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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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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 === 사라토프에 있는 장모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첫 의료 활동을 하던 중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맞이한다. 이듬해 적십자사에 자원하여 곧바로 최전선에 보내졌다. 아내 타치아나도 간호사로 취직하였다. 1916년 3월, 졸업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임시 졸업 증명서를 받아 카메네츠, 체르노비츠 등 전선의 야전병원에서 일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적십자의 임지 발령에 따라 스몰렌스크 현의 스이체프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 니콜리스코예에 파견된다. 이 때의 이야기는 단편 소설 「수탉이 수놓여진 수건」(1925)의 첫머리에 기술되었다. 1916년 10월에 정식으로 키예프 의대를 졸업. 졸업 성적은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고 한다. 1917년 9월에는 모스크바 근교의 소도시 뱌지마로 자리를 옮긴다. 불가코프의 파견지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궁벽한 소도시였다. 불가코프의 생활 또한 대체로 단조로우면서도 고통스러웠던 듯싶다. 실제로 불가코프는 1917년 12월 31일, 누이동생에게 “미칠 만큼 모스크바나 키예프로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흘러간다. 나는 특히 키예프로 가고 있다.”라고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 때의 경험은 단편집 『한 젊은 의사의 수기』(1925~1926)에 반영되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겨졌다. 내 주위에는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는 십일월의 어둠뿐이다. 집은 온통 눈에 파묻혔고 굴뚝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 삶의 스물네 해 동안 줄곧 거대한 도시에서 살았으므로 눈보라가 울부짖는 일은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눈보라는 진짜로 울부짖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불가코프, 「철로 된 목」, 『무도회가 끝난 뒤』(파주:창비, 2010), 153p] 의사로서는 매독의 전파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환자들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자신은 복무 중에 최소 두차례 이상의 중상을 입었다. 특히 디프테리아 치료 중에 얻은 병으로 인해 적십자 복무에서 해제되어 고향 키예프로 돌아온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불가코프를 꽤나 오랫동안 괴롭혀서, 이때문에 불가코프는 심각한 모르핀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의사로서 진통제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아내의 도움을 통해 1918년에는 모르핀 중독을 완전히 떨쳐낸다. 이러한 경험은 특히 『한 젊은 의사의 수기』에 수록되었던 「모르핀」에 잘 나타난다. 1918년 2월, 적십자 복무에서 해제되어 아내와 함께 고향 키예프로 돌아간다. 불가코프는 키예프로 돌아온 직후 개업의가 되지만, 이때의 키예프는 이미 그가 꿈꿔왔던 고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예프는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있던 독일 점령군과 그들의 괴뢰 정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볼셰비키 혁명군, 백위군 등이 뒤엉켜 싸우는 참혹한 전쟁터가 된지 오래였으며 그때그때의 전황에 따라 불가코프의 소속도 수없이 바뀌어야 했다. 1919년 2월, 키예프에서 퇴각하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군위군으로 징집되지만 탈영한다.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는 뱌지마에서 쓴 단편들을 토대로 「현 의사의 습작」, 「병」, 「개화」를 쓴다. 8월에는 퇴각하던 붉은 군대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키예프를 떠났다가 10월 중순, 붉은 군대와 함께 다시 키예프로 돌아온다. 시가전 도중 백위군 측 포로가 된다. 포로 전원이 총살될 위기에 처했지만 백군은 티푸스를 치료할 의사를 찾는다. 마침내 군의관으로 복무하겠다고 말한 불가코프를 제외한 모든 포로들이 총살되었다. 11월에는 백위군과 함께 키에프를 떠나 러시아 남부 캅카스로 향한다. 11월, 첫 출판물인 에세이 「미래의 전망」이 신문 《그로즈니》에 실린다. 그러나 11월 말 혹은 12월 초에 블라디캅카스에 도착하여 군병원에서 일한다. 12월 말, 병원 일을 그만두고 블라디캅카스 지역 신문의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1920년 1~2월, 블라디캅카스 지역 신문에 문예소품 「카페에서」와 「환희의 대가」가 실린다. 2월 말 혹은 3월 초에 발진 티푸스를 심하게 앓는다. 이 병으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하려던 꿈이 좌절되고 만다. 이는 작가가 질병을 운명의 화신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연호, 위의 글, 592쪽에서 재인용.] 이 무렵 백위군은 블라디캅카스 지역에서 퇴각하고, 불가코프는 소비에트 권력 하의 블라디캅카스에 남겨지게 된다. 이것으로 불가코프의 백위군 군의관 복무는 끝났지만 이 경력은 불가코프가 의사직을 혐오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애당초 불가코프는 딱히 의사 일을 싫어하지 않았었다. 불가코프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B. 포포프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의사직을 아주 훌륭하고 매혹적인 일로 여겼다고 한다.[* 정연호, 「불가코프 작품에 나타난 '의사'의 형상」. 『노어노문학』, (안성: 한국노어노문학회, 2009), 593쪽에서 재인용.] 의대 재학 시절에도 의사와 관련된 습작을 쓴 적이 있고, 작가로 전업을 결심한 뒤에도 의사에 관련된 단편집인 『한 젊은 의사의 수기』를 썼다. 그러나 앞서 거론한 군의관 경험은 불가코프로 하여금 백군·적군 양측과 더불어 의사란 직업마저 극도로 혐오하게 만든다. 훗날 『백위군』과 《투르빈네의 날들》이 사상 문제를 일으키면서 불가코프의 상황이 난처해진 까닭도 있었다. 결국에는 소비에트 군사위원회가 군의관 소환령을 내렸을 때도 '이미 오래전에 의학에 대한 극단적 혐오로 인하여 의술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였다'는 내용의 정식 소견서를 보내고는 의사 자격증을 포기하였다. 1920년 4월 초부터 불가코프는 의사직을 그만두고 블라디캅카스 혁명위원회 인민교육부 예술지국에서 일하며 문예 활동을 시작한다. 문학의 밤, 강연회, 콘서트, 공연 기획 등에 참여하였고 스스로도 『자기방어』, 『투르빈 형제들』 등의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지만, 이 때부터 사상을 의심받아 불온 작가로 낙인찍히기 시작한다. 불가코프는 혁명 이후의 '인습 타파' 정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특히혁명 전에 활동했던 작가들을 계급 성분과 연결지어 비판하던 분위기를 몹시 싫어하였는데, 10월 26일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알렉산드르 푸슈킨을 옹호하였다가 청중과 지역 언론의 지탄을 받는다. 결국 11월에는 예술지국에서 해고되었다. 1921년 1월 말 내지 2월 초에는 희곡 『파리 코뮌니스트들』을 집필하여 앞서 발표한 두 희곡과 함께 모스크바 공산주의 드라마 작업실로 보내지만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다. 5월 말에는 블라디캅카스를 떠나 바쿠를 거쳐 티플리스에서 희곡을 무대에 올리려 하지만 성사되지 못한다. 7월 말에는 흑해 연안 도시 바툼으로 떠나 프랑스와 독일에 망명 신청을 하여 허가를 얻어내지만,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출국을 금지당한다. 이후 9월 초에 고향 키예프로 떠났다가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다. 1차 대전과 내전이 불가코프에게 입힌 상처는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전이 발발하자 불가코프의 가족들은 주로 백군 쪽에 가담했고, 소비에트 연방의 찬성 이후에는 가족들이 대부분 파리로 망명하는 바람에 남동생을 제외한 형제들과도 헤어지고 말았다. 불가코프 자신도 망명하고자 했지만 병이나 당국의 금지 처분에 의해 성사되지 못했다. 더욱이 전황에 따라 소속과 거주지를 갈아치워가며 몸소 체험하고 목격했던 전쟁의 참상들은 불가코프가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회의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30년에 불가코프가 소비에트 정부에 보낸 편지도 이를 뒷받침한다. 불가코프는 혁명과 함께 파괴된 옛 가치들, 그중에서도 ‘정신적인 것의 중심’으로서 ‘집’의 파괴를 아쉬워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작가로서의 불가코프에 결정적인 의식 변화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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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내전 === 사라토프에 있는 장모가 경영하는 병원에서 첫 의료 활동을 하던 중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맞이한다. 이듬해 적십자사에 자원하여 곧바로 최전선에 보내졌다. 아내 타치아나도 간호사로 취직하였다. 1916년 3월, 졸업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임시 졸업 증명서를 받아 카메네츠, 체르노비츠 등 전선의 야전병원에서 일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적십자의 임지 발령에 따라 스몰렌스크 현의 스이체프카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소도시 니콜리스코예에 파견된다. 이 때의 이야기는 단편 소설 「수탉이 수놓여진 수건」(1925)의 첫머리에 기술되었다. 1916년 10월에 정식으로 키예프 의대를 졸업. 졸업 성적은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고 한다. 1917년 9월에는 모스크바 근교의 소도시 뱌지마로 자리를 옮긴다. 불가코프의 파견지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궁벽한 소도시였다. 불가코프의 생활 또한 대체로 단조로우면서도 고통스러웠던 듯싶다. 실제로 불가코프는 1917년 12월 31일, 누이동생에게 “미칠 만큼 모스크바나 키예프로 훌쩍 떠나고 싶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흘러간다. 나는 특히 키예프로 가고 있다.”라고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이 때의 경험은 단편집 『한 젊은 의사의 수기』(1925~1926)에 반영되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겨졌다. 내 주위에는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는 십일월의 어둠뿐이다. 집은 온통 눈에 파묻혔고 굴뚝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내 삶의 스물네 해 동안 줄곧 거대한 도시에서 살았으므로 눈보라가 울부짖는 일은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눈보라는 진짜로 울부짖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불가코프, 「철로 된 목」, 『무도회가 끝난 뒤』(파주:창비, 2010), 153p] 의사로서는 매독의 전파를 막으려 노력했지만 환자들의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자신은 복무 중에 최소 두차례 이상의 중상을 입었다. 특히 디프테리아 치료 중에 얻은 병으로 인해 적십자 복무에서 해제되어 고향 키예프로 돌아온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불가코프를 꽤나 오랫동안 괴롭혀서, 이때문에 불가코프는 심각한 모르핀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의사로서 진통제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아내의 도움을 통해 1918년에는 모르핀 중독을 완전히 떨쳐낸다. 이러한 경험은 특히 『한 젊은 의사의 수기』에 수록되었던 「모르핀」에 잘 나타난다. 1918년 2월, 적십자 복무에서 해제되어 아내와 함께 고향 키예프로 돌아간다. 불가코프는 키예프로 돌아온 직후 개업의가 되지만, 이때의 키예프는 이미 그가 꿈꿔왔던 고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예프는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있던 독일 점령군과 그들의 괴뢰 정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볼셰비키 혁명군, 백위군 등이 뒤엉켜 싸우는 참혹한 전쟁터가 된지 오래였으며 그때그때의 전황에 따라 불가코프의 소속도 수없이 바뀌어야 했다. 1919년 2월, 키예프에서 퇴각하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군위군으로 징집되지만 탈영한다.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는 뱌지마에서 쓴 단편들을 토대로 「현 의사의 습작」, 「병」, 「개화」를 쓴다. 8월에는 퇴각하던 붉은 군대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키예프를 떠났다가 10월 중순, 붉은 군대와 함께 다시 키예프로 돌아온다. 시가전 도중 백위군 측 포로가 된다. 포로 전원이 총살될 위기에 처했지만 백군은 티푸스를 치료할 의사를 찾는다. 마침내 군의관으로 복무하겠다고 말한 불가코프를 제외한 모든 포로들이 총살되었다. 11월에는 백위군과 함께 키에프를 떠나 러시아 남부 캅카스로 향한다. 11월, 첫 출판물인 에세이 「미래의 전망」이 신문 《그로즈니》에 실린다. 그러나 11월 말 혹은 12월 초에 블라디캅카스에 도착하여 군병원에서 일한다. 12월 말, 병원 일을 그만두고 블라디캅카스 지역 신문의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1920년 1~2월, 블라디캅카스 지역 신문에 문예소품 「카페에서」와 「환희의 대가」가 실린다. 2월 말 혹은 3월 초에 발진 티푸스를 심하게 앓는다. 이 병으로 인해 외국으로 망명하려던 꿈이 좌절되고 만다. 이는 작가가 질병을 운명의 화신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정연호, 위의 글, 592쪽에서 재인용.] 이 무렵 백위군은 블라디캅카스 지역에서 퇴각하고, 불가코프는 소비에트 권력 하의 블라디캅카스에 남겨지게 된다. 이것으로 불가코프의 백위군 군의관 복무는 끝났지만 이 경력은 불가코프가 의사직을 혐오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애당초 불가코프는 딱히 의사 일을 싫어하지 않았었다. 불가코프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B. 포포프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의사직을 아주 훌륭하고 매혹적인 일로 여겼다고 한다.[* 정연호, 「불가코프 작품에 나타난 '의사'의 형상」. 『노어노문학』, (안성: 한국노어노문학회, 2009), 593쪽에서 재인용.] 의대 재학 시절에도 의사와 관련된 습작을 쓴 적이 있고, 작가로 전업을 결심한 뒤에도 의사에 관련된 단편집인 『한 젊은 의사의 수기』를 썼다. 그러나 앞서 거론한 군의관 경험은 불가코프로 하여금 백군·적군 양측과 더불어 의사란 직업마저 극도로 혐오하게 만든다. 훗날 『백위군』과 《투르빈네의 날들》이 사상 문제를 일으키면서 불가코프의 상황이 난처해진 까닭도 있었다. 결국에는 소비에트 군사위원회가 군의관 소환령을 내렸을 때도 '이미 오래전에 의학에 대한 극단적 혐오로 인하여 의술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였다'는 내용의 정식 소견서를 보내고는 의사 자격증을 포기하였다. 1920년 4월 초부터 불가코프는 의사직을 그만두고 블라디캅카스 혁명위원회 인민교육부 예술지국에서 일하며 문예 활동을 시작한다. 문학의 밤, 강연회, 콘서트, 공연 기획 등에 참여하였고 스스로도 『자기방어』, 『투르빈 형제들』 등의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지만, 이 때부터 사상을 의심받아 불온 작가로 낙인찍히기 시작한다. 불가코프는 혁명 이후의 '인습 타파' 정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였다. 특히혁명 전에 활동했던 작가들을 계급 성분과 연결지어 비판하던 분위기를 몹시 싫어하였는데, 10월 26일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는 알렉산드르 푸슈킨을 옹호하였다가 청중과 지역 언론의 지탄을 받는다. 결국 11월에는 예술지국에서 해고되었다. 1921년 1월 말 내지 2월 초에는 희곡 『파리 코뮌니스트들』을 집필하여 앞서 발표한 두 희곡과 함께 모스크바 공산주의 드라마 작업실로 보내지만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다. 5월 말에는 블라디캅카스를 떠나 바쿠를 거쳐 티플리스에서 희곡을 무대에 올리려 하지만 성사되지 못한다. 7월 말에는 흑해 연안 도시 바툼으로 떠나 프랑스와 독일에 망명 신청을 하여 허가를 얻어내지만,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출국을 금지당한다. 이후 9월 초에 고향 키예프로 떠났다가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다. 1차 대전과 내전이 불가코프에게 입힌 상처는 개인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전이 발발하자 불가코프의 가족들은 주로 백군 쪽에 가담했고, 소비에트 연방의 찬성 이후에는 가족들이 대부분 파리로 망명하는 바람에 남동생을 제외한 형제들과도 헤어지고 말았다. 불가코프 자신도 망명하고자 했지만 병이나 당국의 금지 처분에 의해 성사되지 못했다. 더욱이 전황에 따라 소속과 거주지를 갈아치워가며 몸소 체험하고 목격했던 전쟁의 참상들은 불가코프가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회의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30년에 불가코프가 소비에트 정부에 보낸 편지도 이를 뒷받침한다. 불가코프는 혁명과 함께 파괴된 옛 가치들, 그중에서도 ‘정신적인 것의 중심’으로서 ‘집’의 파괴를 아쉬워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은 작가로서의 불가코프에 결정적인 의식 변화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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