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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불가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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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정착 === 내전이 끝난 이때부터 불가코프는 아내와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다만 불가코프가 모스크바로 향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불가코프는 내전 때 헤어진 가족들을 그리워하였고, 망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모스크바행도 한달 앞서 아내를 미리 보내놓고는 계속해서 망명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선택한 길이었다. 정착 무렵의 상황을 불가코프는 3년 뒤의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1년말에 여기에 영원히 살아 남으려고 돈도 없이, 물건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김규종, 「극작가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끼와 미하일 불가꼬프의 대화」, 『러시아연구』10호(서울: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000), 22쪽에서 재인용.] 이들의 모스크바 정착은 순탄치 못했다. 특히 1921년 겨울에는 극심한 혹한이 몰아쳐 거의 죽을 고비에 놓이기까지 했다. 이 위기는 불가코프의 처남인 안드레이 젬스키가 방 한 칸을 빌려주어 간신히 넘긴다. 이곳이 바로 파트리아르흐 연못가 근처의 사도바야 거리 10번지였다. 그러나 불가코프는 이 공동 아파트에서의 생활을 진심으로 혐오하였다. 이 아파트에서 불가코프는 다시 한번 문화 교양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불가코프는 훗날 자신의 작품에 알코올 중독자, 아내 구타자 등 아파트의 주민들에서 연상한 풍자적인 캐릭터들을 많이 남겼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안누시카, 주민조합장 니카노르 이바노비치 보소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생활 수준 또한 빈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키예프의 지인들도 거의 연락이 끊긴데다가 내전의 여파 때문에 수도 모스크바조차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거의 빈손으로 모스크바에 오다시피 한 불가코프 부부로서는 내전 전 키예프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부르주아적 삶을 꿈꿀수조차 없었다. 이에 불가코프는 글을 써서 돈을 벌어보려고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또한 쉽지 않았다. 첫 직장이었던 문화부 문학지국에서는 부서가 통폐합되는 바람에 얼마 못가 해고당했고, 이어 들어간 신문사에서는 신문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역시 쫓겨났다. 특히 1922년 초에는 그해 1월에 어머니가 티푸스로 사망했었다는 소식마저 듣는다. 이는 훗날 첫 장편인 『백위군』의 첫 장면이 투르빈네 가족의 어머니 장례식으로 시작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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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정착 === 내전이 끝난 이때부터 불가코프는 아내와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다만 불가코프가 모스크바로 향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불가코프는 내전 때 헤어진 가족들을 그리워하였고, 망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모스크바행도 한달 앞서 아내를 미리 보내놓고는 계속해서 망명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선택한 길이었다. 정착 무렵의 상황을 불가코프는 3년 뒤의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1년말에 여기에 영원히 살아 남으려고 돈도 없이, 물건도 없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김규종, 「극작가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끼와 미하일 불가꼬프의 대화」, 『러시아연구』10호(서울: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000), 22쪽에서 재인용.] 이들의 모스크바 정착은 순탄치 못했다. 특히 1921년 겨울에는 극심한 혹한이 몰아쳐 거의 죽을 고비에 놓이기까지 했다. 이 위기는 불가코프의 처남인 안드레이 젬스키가 방 한 칸을 빌려주어 간신히 넘긴다. 이곳이 바로 파트리아르흐 연못가 근처의 사도바야 거리 10번지였다. 그러나 불가코프는 이 공동 아파트에서의 생활을 진심으로 혐오하였다. 이 아파트에서 불가코프는 다시 한번 문화 교양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불가코프는 훗날 자신의 작품에 알코올 중독자, 아내 구타자 등 아파트의 주민들에서 연상한 풍자적인 캐릭터들을 많이 남겼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안누시카, 주민조합장 니카노르 이바노비치 보소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생활 수준 또한 빈약하기 이를데 없었다. 키예프의 지인들도 거의 연락이 끊긴데다가 내전의 여파 때문에 수도 모스크바조차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거의 빈손으로 모스크바에 오다시피 한 불가코프 부부로서는 내전 전 키예프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부르주아적 삶을 꿈꿀수조차 없었다. 이에 불가코프는 글을 써서 돈을 벌어보려고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또한 쉽지 않았다. 첫 직장이었던 문화부 문학지국에서는 부서가 통폐합되는 바람에 얼마 못가 해고당했고, 이어 들어간 신문사에서는 신문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역시 쫓겨났다. 특히 1922년 초에는 그해 1월에 어머니가 티푸스로 사망했었다는 소식마저 듣는다. 이는 훗날 첫 장편인 『백위군』의 첫 장면이 투르빈네 가족의 어머니 장례식으로 시작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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