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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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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2,15436
=== 몰락의 시작 === 192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호평받는 작가였던 불가코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1924년부터 소련 사회를 장악한 스탈린의 지배 체제가 보다 강고해짐에 따라 소련의 사회적 분위기가 점차 경직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불가코프의 작품에 대한 비판이 점차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백위군』의 첫 각색작을 탈고하기 두달 전에 중단편집 『디아볼리아다』를 발표할 때부터 점차 불가코프를 경계하는 시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디아볼리아다』도 출간 직후에 압수되었다가 1926년 4월에 재간이 허용된다. 1926년 5월에는 스탈린 정권을 풍자한 소설 『개의 심장』과 관련하여 가택 수색을 당해 『개의 심장』 원고와 일기 등을 압수당한다. 이 일기는 불가코프는 아내인 류보프에게도 비밀로 하고서 써왔던 일기로, 이 일기가 압수된 사건은 불가코프에게 개인적으로도 큰 타격을 준다. 국가보안국의 심문에서 불가코프는 『개의 심장』에 반소비에트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와 함께 자신은 "언제나 양심에 따라 보이는 대로 쓰며, 소비에트의 부정적 현상들 속에서 본능적으로 거대한 먹이를 본다. 나는 풍자가다."라고 밝힌다.[6] 10월에 상연된 『투르빈네의 날들』과 이후의 두번째 희곡 『조이카의 아파트』가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이때부터 불가코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토록 격한 검열을 받았음에도 『투르빈네의 날들』은 혁명 후 문학 중에서 백위군을 단순 악역 이상의 무언가로 묘사하고자 했던 첫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이 점이 좌익 비평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물론 레퍼토리 총국 소속의 비평가들이 불가코프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였다. 비평가들은 불가코프가 소비에트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하고, 내전을 다룬 작품들 속에서 반동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불가코프를 반소비에트·반혁명적 작가로 낙인찍었고, 불가코프의 작품들을 ‘혁명에 찬 악의에 찬 비방문’, ‘엉터리 성상화가’가 그린 ‘백위군 순교자들의 성화’라고 부르며 '불가코프주의를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훗날 불가코프 자신이 헤아린 바에 따르면 『백위군』 발표 이후 십 년 간 각종 신문과 잡지에 실린 불가코프 관련 글 중 그에 대한 비판이 298편에 달했던 데 반해 그에 대해 긍정적인 글은 단 세 편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반 관객 사이에서는 불가코프의 희곡이 상당한 호평을 받았는데, 평단과 일반 대중의 이런 괴리는 이후 불가코프가 생전에 발표한 거의 모든 작품들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졌다. 불가코프도 1927년 2월 7일 메이에르홀트 극장에서 열린 토론회 등을 통해 루나차르스키나 오를린스키와 같은 비평가들의 견해에 적극 대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혹독해진 비판들은 불가코프를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에 빠뜨렸다. 1928년 2월에는 동생들을 만나고자 해외 여행 허가를 요청하지만 모스크바 시 당국에 의해 거절당한다. 압수당한 『개의 심장』을 대신하여 새로 집필한 『질주』를 새 공연 목록에 올리기로 결정하지만 이마저 1928년 5월에 상연 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 다음달에는 『투르빈네의 날들』과 『조이카의 아파트』 또한 상연이 금지되었다. 1928년 9월 26일에는 뜻밖에도 희곡 『적자색 섬』의 공연을 허가받지만 불가사의와도 같았던 이 결정은 외려 불가코프에 대한 거센 비판의 빌미가 된다. 10월에는 막심 고리키의 참석 하에 희곡 『질주』에 대한 논의가 열린다. 여기서 고리키가 레퍼토리 총국의 활동을 비판하고 『질주』의 예술성을 옹호한 결과 질주의 상연 허가가 내려졌다. 그러나 고리키가 모스크바를 떠나자 레퍼토리 총국은 다시 『질주』의 상연을 금지한다. 12월에는 시인 베지멘스키(이반 베즈돔니의 원형),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알렉산드르 류힌의 원형), 보고류보프 등이 불가코프를 규탄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극작가 빌-벨로체르코프스키, 피켈 등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스탈린에게 반소비에트적 죄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낸다. 어찌 보면 불가코프에 대한 러시아 문학계의 비판은, 오히려 스탈린의 그것보다 더 가혹한 측면이 컸다. 1929년 2월, 스탈린은 불가코프를 고발했던 극작가 빌-벨로체르콥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불가코프의 작품을 두둔한다. 이 편지에 따르면 스탈린은 『적자색 섬』을 해로운 작품이라고 하면서도 "『질주』가 반소비에트적 현상임은 분명하지만 희곡 마지막에 몇 장면만 덧붙인다면 상연을 반대할 이유는 없으며 『투르빈네의 날들』의 경우도 궁극적으로는 이득이 더 많은 작품"이라는 의견을 밝힌다. 『투르빈네의 날들』이 볼셰비즘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뜻에서였다. 이 편지에 힘입어 불가코프의 작품은 일시적으로 해금된다. 이에 불가코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옹호해준다고 착각하여 훗날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헛된 시도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의 옹호는 결과적으로 비평가들의 더 격한 반응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며칠만에 우크라이나 작가 대표단의 항의 방문을 받은 스탈린은 비평가들에게 한수 접어주고 만다. 스탈린이 옹호 편지를 쓴지 불과 보름도 되지 않아 레퍼토리 총국은 불가코프의 모든 작품에 상영 금지 처분을 내린다. 『질주』를 둘러싼 이 일련의 사태는 당시 당내 실권을 잡아가던 스탈린과 그 반대파 간의 정치적 갈등과 무관하지 않았다. 스탈린이 대표단에게 양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련의 사태는 예브게니 쟈마찐을 비롯한 벗들이 불가코프의 신경증 증세를 걱정할 정도로 불가코프를 괴롭혔다. 불가코프 자신은 1929년을 '파국의 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브게니 쟈마찐 등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작가들과의 관계만이 위안거리가 되어주었다. 다만 이 해 2월 28일, 불가코프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로브스카야, 즉 자신의 세 번째 아내가 될 사람과 만나게 된다. 트베르스카야 거리(『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거장이 마르가리타를 처음 만난 장소)에 있는 화가 모이세젠코의 집에서 열린 파티를 통해서였다. 다만 이때는 불가코프가 불안정한 형태나마 류보프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였고, 엘레나 역시 군 고위 장교인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실로브스키와 결혼 중이었다. 불가코프는 류보프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엘레나를 통해 얻기 시작했고, 그해 봄과 여름을 통해 엘레나와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같은 해에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초고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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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락의 시작 === 192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호평받는 작가였던 불가코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1924년부터 소련 사회를 장악한 스탈린의 지배 체제가 보다 강고해짐에 따라 소련의 사회적 분위기가 점차 경직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불가코프의 작품에 대한 비판이 점차 가혹해지기 시작했다. 『백위군』의 첫 각색작을 탈고하기 두달 전에 중단편집 『디아볼리아다』를 발표할 때부터 점차 불가코프를 경계하는 시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디아볼리아다』도 출간 직후에 압수되었다가 1926년 4월에 재간이 허용된다. 1926년 5월에는 스탈린 정권을 풍자한 소설 『개의 심장』과 관련하여 가택 수색을 당해 『개의 심장』 원고와 일기 등을 압수당한다. 이 일기는 불가코프는 아내인 류보프에게도 비밀로 하고서 써왔던 일기로, 이 일기가 압수된 사건은 불가코프에게 개인적으로도 큰 타격을 준다. 국가보안국의 심문에서 불가코프는 『개의 심장』에 반소비에트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와 함께 자신은 "언제나 양심에 따라 보이는 대로 쓰며, 소비에트의 부정적 현상들 속에서 본능적으로 거대한 먹이를 본다. 나는 풍자가다."라고 밝힌다.[6] 10월에 상연된 『투르빈네의 날들』과 이후의 두번째 희곡 『조이카의 아파트』가 큰 성공을 거두지만 이때부터 불가코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토록 격한 검열을 받았음에도 『투르빈네의 날들』은 혁명 후 문학 중에서 백위군을 단순 악역 이상의 무언가로 묘사하고자 했던 첫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이 점이 좌익 비평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물론 레퍼토리 총국 소속의 비평가들이 불가코프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였다. 비평가들은 불가코프가 소비에트의 어두운 측면에 주목하고, 내전을 다룬 작품들 속에서 반동분자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불가코프를 반소비에트·반혁명적 작가로 낙인찍었고, 불가코프의 작품들을 ‘혁명에 찬 악의에 찬 비방문’, ‘엉터리 성상화가’가 그린 ‘백위군 순교자들의 성화’라고 부르며 '불가코프주의를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훗날 불가코프 자신이 헤아린 바에 따르면 『백위군』 발표 이후 십 년 간 각종 신문과 잡지에 실린 불가코프 관련 글 중 그에 대한 비판이 298편에 달했던 데 반해 그에 대해 긍정적인 글은 단 세 편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반 관객 사이에서는 불가코프의 희곡이 상당한 호평을 받았는데, 평단과 일반 대중의 이런 괴리는 이후 불가코프가 생전에 발표한 거의 모든 작품들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졌다. 불가코프도 1927년 2월 7일 메이에르홀트 극장에서 열린 토론회 등을 통해 루나차르스키나 오를린스키와 같은 비평가들의 견해에 적극 대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혹독해진 비판들은 불가코프를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에 빠뜨렸다. 1928년 2월에는 동생들을 만나고자 해외 여행 허가를 요청하지만 모스크바 시 당국에 의해 거절당한다. 압수당한 『개의 심장』을 대신하여 새로 집필한 『질주』를 새 공연 목록에 올리기로 결정하지만 이마저 1928년 5월에 상연 금지 처분을 당한다. 그 다음달에는 『투르빈네의 날들』과 『조이카의 아파트』 또한 상연이 금지되었다. 1928년 9월 26일에는 뜻밖에도 희곡 『적자색 섬』의 공연을 허가받지만 불가사의와도 같았던 이 결정은 외려 불가코프에 대한 거센 비판의 빌미가 된다. 10월에는 막심 고리키의 참석 하에 희곡 『질주』에 대한 논의가 열린다. 여기서 고리키가 레퍼토리 총국의 활동을 비판하고 『질주』의 예술성을 옹호한 결과 질주의 상연 허가가 내려졌다. 그러나 고리키가 모스크바를 떠나자 레퍼토리 총국은 다시 『질주』의 상연을 금지한다. 12월에는 시인 베지멘스키(이반 베즈돔니의 원형),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알렉산드르 류힌의 원형), 보고류보프 등이 불가코프를 규탄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고, 극작가 빌-벨로체르코프스키, 피켈 등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스탈린에게 반소비에트적 죄를 고발하는 편지를 보낸다. 어찌 보면 불가코프에 대한 러시아 문학계의 비판은, 오히려 스탈린의 그것보다 더 가혹한 측면이 컸다. 1929년 2월, 스탈린은 불가코프를 고발했던 극작가 빌-벨로체르콥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불가코프의 작품을 두둔한다. 이 편지에 따르면 스탈린은 『적자색 섬』을 해로운 작품이라고 하면서도 "『질주』가 반소비에트적 현상임은 분명하지만 희곡 마지막에 몇 장면만 덧붙인다면 상연을 반대할 이유는 없으며 『투르빈네의 날들』의 경우도 궁극적으로는 이득이 더 많은 작품"이라는 의견을 밝힌다. 『투르빈네의 날들』이 볼셰비즘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뜻에서였다. 이 편지에 힘입어 불가코프의 작품은 일시적으로 해금된다. 이에 불가코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옹호해준다고 착각하여 훗날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헛된 시도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의 옹호는 결과적으로 비평가들의 더 격한 반응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며칠만에 우크라이나 작가 대표단의 항의 방문을 받은 스탈린은 비평가들에게 한수 접어주고 만다. 스탈린이 옹호 편지를 쓴지 불과 보름도 되지 않아 레퍼토리 총국은 불가코프의 모든 작품에 상영 금지 처분을 내린다. 『질주』를 둘러싼 이 일련의 사태는 당시 당내 실권을 잡아가던 스탈린과 그 반대파 간의 정치적 갈등과 무관하지 않았다. 스탈린이 대표단에게 양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련의 사태는 예브게니 쟈마찐을 비롯한 벗들이 불가코프의 신경증 증세를 걱정할 정도로 불가코프를 괴롭혔다. 불가코프 자신은 1929년을 '파국의 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브게니 쟈마찐 등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작가들과의 관계만이 위안거리가 되어주었다. 다만 이 해 2월 28일, 불가코프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실로브스카야, 즉 자신의 세 번째 아내가 될 사람과 만나게 된다. 트베르스카야 거리(『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거장이 마르가리타를 처음 만난 장소)에 있는 화가 모이세젠코의 집에서 열린 파티를 통해서였다. 다만 이때는 불가코프가 불안정한 형태나마 류보프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였고, 엘레나 역시 군 고위 장교인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실로브스키와 결혼 중이었다. 불가코프는 류보프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엘레나를 통해 얻기 시작했고, 그해 봄과 여름을 통해 엘레나와 급속도로 친밀해진다. 같은 해에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초고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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