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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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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58,24312
=== 복권 과정 === 불가코프의 사후 불가코프의 이름은 러시아의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소수의 독자만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던 《투르빈네의 날들》이나 잡지에 기고되었던 장편 소설 『백위군』을 기억할 뿐이었다. 불가코프의 아내 옐레나 세르게예브나는 1945년, 스탈린에게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출간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소비에트 문학계에 해빙의 바람이 불면서 불가코프의 이름이 거론되긴 했다. 1954년 12월에 열린 전소작가동맹 제2회 대회에서 벤야민 카베린이 불가코프의 복권을 요구하였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엘레나 세르게예브나가 즉시 카베린에게 불가코프의 원고들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코프의 복권 작업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게 이루어졌다. 우선 1956년부터 불가코프의 중단편을 모은 작품집이 조금씩 발간되기 시작했고, 불가코프의 작품을 기리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자 작가였던 콘스탄틴 시모노프가 위원장을 맡았으며, 시모노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은 후 이 작품이 작가 평생의 역작이라는데 동의하였고, 옐레나와 함께 불가코프의 명예 회복을 위하여 노력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시모노프와 옐레나의 노력으로 불가코프의 중단편과 희곡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두 사람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예르샬라임 부분만을 역사 소설로 편집하여 연재하고 동시에 작품 전체를 다른 잡지에 연재한다는 작전을 기획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불가코프의 복권은 1966년부터 67년에 걸쳐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잡지에 연재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정권을 비판하는 민감한 부분 - 특히 소비에트 비밀 경찰 관련 부분, 예르샬라임과 모스크바가 유사하게 묘사되는 부분 - 은 검열된 채였지만, 그 상태로도 출간 즉시 소비에트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연재된 잡지는 희귀본 취급을 받았고, 사람들은 지하 출판을 통해 검열로 삭제된 부분을 찾아 읽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불가코프는 '거장'과 동일시되었으며,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비겁함은 인간의 가장 큰 악덕 중 하나이다.” 등 소설 속 경구들이 널리 회자되었다. 러시아에서 검열본의 연재가 완료된 1967년에 파리에서 무삭제본이 출간되었다. 이후에는 영국, 헝가리,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불가코프가 소개되며 이 소설이 번역 출간되었다. 러시아에서도 1973년에 비검열판이 출간되기에 이른다. 당시 몇몇 비평가들은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쏟아졌던 열기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그러한 평가가 무색하게도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러시아 문학 작품 중 하나이다. 미하일 불가코프가 유년 시절을 보낸 키예프 집과, 모스크바에서 거주했던 사도바야 거리의 아파트에는 각각 불가코프와 그의 작품들을 위한 박물관이 설치되었다. 이외에, 그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주배경으로 삼았던 아르바트 거리를 중심으로 불가코프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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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권 과정 === 불가코프의 사후 불가코프의 이름은 러시아의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소수의 독자만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되었던 《투르빈네의 날들》이나 잡지에 기고되었던 장편 소설 『백위군』을 기억할 뿐이었다. 불가코프의 아내 옐레나 세르게예브나는 1945년, 스탈린에게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출간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소비에트 문학계에 해빙의 바람이 불면서 불가코프의 이름이 거론되긴 했다. 1954년 12월에 열린 전소작가동맹 제2회 대회에서 벤야민 카베린이 불가코프의 복권을 요구하였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엘레나 세르게예브나가 즉시 카베린에게 불가코프의 원고들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코프의 복권 작업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디게 이루어졌다. 우선 1956년부터 불가코프의 중단편을 모은 작품집이 조금씩 발간되기 시작했고, 불가코프의 작품을 기리기 위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당대의 저명한 시인이자 작가였던 콘스탄틴 시모노프가 위원장을 맡았으며, 시모노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은 후 이 작품이 작가 평생의 역작이라는데 동의하였고, 옐레나와 함께 불가코프의 명예 회복을 위하여 노력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시모노프와 옐레나의 노력으로 불가코프의 중단편과 희곡들이 대거 출판되었다. 두 사람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예르샬라임 부분만을 역사 소설로 편집하여 연재하고 동시에 작품 전체를 다른 잡지에 연재한다는 작전을 기획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불가코프의 복권은 1966년부터 67년에 걸쳐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잡지에 연재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비에트 정권을 비판하는 민감한 부분 - 특히 소비에트 비밀 경찰 관련 부분, 예르샬라임과 모스크바가 유사하게 묘사되는 부분 - 은 검열된 채였지만, 그 상태로도 출간 즉시 소비에트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연재된 잡지는 희귀본 취급을 받았고, 사람들은 지하 출판을 통해 검열로 삭제된 부분을 찾아 읽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불가코프는 '거장'과 동일시되었으며,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비겁함은 인간의 가장 큰 악덕 중 하나이다.” 등 소설 속 경구들이 널리 회자되었다. 러시아에서 검열본의 연재가 완료된 1967년에 파리에서 무삭제본이 출간되었다. 이후에는 영국, 헝가리,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불가코프가 소개되며 이 소설이 번역 출간되었다. 러시아에서도 1973년에 비검열판이 출간되기에 이른다. 당시 몇몇 비평가들은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쏟아졌던 열기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그러한 평가가 무색하게도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히는 러시아 문학 작품 중 하나이다. 미하일 불가코프가 유년 시절을 보낸 키예프 집과, 모스크바에서 거주했던 사도바야 거리의 아파트에는 각각 불가코프와 그의 작품들을 위한 박물관이 설치되었다. 이외에, 그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주배경으로 삼았던 아르바트 거리를 중심으로 불가코프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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