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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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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7,19589
=== 작가로서의 고립 ===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평계의 원색적인 혹평에 절망한 불가코프는 1929년 7월, 당 서기장 스탈린, 정치국 중앙위원회 의장 칼리닌, 예술국 의장 스비데르스키, 작가 막심 고리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소비에트 밖으로 추방시켜달라고 요청한다.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작품 활동을 보장해주거나 아내(여기서는 류보프)와의 망명을 허락해주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총살시켜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불가코프는 이렇게 강렬한 편지를 보냄으로써 스탈린과의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했다. 또한 막심 고리키가 자신의 정부 내 지위를 이용하여 '불온 작가'들을 도와준 적이 많았으므로 그의 지지도 얻어내고자 했다. 베레사예프를 통해 고리키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음을 듣기도 했으므로 딱히 근거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당국에 묵살당하고 만다. 1929년 말에는 당대 러시아라는 기존 소재에서 벗어나 당대와도 러시아와도 관계없는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불가코프가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불가코프는 몰리에르와 그의 아내, 그리고 루이 14세와의 관계를 통해 관객들이 당대 모스크바 사회의 모습을 읽어내길 바랐다. 이 작업을 위해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한다. 불가코프는 이 작품이나마 상연되길 바랐지만 1930년 3월 18일, 레퍼토리 총국으로부터 『위선자들의 밀교』 상연 금지 통보를 받는다. 이에 절망한 불가코프는 자신의 원고들을 태워버린다. 여기에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수정본 원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0년 3월 28일에는 스탈린에게 과거 보냈던 것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다시 보내었는데, 4월 18일 밤에 스탈린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마야코프스키가 자살한지 사흘 뒤였다. 엘레나를 통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불가코프에게 이 통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그는 - 늘 그렇듯 -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자기 위해 누웠다. 그러나 전화가 급하게 울렸고, 류바가 그를 불러 중앙 위원회의 누군가가 그와 통화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M.A.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에게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는 사람들이 그런 장난을 쳤었다) 그리고 대충 심드렁하게 수화기를 받은 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미하일 아파나셰비치 불가코프?" >"예, 예!" >"지금 스탈린 동무께서 당신과 통화하실 것이오." >"뭐요? 스탈린? 스탈린?" >그리고 그 직후에 두드러지는 그루지야 억양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통화에서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세가지 질문을 한다. 첫번째는 '정말로 외국으로 나가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이 때 불가코프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가는 결코 좋은 결과가 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던 듯하다. 불가코프는 ‘러시아 작가로서, 러시아와 러시아어를 떠나 살 수는 없다’는 요지의 답변을 한다. 이 때 불가코프가 자신의 본의대로 답변을 했을 때 스탈린이 정말로 그 요구를 들어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반소비에트 혐의로 체포될 수도 있었다. 두번째로 스탈린은 '어디에서 일하기를 원하는가, 혹시 모스크바 예술 극장인가'하며 묻는다. 이에 불가코프는 과거에 그곳에서 일하기를 요청했었지만 거부당했다는 답변을 한다. 이에 스탈린은 긍정적인 결과가 있으리라는 암시를 준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조만간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조연출 자리와 청년노동자극장에서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 일화는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강력한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불가코프가 어째서 스탈린에 대해서는 비교적 나이브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설명해준다. 불가코프의 경우만이 아니라 이 당시 스탈린이 소비에트 작가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반동 작가들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면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아크마토바, 파스테르나크, 불가코프 등의 고집 센 작가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감을 나타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대 반동 작가들의 삶은 스탈린의 변덕에 의해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쨌거나 스탈린과의 통화 이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 복귀했고, 삶에 대한 의욕도 얻었다. 엘레나의 증언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스탈린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자살까지 고려했었다고 한다. 1930년 5월에 복귀한 후 불가코프는 고골의 『죽은 혼』을 상연한다. 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잡음이 일어났다. 당초 극장에서 미리 준비한 대본이 있었지만 불가코프가 자신만의 대본을 한 부 더 만들었어 극장 측의 스타니슬라브스키,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네미로비치-단첸코 등과 대립한다. 결국에는 조정 끝에 좀 더 안전한 대본이 사용되었지만, 이러한 분란은 이후로도 불가코프가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 있는 한 계속해서 발생했다. 1930년 6월에는 크림 해로 휴가를 떠났고, 여기에서 엘레나에게 전보를 보내는 등 본격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어찌되었건 1930년은 불가코프에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럭저럭 잘 풀려나간 해였다. 1931년부터 불가코프의 불행이 다시 시작된다. 이는 주로 남편에게 불륜 관계를 들킨 엘레나가 관계 단절을 선언한 탓이 컸다. 게다가 류보프와의 관계 또한 잘 풀리기는 커녕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친구 예브게니 쟈마찐 또한 정부에 제출했던 망명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파리로 출국하게 되었었다. 당시 불가코프 또한 외국으로 망명한 형제들을 만나려 하는 등 해외 방문 시도를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다. 가령 1931년 5월, 스탈린에게 류보프와의 해외 여행 허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늑대를 대하듯 했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사냥물을 몰듯 나를 몰아쳤다. 원한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무척 지쳤다. 짐승도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짐승은 이미 더 이상 늑대도, 작가가 아님을 선언했다. 그 짐승은 이제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침묵하고 있다. 침묵하는 작가는 없다. 만약 그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다. 만일 진정한 작가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1931년 여름, 불가코프는 레닌그라드에 소재한 크라스니 극장으로부터 ‘미래의 전쟁’을 주제로 주문받았던 SF 희곡 《아담과 이브》를 완성짓는다. 레닌그라드의 다른 극장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희곡으로 각색해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특히 후자의 작업은 친구인 문학자 파벨 포포프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포포프의 아내가 바로 톨스토이의 손녀인 안나 일리치나였기 때문에 포포프를 통해 각색에 필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상연이 금지되었던 희곡 《위선자들의 밀교》도 상연 허가 결정이 내려졌다. 위인들의 생애 편집국으로부터 몰리에르 전기 집필 의뢰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불가코프에게 기회를 주고자 애썼던 막심 고리키의 노력이 있었다. 당 서기장 스탈린 또한 불가코프에게 희소식을 가져다 주었다. 193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찾은 스탈린은 “왜 《투르빈네의 날들》은 무대에 올리지 않는가?”라는 한마디로 그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도록 만들었다. 이후로도 『투르빈네의 날들』은 꾸준히 상영되어 불가코프에게 고정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스탈린이 보였던 이러한 호의는 불가코프에게 자신의 작품들이 소비에트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불가코프 단지 극장의 문학자문위원으로,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각색하는 각색자, 번역가로 묶어두려 할 뿐이었다. 《투르빈네의 날들》은 이미 불가코프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정된 뒤였고, 1936년에 ‘몰리에르’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상연된 《위선자들의 밀교》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저급하게 날조한 희곡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8회만에 무대에서 내려졌다. 수많은 자료를 참고해가며 썼던 몰리에르 전기도, 그가 썼던 다른 희곡들도 결국에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가코프가 가져온 원고를 읽은 극장들은 이내 공연 계약을 취소하거나 연습 도중 공연 계획을 취소시켰다. 『아담과 이브』는 몰리에르 전기도 마르크시즘적 역사관에 배치된다는 지적과 함께 원고를 돌려받고 출판을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상태는 불가코프에게 작가로서의 파멸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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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로서의 고립 ===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평계의 원색적인 혹평에 절망한 불가코프는 1929년 7월, 당 서기장 스탈린, 정치국 중앙위원회 의장 칼리닌, 예술국 의장 스비데르스키, 작가 막심 고리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소비에트 밖으로 추방시켜달라고 요청한다.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의 작품 활동을 보장해주거나 아내(여기서는 류보프)와의 망명을 허락해주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총살시켜달라는 내용도 있었다. 불가코프는 이렇게 강렬한 편지를 보냄으로써 스탈린과의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했다. 또한 막심 고리키가 자신의 정부 내 지위를 이용하여 '불온 작가'들을 도와준 적이 많았으므로 그의 지지도 얻어내고자 했다. 베레사예프를 통해 고리키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음을 듣기도 했으므로 딱히 근거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당국에 묵살당하고 만다. 1929년 말에는 당대 러시아라는 기존 소재에서 벗어나 당대와도 러시아와도 관계없는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불가코프가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비판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불가코프는 몰리에르와 그의 아내, 그리고 루이 14세와의 관계를 통해 관객들이 당대 모스크바 사회의 모습을 읽어내길 바랐다. 이 작업을 위해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한다. 불가코프는 이 작품이나마 상연되길 바랐지만 1930년 3월 18일, 레퍼토리 총국으로부터 『위선자들의 밀교』 상연 금지 통보를 받는다. 이에 절망한 불가코프는 자신의 원고들을 태워버린다. 여기에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수정본 원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0년 3월 28일에는 스탈린에게 과거 보냈던 것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다시 보내었는데, 4월 18일 밤에 스탈린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마야코프스키가 자살한지 사흘 뒤였다. 엘레나를 통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불가코프에게 이 통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던 것 같다. >그는 - 늘 그렇듯 - 점심을 먹은 후 낮잠을 자기 위해 누웠다. 그러나 전화가 급하게 울렸고, 류바가 그를 불러 중앙 위원회의 누군가가 그와 통화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M.A.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에게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는 사람들이 그런 장난을 쳤었다) 그리고 대충 심드렁하게 수화기를 받은 후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미하일 아파나셰비치 불가코프?" >"예, 예!" >"지금 스탈린 동무께서 당신과 통화하실 것이오." >"뭐요? 스탈린? 스탈린?" >그리고 그 직후에 두드러지는 그루지야 억양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통화에서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세가지 질문을 한다. 첫번째는 '정말로 외국으로 나가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이 때 불가코프는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가는 결코 좋은 결과가 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던 듯하다. 불가코프는 ‘러시아 작가로서, 러시아와 러시아어를 떠나 살 수는 없다’는 요지의 답변을 한다. 이 때 불가코프가 자신의 본의대로 답변을 했을 때 스탈린이 정말로 그 요구를 들어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반소비에트 혐의로 체포될 수도 있었다. 두번째로 스탈린은 '어디에서 일하기를 원하는가, 혹시 모스크바 예술 극장인가'하며 묻는다. 이에 불가코프는 과거에 그곳에서 일하기를 요청했었지만 거부당했다는 답변을 한다. 이에 스탈린은 긍정적인 결과가 있으리라는 암시를 준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조만간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조연출 자리와 청년노동자극장에서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 일화는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강력한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불가코프가 어째서 스탈린에 대해서는 비교적 나이브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설명해준다. 불가코프의 경우만이 아니라 이 당시 스탈린이 소비에트 작가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반동 작가들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면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아크마토바, 파스테르나크, 불가코프 등의 고집 센 작가들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감을 나타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대 반동 작가들의 삶은 스탈린의 변덕에 의해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쨌거나 스탈린과의 통화 이후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에 복귀했고, 삶에 대한 의욕도 얻었다. 엘레나의 증언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스탈린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자살까지 고려했었다고 한다. 1930년 5월에 복귀한 후 불가코프는 고골의 『죽은 혼』을 상연한다. 이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도 잡음이 일어났다. 당초 극장에서 미리 준비한 대본이 있었지만 불가코프가 자신만의 대본을 한 부 더 만들었어 극장 측의 스타니슬라브스키,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네미로비치-단첸코 등과 대립한다. 결국에는 조정 끝에 좀 더 안전한 대본이 사용되었지만, 이러한 분란은 이후로도 불가코프가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 있는 한 계속해서 발생했다. 1930년 6월에는 크림 해로 휴가를 떠났고, 여기에서 엘레나에게 전보를 보내는 등 본격적인 관계를 시작한다. 어찌되었건 1930년은 불가코프에게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럭저럭 잘 풀려나간 해였다. 1931년부터 불가코프의 불행이 다시 시작된다. 이는 주로 남편에게 불륜 관계를 들킨 엘레나가 관계 단절을 선언한 탓이 컸다. 게다가 류보프와의 관계 또한 잘 풀리기는 커녕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친구 예브게니 쟈마찐 또한 정부에 제출했던 망명 탄원서가 받아들여져 파리로 출국하게 되었었다. 당시 불가코프 또한 외국으로 망명한 형제들을 만나려 하는 등 해외 방문 시도를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다. 가령 1931년 5월, 스탈린에게 류보프와의 해외 여행 허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나를 늑대를 대하듯 했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사냥물을 몰듯 나를 몰아쳤다. 원한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무척 지쳤다. 짐승도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짐승은 이미 더 이상 늑대도, 작가가 아님을 선언했다. 그 짐승은 이제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침묵하고 있다. 침묵하는 작가는 없다. 만약 그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다. 만일 진정한 작가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1931년 여름, 불가코프는 레닌그라드에 소재한 크라스니 극장으로부터 ‘미래의 전쟁’을 주제로 주문받았던 SF 희곡 《아담과 이브》를 완성짓는다. 레닌그라드의 다른 극장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희곡으로 각색해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특히 후자의 작업은 친구인 문학자 파벨 포포프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포포프의 아내가 바로 톨스토이의 손녀인 안나 일리치나였기 때문에 포포프를 통해 각색에 필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상연이 금지되었던 희곡 《위선자들의 밀교》도 상연 허가 결정이 내려졌다. 위인들의 생애 편집국으로부터 몰리에르 전기 집필 의뢰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의 배후에는 불가코프에게 기회를 주고자 애썼던 막심 고리키의 노력이 있었다. 당 서기장 스탈린 또한 불가코프에게 희소식을 가져다 주었다. 1932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찾은 스탈린은 “왜 《투르빈네의 날들》은 무대에 올리지 않는가?”라는 한마디로 그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도록 만들었다. 이후로도 『투르빈네의 날들』은 꾸준히 상영되어 불가코프에게 고정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스탈린이 보였던 이러한 호의는 불가코프에게 자신의 작품들이 소비에트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불가코프 단지 극장의 문학자문위원으로,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각색하는 각색자, 번역가로 묶어두려 할 뿐이었다. 《투르빈네의 날들》은 이미 불가코프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수정된 뒤였고, 1936년에 ‘몰리에르’라는 제목으로 수정되어 상연된 《위선자들의 밀교》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저급하게 날조한 희곡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8회만에 무대에서 내려졌다. 수많은 자료를 참고해가며 썼던 몰리에르 전기도, 그가 썼던 다른 희곡들도 결국에는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가코프가 가져온 원고를 읽은 극장들은 이내 공연 계약을 취소하거나 연습 도중 공연 계획을 취소시켰다. 『아담과 이브』는 몰리에르 전기도 마르크시즘적 역사관에 배치된다는 지적과 함께 원고를 돌려받고 출판을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상태는 불가코프에게 작가로서의 파멸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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