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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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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로서의 전성기 === 젊은 시절 불가코프의 성격은 썩 좋지 못했던 것 같다. 불가코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인 편이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겨진 일기들은 불가코프가 특히 건강을 심각하게 염려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그가 의사 출신으로서 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같은 병에 걸릴지도 못한다는 두려움, 류머티즘의 위험성 등의 영향도 컸다. 심지어 병이 급작스럽게 생길 것을 우려하여 혼자 있는 것을 매우 꺼려하였고, 길가에서 혼자 걷는 것엔 거의 공포까지 가졌다. 오늘날 알려진 교양 있는 신사로서의 이미지는 사실 말년에 가서야 형성된 것이다. 30세 이전의 불가코프는 뻔뻔할 정도로 자의식에 가득차고 드센, 그리고 무엇보다 대작가가 되고자 하는 야심에 불타는 젊은이였던 것 같다. 아울러, 이 때의 그는 상당한 애주가였다. 야심찬 작가이자 가장이었던 그는 자신의 야망 때문이나 생계 때문이나 글쓰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는 불가코프가 자신의 문학 세계를 상당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는다. 생계를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계속 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와중에 그 고유의 문학관이 정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두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저널리스트에서 본격적인 소설가/극작가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922년부터 24년까지는 베를린에서 발행되던 《전야》지에 22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 신문은 독일로 넘어간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만든 언론으로, 처음에는 볼셰비키 정부 또한 이 신문의 발행을 환영하였다. 이 당시에도 불가코프는 애초에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가졌던 혐오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 신문에 기고한 글들 또한 볼셰비키 정권과 레닌의 신 경제 정책을 풍자하고자 한 글들이었다. 훗날 기밀 해제된 KGB 비밀 문서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러시아의 정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923년 초에는 장차 유럽이 공산주의자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으로 양분될 것이라는 예견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 때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러시아 정교회는 이후 티콘 총대주교를 세우지만 계속되는 반종교 정책으로 인해, 사실상 볼셰비키 정권에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었다. 불가코프가 기고했던 또다른 신문은 철도 노조의 기관지였다. 이 신문에서 불가코프는 특유의 유머 글들을 기고하였고, 이 글들을 통해 1920년대 모스크바 문학계의 중요 인사로 떠올랐다. 훗날 불가코프 자신은 이 신문에 기고했던 유머러스한 글들이 시간 낭비였다며 평가절하했지만,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불가코프는 최소한 1920년대 중반까지 작가로서 인정받는다. 불가코프는 당대의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2년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 출신의 작가였던 비켄티 베레사예프가 불가코프의 『한 시골 의사의 수기』에 수록된 단편들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이 강연을 들은 불가코프는 그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후 베레사에프는 1920년대 초에 불가코프를 이리저리 후원하게 된다. 이외에도 불가코프는 숱한 문학 클럽 모임에 참여하였으며, 당대의 신작들을 찾아 읽었다. 또한 19세기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을 특히 탐독하며 그를 문학적 전범으로 삼았다. 특히 예브게니 쟈마찐으로부터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구성 장치와 세태에 뿌리를 둔 판타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던 중편 「디아볼리아다」, 그리고 「치치코프의 모험」이 고골의 『죽은 혼』에서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었다. 여기에 『비운의 달걀』(1925)에는 허버트 조지 웰즈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SF적 기법을 빌려 소비에트의 과학 정책을 풍자하고자 했던 이 작품은 소비에트의 검열을 받아, 1987년에야 정식 출간이 허용된다. 그러나 1923년에는 『투르빈 형제들』과 『물라의 아들들』이 여전히 상영되고 있었음에도 돌연 이 두 작품을 포함한 다섯 작품의 원고를 태워버린 바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회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던듯 싶다. 이후 『물라의 아이들』은 1960년대에 사본이 발견됨으로서 복원되지만, 『투르빈 형제들』은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투르빈 형제들』은 1905년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불가코프가 자신의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처음 시도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훗날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원고도 태워버리는데, 이 두 가지 일화는 다시 쓰여진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거장이 원고를 태우고, 볼란드가 그 원고를 복원해주는 장면으로 삽입된다. 1924년에는 타치아나와의 생활을 청산하고 두 번째 아내 류보프 벨로제르스카야와 결혼한다. 1925년 초에는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1924년에 발표했던 첫 장편 소설 『백위군』은 당시 문학계의 주요 인사였던 시인 막시밀리안 볼로신으로부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라는 격찬까지 받았고, 중편집 『디아볼리아다』도 막 출간될 예정이었다. 류보프와의 결혼까지 원만하게 해결되는 상황에서 불가코프는 1925년 4월 3일,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부터 비밀리에 섭외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 예술극장 감독이었던 보리스 베르실로프는 불가코프에게 『백위군』의 각색을 요청한다. 이 당시 보리스 베르실로프는 물론이고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어느 누구도 소설 『백위군』 전체를 읽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백위군』은 1924년 12월에야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 자체는 불가코프의 구미에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해 1월부터 연극 버전 『백위군』의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불가코프는 그 자신이 1923년에 불태워버렸던 『투르빈 형제들』의 내용을 더하여 연극 『백위군』의 각색을 시도한다. 이 당시 불가코프가 얼마나 환희에 차 있었는지는 훗날의 미완성작 《Театральный роман》(Theatrical Novel, 1936~1939)에 잘 드러나 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뒤 쓴 회고담격인 이 소설에서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 처음 들렀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약 30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객석(auditorium)에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 두 개의 램프가 희미차게 탔고, 막은 열려 있었으며 무대는 내 입을 딱 벌어지게 했다. 무대는 장엄했으며 신비로웠고 적막했다. 어둠이 가장자리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중앙에서는 황금말의 형상이 다리를 감춘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여기가 내 세계군..." 나는 내가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며 속삭였다. 여기서 말하는 '황금말의 형상'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엠블렘인 '체호프의 갈매기'를 패러디한 것으로서, 극장 막에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불가코프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관계는 첫 만남 때의 호의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일단 『백위군』의 각색 작업부터가 쉽지 않았다. 불가코프가 이 분야의 초짜가 아니었음에도 각색 작업은 난항을 겪었는데, 모스크바 예술 극장 측의 요구와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불가코프는 1925년 9월에 『백위군』의 첫 각색을 마친다. 그러나 극장 측은 5부작으로 구성된 희곡을 극장에서 하루만에 공연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보낸다. 불가코프가 10월에 바실리 류츠스키(Luzhsky)에게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극장 측의 혹평에 꽤나 분개했던 듯 싶다. 처음에는 자신의 원고를 관철하고자 했지만 극장 측이 불가코프의 틀어진 감정을 잘 달랜 결과 결국 4부작으로의 재각색에 들어간다. 각색된 희곡으로 6개월간의 리허설을 하지만 드레스 리허설에 들어갔을 때 상연 가능 공연 목록을 관장하는 레퍼토리 총국이 이 연극에 제동을 건다. 불가코프와 레퍼토리 총국 간의 평생에 걸친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레퍼토리 총국은 희곡 『백위군』에 백위군을 옹호하는 혐의가 있다며 상연 불가 처분을 내린다. 불가코프는 격한 항의문을 보내지만 결국 상당 수준의 각색을 강요당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가 유태인을 고문하는 장면이 삭제당하고 엔딩 또한 친 볼셰비키적으로 각색당한다. 또한 공연이 마무리 될 때는 인터내셔널가가 연주되며 막이 내려야 했다. 또한 백위군을 연상시키는 '백'이라는 글자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제목 또한 『투르빈네의 날들』로 개명당한다. 막상 상연된 『투르빈네의 날들』은 큰 성공을 거둔다. 스탈린 또한 《투르빈네의 날들》을 대단히 호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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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로서의 전성기 === 젊은 시절 불가코프의 성격은 썩 좋지 못했던 것 같다. 불가코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성미가 급하고 신경질적인 편이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남겨진 일기들은 불가코프가 특히 건강을 심각하게 염려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그가 의사 출신으로서 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같은 병에 걸릴지도 못한다는 두려움, 류머티즘의 위험성 등의 영향도 컸다. 심지어 병이 급작스럽게 생길 것을 우려하여 혼자 있는 것을 매우 꺼려하였고, 길가에서 혼자 걷는 것엔 거의 공포까지 가졌다. 오늘날 알려진 교양 있는 신사로서의 이미지는 사실 말년에 가서야 형성된 것이다. 30세 이전의 불가코프는 뻔뻔할 정도로 자의식에 가득차고 드센, 그리고 무엇보다 대작가가 되고자 하는 야심에 불타는 젊은이였던 것 같다. 아울러, 이 때의 그는 상당한 애주가였다. 야심찬 작가이자 가장이었던 그는 자신의 야망 때문이나 생계 때문이나 글쓰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는 불가코프가 자신의 문학 세계를 상당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는다. 생계를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계속 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와중에 그 고유의 문학관이 정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두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면서 저널리스트에서 본격적인 소설가/극작가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1922년부터 24년까지는 베를린에서 발행되던 《전야》지에 22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 신문은 독일로 넘어간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만든 언론으로, 처음에는 볼셰비키 정부 또한 이 신문의 발행을 환영하였다. 이 당시에도 불가코프는 애초에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가졌던 혐오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이 신문에 기고한 글들 또한 볼셰비키 정권과 레닌의 신 경제 정책을 풍자하고자 한 글들이었다. 훗날 기밀 해제된 KGB 비밀 문서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러시아의 정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923년 초에는 장차 유럽이 공산주의자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으로 양분될 것이라는 예견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졌다. 러시아 혁명 때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러시아 정교회는 이후 티콘 총대주교를 세우지만 계속되는 반종교 정책으로 인해, 사실상 볼셰비키 정권에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었다. 불가코프가 기고했던 또다른 신문은 철도 노조의 기관지였다. 이 신문에서 불가코프는 특유의 유머 글들을 기고하였고, 이 글들을 통해 1920년대 모스크바 문학계의 중요 인사로 떠올랐다. 훗날 불가코프 자신은 이 신문에 기고했던 유머러스한 글들이 시간 낭비였다며 평가절하했지만,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불가코프는 최소한 1920년대 중반까지 작가로서 인정받는다. 불가코프는 당대의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22년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 출신의 작가였던 비켄티 베레사예프가 불가코프의 『한 시골 의사의 수기』에 수록된 단편들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이 강연을 들은 불가코프는 그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후 베레사에프는 1920년대 초에 불가코프를 이리저리 후원하게 된다. 이외에도 불가코프는 숱한 문학 클럽 모임에 참여하였으며, 당대의 신작들을 찾아 읽었다. 또한 19세기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을 특히 탐독하며 그를 문학적 전범으로 삼았다. 특히 예브게니 쟈마찐으로부터 영화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구성 장치와 세태에 뿌리를 둔 판타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던 중편 「디아볼리아다」, 그리고 「치치코프의 모험」이 고골의 『죽은 혼』에서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었다. 여기에 『비운의 달걀』(1925)에는 허버트 조지 웰즈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SF적 기법을 빌려 소비에트의 과학 정책을 풍자하고자 했던 이 작품은 소비에트의 검열을 받아, 1987년에야 정식 출간이 허용된다. 그러나 1923년에는 『투르빈 형제들』과 『물라의 아들들』이 여전히 상영되고 있었음에도 돌연 이 두 작품을 포함한 다섯 작품의 원고를 태워버린 바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소비에트 사회에 대한 회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던듯 싶다. 이후 『물라의 아이들』은 1960년대에 사본이 발견됨으로서 복원되지만, 『투르빈 형제들』은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투르빈 형제들』은 1905년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불가코프가 자신의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처음 시도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훗날 불가코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원고도 태워버리는데, 이 두 가지 일화는 다시 쓰여진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거장이 원고를 태우고, 볼란드가 그 원고를 복원해주는 장면으로 삽입된다. 1924년에는 타치아나와의 생활을 청산하고 두 번째 아내 류보프 벨로제르스카야와 결혼한다. 1925년 초에는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1924년에 발표했던 첫 장편 소설 『백위군』은 당시 문학계의 주요 인사였던 시인 막시밀리안 볼로신으로부터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라는 격찬까지 받았고, 중편집 『디아볼리아다』도 막 출간될 예정이었다. 류보프와의 결혼까지 원만하게 해결되는 상황에서 불가코프는 1925년 4월 3일,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으로부터 비밀리에 섭외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 예술극장 감독이었던 보리스 베르실로프는 불가코프에게 『백위군』의 각색을 요청한다. 이 당시 보리스 베르실로프는 물론이고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어느 누구도 소설 『백위군』 전체를 읽어보지 못한 상태였다. 『백위군』은 1924년 12월에야 연재를 시작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 자체는 불가코프의 구미에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해 1월부터 연극 버전 『백위군』의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불가코프는 그 자신이 1923년에 불태워버렸던 『투르빈 형제들』의 내용을 더하여 연극 『백위군』의 각색을 시도한다. 이 당시 불가코프가 얼마나 환희에 차 있었는지는 훗날의 미완성작 《Театральный роман》(Theatrical Novel, 1936~1939)에 잘 드러나 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뒤 쓴 회고담격인 이 소설에서 불가코프는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 처음 들렀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약 300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객석(auditorium)에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 두 개의 램프가 희미차게 탔고, 막은 열려 있었으며 무대는 내 입을 딱 벌어지게 했다. 무대는 장엄했으며 신비로웠고 적막했다. 어둠이 가장자리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중앙에서는 황금말의 형상이 다리를 감춘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여기가 내 세계군..." 나는 내가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며 속삭였다. 여기서 말하는 '황금말의 형상'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엠블렘인 '체호프의 갈매기'를 패러디한 것으로서, 극장 막에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불가코프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관계는 첫 만남 때의 호의적인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일단 『백위군』의 각색 작업부터가 쉽지 않았다. 불가코프가 이 분야의 초짜가 아니었음에도 각색 작업은 난항을 겪었는데, 모스크바 예술 극장 측의 요구와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불가코프는 1925년 9월에 『백위군』의 첫 각색을 마친다. 그러나 극장 측은 5부작으로 구성된 희곡을 극장에서 하루만에 공연하기는 힘들다는 의견을 보낸다. 불가코프가 10월에 바실리 류츠스키(Luzhsky)에게 보냈던 편지에 따르면 불가코프는 극장 측의 혹평에 꽤나 분개했던 듯 싶다. 처음에는 자신의 원고를 관철하고자 했지만 극장 측이 불가코프의 틀어진 감정을 잘 달랜 결과 결국 4부작으로의 재각색에 들어간다. 각색된 희곡으로 6개월간의 리허설을 하지만 드레스 리허설에 들어갔을 때 상연 가능 공연 목록을 관장하는 레퍼토리 총국이 이 연극에 제동을 건다. 불가코프와 레퍼토리 총국 간의 평생에 걸친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레퍼토리 총국은 희곡 『백위군』에 백위군을 옹호하는 혐의가 있다며 상연 불가 처분을 내린다. 불가코프는 격한 항의문을 보내지만 결국 상당 수준의 각색을 강요당해야 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가 유태인을 고문하는 장면이 삭제당하고 엔딩 또한 친 볼셰비키적으로 각색당한다. 또한 공연이 마무리 될 때는 인터내셔널가가 연주되며 막이 내려야 했다. 또한 백위군을 연상시키는 '백'이라는 글자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제목 또한 『투르빈네의 날들』로 개명당한다. 막상 상연된 『투르빈네의 날들』은 큰 성공을 거둔다. 스탈린 또한 《투르빈네의 날들》을 대단히 호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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