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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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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 3남 4녀 중 장남. 1901년에 키예프 제1김나지움에 입학했을 때부터 고골, 알렉산드르 푸슈킨, 톨스토이, 레스토이, 살티코프-쉬체드린 등의 문학 작품에 심취하였다. 1906년에는 가족들이 안드레예브스키 언덕 13번지의 넓은 아파트로 이주한다. 이 집에서의 거주 경험은 훗날 『백위군』의 투르빈 가족이 거주하는 '알렉세예프스키 언덕 13번지'의 묘사에 반영되었다. 1907년에는 아버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가 48세의 나이에 신장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미하일 불가코프가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훗날 불가코프는 49세 때 같은 병을 앓게 된다. 부친의 사망 후 수입의 감소로 인해 가세는 기울어갔지만, 가족들 내의 삶은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불가코프보다 7세 연하였던 사촌 콘스탄틴을 비롯한 여러 사촌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집안에 생기를 더했고, 부친의 학계·교계 동료들의 도움을 통해 일곱 남매 모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예의 독서·음악·공연 취미도 지속했다. 특히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모두 40차례 이상 관람했을 정도로 열심히 관람했다. 단지 샤를 구노의 오페라만이 아니라 여러 극에서 메피스토펠레스로 출연했던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이나 레프 시비랴코프에도 관심을 가졌다. 샬리아핀은 소위 '메소드 연기'의 달인으로, 《파우스트》외에도 『돈 키호테』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였는데, 그가 메피스토펠레스로 분장을 하면 상대역 배우조차 정말로 공포에 떨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연기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메피스토펠레스가 순결한 마르게리트를 타락시키려고 자연의 힘을 구하는 장면 다음에 그는 무대 뒤쪽에 나무처럼 서 있었어요. 그래요, 진짜 나무 같았죠. 그런데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진 거에요. 어떻게 그랬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어요. 마치 흑마술 같았다니까요. 그런데 막이 끝날 즈음에 어떤 키 큰 존재(샬리아핀은 약 190cm였다)가 내 위로 나타나는가 싶더니 무서운 거미가 창문을 둘러싼 채 파우스트와 나를 포위하는 것 같은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페라가 아니고 현실 공포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막이 내린 다음에야 메피스토펠레스는 샬리아핀으로 돌아왔어요. 그제야 한숨을 쉴 수 있었지요. 정말 샬리아핀의 연기는 마법 같은 놀라움이었습니다."[* 유형종, 「공포의 카리스마, 흑마술 같은 저음 - 표도르 샬리아핀」, 『불멸의 목소리』(서울: 시공사, 2006).] 또한 불가코프의 책상 앞에는 키예프의 유명한 베이스 시비랴코프가 메피스토펠레스로 분한 사진이 ‘꿈은 때로 현실이 된다’는 구절과 함께 걸려 있었다고 한다. 불가코프의 연극열은 단순 감상에 그치지 않고, 동생·친구들과 함께 집이나 키예프 시 외곽의 별장에서 아마추어 연극을 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때는 아예 오페라 가수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1909년 키예프 의과대학에 진학함에 따라 이 꿈은 완전히 접는다. 의사였던 두 외삼촌과 훗날 양부가 되는 이반 파블로비치 보스크레센스키의 권유에 따른 결정이었다. 의사로서의 경험은 훗날 불가코프가 작가로 전업한 이후 역시 의사였던 안톤 체호프와 비켄티 베렌사예프를 문학적 전범으로 삼게 되는 한 동기를 제공한다. 특히 후자와는 모스크바 시절에 친교를 맺기도 했다. 의대에 진학하면서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는 다위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불가코프의 누이 나댜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훗날의 양부 보스크레센스키의 무신론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며, 1910년부터는 가족들과 종교적 견해를 달리하여 가족과 격렬한 언쟁을 자주 벌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의대생으로서의 학업도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불가코프가 의학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음에도 이리 된데는 사라코프 출신의 타치아나 니콜라예브나 라파라는 여성과의 관계 탓이 컸다. 여기에 불가코프가 습작 활동을 틈틈히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활동하는데 거의 마음을 굳히고 말았다. 불가코프의 누이 나댜에 따르면 1912년에 불가코프가 자신의 단편 몇 편을 보여주더니 그 이전에 작가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쪽의 부모 모두 두 사람의 교제를 불안해하였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1913년 4월에 결혼한다. 3학년을 마친 뒤였다. 이후 잠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그 시간은 1914년 8월, 전쟁의 발발로 종말을 맞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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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 3남 4녀 중 장남. 1901년에 키예프 제1김나지움에 입학했을 때부터 고골, 알렉산드르 푸슈킨, 톨스토이, 레스토이, 살티코프-쉬체드린 등의 문학 작품에 심취하였다. 1906년에는 가족들이 안드레예브스키 언덕 13번지의 넓은 아파트로 이주한다. 이 집에서의 거주 경험은 훗날 『백위군』의 투르빈 가족이 거주하는 '알렉세예프스키 언덕 13번지'의 묘사에 반영되었다. 1907년에는 아버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가 48세의 나이에 신장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미하일 불가코프가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훗날 불가코프는 49세 때 같은 병을 앓게 된다. 부친의 사망 후 수입의 감소로 인해 가세는 기울어갔지만, 가족들 내의 삶은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불가코프보다 7세 연하였던 사촌 콘스탄틴을 비롯한 여러 사촌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집안에 생기를 더했고, 부친의 학계·교계 동료들의 도움을 통해 일곱 남매 모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예의 독서·음악·공연 취미도 지속했다. 특히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모두 40차례 이상 관람했을 정도로 열심히 관람했다. 단지 샤를 구노의 오페라만이 아니라 여러 극에서 메피스토펠레스로 출연했던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이나 레프 시비랴코프에도 관심을 가졌다. 샬리아핀은 소위 '메소드 연기'의 달인으로, 《파우스트》외에도 『돈 키호테』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였는데, 그가 메피스토펠레스로 분장을 하면 상대역 배우조차 정말로 공포에 떨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연기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메피스토펠레스가 순결한 마르게리트를 타락시키려고 자연의 힘을 구하는 장면 다음에 그는 무대 뒤쪽에 나무처럼 서 있었어요. 그래요, 진짜 나무 같았죠. 그런데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진 거에요. 어떻게 그랬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어요. 마치 흑마술 같았다니까요. 그런데 막이 끝날 즈음에 어떤 키 큰 존재(샬리아핀은 약 190cm였다)가 내 위로 나타나는가 싶더니 무서운 거미가 창문을 둘러싼 채 파우스트와 나를 포위하는 것 같은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페라가 아니고 현실 공포 상황이 벌어진 것이지요. 막이 내린 다음에야 메피스토펠레스는 샬리아핀으로 돌아왔어요. 그제야 한숨을 쉴 수 있었지요. 정말 샬리아핀의 연기는 마법 같은 놀라움이었습니다."[* 유형종, 「공포의 카리스마, 흑마술 같은 저음 - 표도르 샬리아핀」, 『불멸의 목소리』(서울: 시공사, 2006).] 또한 불가코프의 책상 앞에는 키예프의 유명한 베이스 시비랴코프가 메피스토펠레스로 분한 사진이 ‘꿈은 때로 현실이 된다’는 구절과 함께 걸려 있었다고 한다. 불가코프의 연극열은 단순 감상에 그치지 않고, 동생·친구들과 함께 집이나 키예프 시 외곽의 별장에서 아마추어 연극을 연출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한때는 아예 오페라 가수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1909년 키예프 의과대학에 진학함에 따라 이 꿈은 완전히 접는다. 의사였던 두 외삼촌과 훗날 양부가 되는 이반 파블로비치 보스크레센스키의 권유에 따른 결정이었다. 의사로서의 경험은 훗날 불가코프가 작가로 전업한 이후 역시 의사였던 안톤 체호프와 비켄티 베렌사예프를 문학적 전범으로 삼게 되는 한 동기를 제공한다. 특히 후자와는 모스크바 시절에 친교를 맺기도 했다. 의대에 진학하면서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이는 다위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불가코프의 누이 나댜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훗날의 양부 보스크레센스키의 무신론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며, 1910년부터는 가족들과 종교적 견해를 달리하여 가족과 격렬한 언쟁을 자주 벌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의대생으로서의 학업도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불가코프가 의학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음에도 이리 된데는 사라코프 출신의 타치아나 니콜라예브나 라파라는 여성과의 관계 탓이 컸다. 여기에 불가코프가 습작 활동을 틈틈히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활동하는데 거의 마음을 굳히고 말았다. 불가코프의 누이 나댜에 따르면 1912년에 불가코프가 자신의 단편 몇 편을 보여주더니 그 이전에 작가가 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쪽의 부모 모두 두 사람의 교제를 불안해하였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1913년 4월에 결혼한다. 3학년을 마친 뒤였다. 이후 잠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그 시간은 1914년 8월, 전쟁의 발발로 종말을 맞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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