현상임은 분명하지만 희곡 마지막에 몇 장면만 덧붙인다면 상연을 반대할 이유는 없으며 『투르빈네의 날들』의 경우도 궁극적으로는 이득이 더 많은 작품"이라는 의견을 밝힌다. 『투르빈네의 날들』이 볼셰비즘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뜻에서였다. 이 편지에 힘입어 불가코프의 작품은 일시적으로 해금된다. 이에 불가코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옹호해준다고 착각하여 훗날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헛된 시도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의 옹호는 결과적으로 비평가들의 더 격한 반응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며칠만에 우크라이나 작가 대표단의 항의 방문을 받은 스탈린은 비평가들에게 한수 접어주고 만다. 스탈린이 옹호 편지를 쓴지 불과 보름도 되지 않아 레퍼토리 총국은 불가코프의 모든 작품에 상영 금지 처분을 내린다. 『질주』를 둘러싼 이 일련의 사태는 당시 당내 실권을 잡아가던 스탈린과 그 반대파 간의 정치적 갈등과 무관하지 않았다. 스탈린이 대표단에게 양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련의 사태는 예브게니 쟈마찐을 비롯한 벗들이 불가코프의 신경증 증세를 걱정할 정도로 불가코프를 괴롭혔다. 불가코프 자신은 1929년을 '파국의 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브게니 쟈마찐 등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작가들과의 관계만이 위안거리가 되어주었다.

다만 이 해 2월 28일, 불가코프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로브스카야, 즉 자신의 세 번째 아내가 될 사람과 만나게 된다. 트베르스카야 거리(『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거장이 마르가리타를 처음 만난 장소)에 있는 화가 모이세젠코의 집에서 열린 파티를 통해서였다. 다만 이때는 불가코프가 불안정한 형태나마 류보프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였고, 엘레나 역시 군 고위 장교인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실로브스키와 결혼 중이었다. 불가코프는 류보프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엘레나를 통해 얻기 시작했고, 그해 봄과 여름을 통해 엘레나와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같은 해에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초고를 완성한다.

1.7. 작가로서의 고립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평계의 원색적인 혹평에 절망한 불가코프는 1929년 7월, 당 서기장 스탈린, 정치국 중앙위원회 의장 칼리닌, 예술국 의장 스비데르스키, 작가 막심 고리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소비에트 밖으로 추방시켜달라고 요청한다.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작품 활동을 보장해주거나 아내(여기서는 류보프)와의 망명을 허락해주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총살시켜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불가코프는 이렇게 강렬한 편지를 보냄으로써 스탈린과의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했다. 또한 막심 고리키가 자신의 정부 내 지위를 이용하여 '불온 작가'들을 도와준 적이 많았으므로 그의 지지도 얻어내고자 했다. 베레사예프를 통해 고리키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음을 듣기도 했으므로 딱히 근거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당국에 묵살당하고 만다.
1929년 말에는 당대 러시아라는 기존 소재에서 벗어나 당대와도 러시아와도 관계없는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불가코프가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불가코프는 몰리에르와 그의 아내, 그리고 루이 14세와의 관계를 통해 관객들이 당대 모스크바 사회의 모습을 읽어내길 바랐다. 이 작업을 위해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한다. 불가코프는 이 작품이나마 상연되길 바랐지만 1930년 3월 18일, 레퍼토리 총국으로부터 『위선자들의 밀교』 상연 금지 통보를 받는다. 이에 절망한 불가코프는 자신의 원고들을 태워버린다. 여기에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수정본 원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0년 3월 28일에는 스탈린에게 과거 보냈던 것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다시 보내었는데, 4월 18일 밤에 스탈린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마야코프스키가 자살한지 사흘 뒤였다. 엘레나를 통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불가코프에게 이 통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그는 - 늘 그렇듯 -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자기 위해 누웠다. 그러나 전화가 급하게 울렸고, 류바가 그를 불러 중앙 위원회의 누군가가 그와 통화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M.A.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에게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는 사람들이 그런 장난을 쳤었다) 그리고 대충 심드렁하게 수화기를 받은 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미하일 아파나셰비치 불가코프?"
"예, 예!"
"지금 스탈린 동무께서 당신과 통화하실 것이오."
"뭐요? 스탈린? 스탈린?"
그리고 그 직후에 두드러지는 그루지야 억양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통화에서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세가지 질문을 한다. 첫번째는 '정말로 외국으로 나가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이 때 불가코프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가는 결코 좋은 결과가 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던 듯하다. 불가코프는 ‘러시아 작가로서, 러시아와 러시아어를 떠나 살 수는 없다’는 요지의 답변을 한다. 이 때 불가코프가 자신의 본의대로 답변을 했을 때 스탈린이 정말로 그 요구를 들어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반소비에트 혐의로 체포될 수도 있었다. 두번째로 스탈린은 '어디에서 일하기를 원하는가, 혹시 모스크바 예술 극장인가'하며 묻는다. 이에 불가코프는 과거에 그곳에서 일하기를 요청했었지만 거부당했다는 답변을 한다. 이에 스탈린은 긍정적인 결과가 있으리라는 암시를 준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조만간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조연출 자리와 청년노동자극장에서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 일화는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강력한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불가코프가 어째서 스탈린에 대해서는 비교적 나이브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설명해준다.

불가코프의 경우만이 아니라 이 당시 스탈린이 소비에트 작가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반동 작가들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면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아크마토바, 파스테르나크, 불가코프 등의 고집 센 작가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감을 나타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대 반동 작가들의 삶은 스탈린의 변덕에 의해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쨌거나 스탈린과의 통화 이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 복귀했고, 삶에 대한 의욕도 얻었다. 엘레나의 증언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스탈린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자살까지 고려했었다고 한다.

1930년 5월에 복귀한 후 불가코프는 고골의 『죽은 혼』을 상연한다. 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잡음이 일어났다. 당초 극장에서 미리 준비한 대본이 있었지만 불가코프가 자신만의 대본을 한 부 더 만들었어 극장 측의 스타니슬라브스키,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네미로비치-단첸코 등과 대립한다. 결국에는 조정 끝에 좀 더 안전한 대본이 사용되었지만, 이러한 분란은 이후로도 불가코프가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 있는 한 계속해서 발생했다. 1930년 6월에는 크림 해로 휴가를 떠났고, 여기에서 엘레나에게 전보를 보내는 등 본격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어찌되었건 1930년은 불가코프에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럭저럭 잘 풀려나간 해였다.

1931년부터 불가코프의 불행이 다시 시작된다. 이는 주로 남편에게 불륜 관계를 들킨 엘레나가 관계 단절을 선언한 탓이 컸다. 게다가 류보프와의 관계 또한 잘 풀리기는 커녕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친구 예브게니 쟈마찐 또한 정부에 제출했던 망명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파리로 출국하게 되었었다. 당시 불가코프 또한 외국으로 망명한 형제들을 만나려 하는 등 해외 방문 시도를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다. 가령 1931년 5월, 스탈린에게 류보프와의 해외 여행 허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늑대를 대하듯 했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사냥물을 몰듯 나를 몰아쳤다. 원한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무척 지쳤다. 짐승도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짐승은 이미 더 이상 늑대도, 작가가 아님을 선언했다. 그 짐승은 이제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침묵하고 있다. 침묵하는 작가는 없다. 만약 그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다. 만일 진정한 작가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1931년 여름, 불가코프는 레닌그라드에 소재한 크라스니 극장으로부터 ‘미래의 전쟁’을 주제로 주문받았던 SF 희곡 《아담과 이브》를 완성짓는다. 레닌그라드의 다른 극장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희곡으로 각색해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특히 후자의 작업은 친구인 문학자 파벨 포포프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포포프의 아내가 바로 톨스토이의 손녀인 안나 일리치나였기 때문에 포포프를 통해 각색에 필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상연이 금지되었던 희곡 《위선자들의 밀교》도 상연 허가 결정이 내려졌다. 위인들의 생애 편집국으로부터 몰리에르 전기 집필 의뢰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불가코프에게 기회를 주고자 애썼던 막심 고리키의 노력이 있었다. 당 서기장 스탈린 또한 불가코프에게 희소식을 가져다 주었다. 193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찾은 스탈린은 “왜 《투르빈네의 날들》은 무대에 올리지 않는가?”라는 한마디로 그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도록 만들었다. 이후로도 『투르빈네의 날들』은 꾸준히 상영되어 불가코프에게 고정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스탈린이 보였던 이러한 호의는 불가코프에게 자신의 작품들이 소비에트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불가코프 단지 극장의 문학자문위원으로,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각색하는 각색자, 번역가로 묶어두려 할 뿐이었다. 《투르빈네의 날들》은 이미 불가코프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정된 뒤였고, 1936년에 ‘몰리에르’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상연된 《위선자들의 밀교》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저급하게 날조한 희곡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8회만에 무대에서 내려졌다. 수많은 자료를 참고해가며 썼던 몰리에르 전기도, 그가 썼던 다른 희곡들도 결국에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가코프가 가져온 원고를 읽은 극장들은 이내 공연 계약을 취소하거나 연습 도중 공연 계획을 취소시켰다. 『아담과 이브』는 몰리에르 전기도 마르크시즘적 역사관에 배치된다는 지적과 함께 원고를 돌려받고 출판을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상태는 불가코프에게 작가로서의 파멸을 의미했다.

1.8. 만년

이처럼 불운한 날들을 겪어야 했던 불가코프에게는 아내 엘레나 세르게예브나와의 재결합, 만년의 걸작인 『거장과 마르가리타』집필 등이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각각의 인연을 정리하고 1932년 10월부터 정식 부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엘레나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았던 아이 중 큰아들은 전 남편에게 보내졌다. 불가코프가 류보프와 이혼절차를 밟고난 다음날인 1932년 10월 4일 결혼했다. 이에 불가코프와 엘레나, 엘레나의 둘째 아들이 한 살림을 차리게 된다.
불가코프는 감시의 눈을 피해가며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집필을 계속한다. 공개리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계속되는 검열과 불채용 통지로 퇴짜를 받는 상황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사실상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소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필 후반기로 갈수록 자전적인 측면이 강해진다. 1934년 버전에서는 소설에 거장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1936년 버전부터는 거장이 자전적인 인물로 변함에 따라 이 작품은 불가코프의 삶과 보다 밀접해졌다. 집필 중이던 1938년, 자신의 오랜 지인이기도 한 편집인에게서 “이 소설은 출판될 수 없다”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불가코프는 꾸준히 이 소설을 개작해나갔다. 1939년에 급격히 시력이 떨어진 뒤에는 아내 엘레나 세르게예브나의 도움을 받으면서 구술로 계속해서 원고를 교정했고, 1940년 2월 13일, 병상에서 마지막 교정을 했다. 이틀 뒤인 2월 15일, 소비에트 작가협회 의장인 파데예프가 찾아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불가코프를 이탈리아로 보내주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하지만, 이때는 이미 불가코프의 상태가 워낙에 악화된지라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같은 해 3월 10일에 사망했다. 유해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결말 부분에 나오는 참새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2. 결혼 관계

2.1. 첫 아내, 타치아나

불가코프는 이 여성이 1908년에 키예프의 자기 고모 집에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고, 이후 문학적 취미를 같이하였다. 불가코프는 2학년 때 낙제하고 말았는데, 타치아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두 사람은 거의 같이 붙어있다시피 했으며, 샤를 구노의 《파우스트》 또한 1년에 10차례 이상 관람했다고 한다. 양쪽의 부모 모두 두 사람의 교제를 불안해하였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1913년 4월에 결혼한다. 이후 잠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그 시간은 1914년 8월,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고 만다.
전쟁이 터지자 불가코프는 적십자에 자원하여 야전 병원으로 의료 활동을 나갔고, 아내 타치아나 또한 간호사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적군과 백군의 접전지나 두메 산골로 주로 돌아다녀야 했던 불가코프 부부의 삶은 우울하기 그지 없었고, 1921년에 모스크바에 정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종전 후 모스크바는 산업 기반의 파괴와 몰려드는 유입 인구로 인해 극심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 이 때문에 불가코프는 생계를 위해 글쓰기와 문인과의 교류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아내와의 관계는 소홀해졌다. 불가코프가 생계를 위해 이리저리 애쓰는 동안 타치아나는 자주 집을 비웠었다고 한다. 이에 점점 심화되던 가정 불화는 불가코프가 1924년에 열린 어느 파티에서 류보프 예브겐예브나 벨로제르스카야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면서 거의 완전히 선을 넘게 된다.

결국 1924년 4월에는 공식적으로 타치아나와 이혼하였다. 이 때 불가코프는 자신이 총각으로 행세하는 것이 더 나으며 이혼은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라며 타치아나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후 몇달 동안은 여전히 타치아나와 함께 사도바야 거리 10번지 50호에서 살았지만 이는 류보프와의 마땅한 거주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 사도바야 거리보다 훨씬 조용하고 안락한 곳을 찾자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하고 류보프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1925년 4월 30일에 공식적인 혼인 신고를 하지만 그 몇달 전부터 류보프를 '아내'라고 불렀었다고 한다. 이 때 불가코프가 타치아나를 어느 정도 도와줬다고는 하지만 실상 타치아나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모자 만들기 기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훗날 불가코프는 사망 직전에 이르러 자신의 몰인정한 처사를 반성하고 타치아나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그 용서는 당시 시베리아에 있었던 타치아나에게 닿지 못한다. 이러한 불유쾌한 측면들은 1989, 90년에 KGB 비밀 서고가 공개됨에 따라 알려지게 되었다.

2.2. 두번째 아내, 류보프

1925년 여름에는 볼로신의 초청을 받아 아내 류보프와 함께 크림 반도에 휴가를 다녀오기도 했다.

2.3. 세번째 아내, 엘레나

1929년 2월 28일, 불가코프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로브스카야, 즉 자신의 세 번째 아내가 될 사람과 만나게 된다. 트베르스카야 거리(『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거장이 마르가리타를 처음 만난 장소)에 있는 화가 모이세젠코의 집에서 열린 파티를 통해서였다. 다만 이때는 불가코프가 두 번째 아내와 결혼했을 때였고, 엘레나 역시 군 고위 장교인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실로브스키라는 남편이 있었다.

두 사람은 1930년 여름 불가코프가 크림해로 휴가를 떠났을 때부터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한다. 이 때 불가코프는 엘레나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하지만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엘레나가 류보프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던 듯 하다. 류보프의 친구들이 훗날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 당시 류보프는 남편의 불륜 관계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남편을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되면서 충격감을 덜어낸 듯.

1931년에는 엘레나가 관계 중단을 선언했다. 군 장성이었던 엘레나의 남편에게 두 사람의 관계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엘레나의 남편은 이혼하자고 했지만, 엘레나로서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의 육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 부부는 엘레나가 불가코프를 만나지도, 전화 통화하지도, 편지를 주고 받지도 않는다는데 합의한다. 이에 1931년 2월 25일부터 이듬해 6월까지 불가코프와 엘레나의 관계가 중단된다. 그러나 이 당시 불가코프는 이미 류보프에게서 정을 완전히 뗀 상황이었다.이 시기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지금의 삶은 애완견인 부톤과만 사는 고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쓸 정도였다.

두 사람은 각각의 인연을 정리하고 1932년 10월부터 정식 부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3. 사후 평가

3.1. 복권 과정

불가코프의 사후 불가코프의 이름은 러시아의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소수의 독자만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던 《투르빈네의 날들》이나 잡지에 기고되었던 장편 소설 『백위군』을 기억할 뿐이었다. 불가코프의 아내 옐레나 세르게예브나는 1945년, 스탈린에게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출간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소비에트 문학계에 해빙의 바람이 불면서 불가코프의 이름이 거론되긴 했다. 1954년 12월에 열린 전소작가동맹 제2회 대회에서 벤야민 카베린이 불가코프의 복권을 요구하였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엘레나 세르게예브나가 즉시 카베린에게 불가코프의 원고들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코프의 복권 작업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게 이루어졌다. 우선 1956년부터 불가코프의 중단편을 모은 작품집이 조금씩 발간되기 시작했고, 불가코프의 작품을 기리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자 작가였던 콘스탄틴 시모노프가 위원장을 맡았으며, 시모노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은 후 이 작품이 작가 평생의 역작이라는데 동의하였고, 옐레나와 함께 불가코프의 명예 회복을 위하여 노력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시모노프와 옐레나의 노력으로 불가코프의 중단편과 희곡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두 사람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예르샬라임 부분만을 역사 소설로 편집하여 연재하고 동시에 작품 전체를 다른 잡지에 연재한다는 작전을 기획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불가코프의 복권은 1966년부터 67년에 걸쳐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잡지에 연재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정권을 비판하는 민감한 부분 - 특히 소비에트 비밀 경찰 관련 부분, 예르샬라임과 모스크바가 유사하게 묘사되는 부분 - 은 검열된 채였지만, 그 상태로도 출간 즉시 소비에트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연재된 잡지는 희귀본 취급을 받았고, 사람들은 지하 출판을 통해 검열로 삭제된 부분을 찾아 읽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불가코프는 '거장'과 동일시되었으며,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비겁함은 인간의 가장 큰 악덕 중 하나이다.” 등 소설 속 경구들이 널리 회자되었다.

러시아에서 검열본의 연재가 완료된 1967년에 파리에서 무삭제본이 출간되었다. 이후에는 영국, 헝가리,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불가코프가 소개되며 이 소설이 번역 출간되었다. 러시아에서도 1973년에 비검열판이 출간되기에 이른다. 당시 몇몇 비평가들은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쏟아졌던 열기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그러한 평가가 무색하게도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러시아 문학 작품 중 하나이다.

미하일 불가코프가 유년 시절을 보낸 키예프 집과, 모스크바에서 거주했던 사도바야 거리의 아파트에는 각각 불가코프와 그의 작품들을 위한 박물관이 설치되었다. 이외에, 그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주배경으로 삼았던 아르바트 거리를 중심으로 불가코프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4. 번역서

※같은 저자가 같은 작품을 다시 낸 경우에는 가장 최근의 판본만을 기재한다.

4.1. 소설

번역번역자제목출판사가격장정비고
2011이병훈『젊은 의사의 수기』을유문화사12,000원양장본을유세계문학전집
2010정보라『거장과 마르가리타』민음사14,000원반양장본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정연호『불가코프 중편선』(6)신아사14,000원반양장본
2009홍대화『거장과 마르가리따』열린책들19,600원양장본열린책들 세계문학
2008김혜란『거장과 마르가리타』문학과지성사16,000원반양장본대산세계문학총서
2006박형규『거장과 마르가리타』(7)문예출판사19,000원반양장본
1996유승만『백위군』(소설)열린책들7,000원양장본

4.2. 희곡

번역번역자제목출판사가격장정비고
2011심지은『적자색 섬』지만지12,000원양장본지만지고전선집
2010강수경『백위군』(희곡)지만지12,000원양장본지만지고전선집
2005김혜란『조야의 아파트/질주』책세상6,900원문고판책세상문고
2001김혜란『위선자들의 밀교』연극과인간』6,000원반양장본

5. 참고

  • Curtis, J.A.E, Manuscripts Don't Burn: Mikhail Bulgakov, a Life in Letters and Diaries (Woodstock, NY: Overlook Press, 1992)
  • 위키백과Mikhail Bulgakov

(1) 유형종, 「공포의 카리스마, 흑마술 같은 저음 - 표도르 샬리아핀」, 『불멸의 목소리』(서울: 시공사, 2006).
(2) 불가코프, 「철로 된 목」, 『무도회가 끝난 뒤』(파주:창비, 2010), 153p
(3) 정연호, 위의 글, 592쪽에서 재인용.
(4) 정연호, 「불가코프 작품에 나타난 '의사'의 형상」. 『노어노문학』, (안성: 한국노어노문학회, 2009), 593쪽에서 재인용.
(5) 김규종, 「극작가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끼와 미하일 불가꼬프의 대화」, 『러시아연구』10호(서울: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000), 22쪽에서 재인용.
(6) 기존의 『비운의 달걀』(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개의 심장』(열린책들) 외의 여러 중·단편을 합본.
(7) 기존에 삼성출판사, 한길사 등에서 냈던 판본을 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