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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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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1839
=== 유년 시절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 출생.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목포에서 생활했다. 아버지는 충청 이남의 양약 공급을 장악할 정도로 성공한 양약 도매업자였으며, 김현 또한 대체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훗날 주목을 받았던 그의 다독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 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의 소설책들을 거의 다 읽어 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은 성큼성큼 뛰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 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은 것이었다.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 가지고 먹어 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김현「책읽기의 즐거움과 괴로움」, 『책읽기의 괴로움/살아 있는 시들』(서울:문학과지성사, 1992).]||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의 경기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지만 떨어지고, 목포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이것으로 김현의 전라도 생활은 종지부를 찍지만, 전라도 출신이라는 자각은 김현 스스로 이름붙인 '4·19세대'라는 개념과 함께 김현의 의식을 규정짓는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김인환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이 어느 술자리에선가 "전라도라는 것은 원죄(原罪)야"하며 웃더라는 일화가 전해온다.[* 김인환, 「글쓰기의 지형학-김현론」, 『문학과 사회』Vol.3, 문학과지성사, 1988.] 김현 자신도 어느 글에선가 호남 사투리를 쓰는 자신을 서울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바람에 하숙집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과거를 회상한 바 있다. 또한 그가 르네 지라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1980년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 김현, 『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서울:문학과지성사, 1992), 19p] 때문이었다. 특히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희생양』과 같은 저서에서 분석했던 폭력의 구조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듯.[* 민노씨, 「[[http://minoci.net/857|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2009년 5월 18일.] 어떤 의미에서는 푸코에 대한 관심도 그러하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문예부에 가입해 부장까지 했다. 고등학교 2년 후배였던 황석영이 문예부에 가입하지도 않았으면서 문예부실이 몰래 담배피기 좋은 장소라는 이유로 숨어들어 담배피는 것을 적발하기도 했었다. 김현도 털털한 성격인데다가 이미 학원문학상, 경복 교내 문학상 등의 공모전에서 입상한 적이 있는 황석영을 알고 있어서 '나도 한 까치 줘봐' 하는 데서 끝났다고 한다. 이외에 고등학생 때 이미 김지하하고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불문과 60학번)에 진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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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 시절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 출생.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목포에서 생활했다. 아버지는 충청 이남의 양약 공급을 장악할 정도로 성공한 양약 도매업자였으며, 김현 또한 대체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훗날 주목을 받았던 그의 다독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 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의 소설책들을 거의 다 읽어 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은 성큼성큼 뛰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 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은 것이었다.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 가지고 먹어 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김현「책읽기의 즐거움과 괴로움」, 『책읽기의 괴로움/살아 있는 시들』(서울:문학과지성사, 1992).]||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의 경기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지만 떨어지고, 목포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이것으로 김현의 전라도 생활은 종지부를 찍지만, 전라도 출신이라는 자각은 김현 스스로 이름붙인 '4·19세대'라는 개념과 함께 김현의 의식을 규정짓는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김인환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이 어느 술자리에선가 "전라도라는 것은 원죄(原罪)야"하며 웃더라는 일화가 전해온다.[* 김인환, 「글쓰기의 지형학-김현론」, 『문학과 사회』Vol.3, 문학과지성사, 1988.] 김현 자신도 어느 글에선가 호남 사투리를 쓰는 자신을 서울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바람에 하숙집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과거를 회상한 바 있다. 또한 그가 르네 지라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1980년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 김현, 『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서울:문학과지성사, 1992), 19p] 때문이었다. 특히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희생양』과 같은 저서에서 분석했던 폭력의 구조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듯.[* 민노씨, 「[[http://minoci.net/857|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2009년 5월 18일.] 어떤 의미에서는 푸코에 대한 관심도 그러하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문예부에 가입해 부장까지 했다. 고등학교 2년 후배였던 황석영이 문예부에 가입하지도 않았으면서 문예부실이 몰래 담배피기 좋은 장소라는 이유로 숨어들어 담배피는 것을 적발하기도 했었다. 김현도 털털한 성격인데다가 이미 학원문학상, 경복 교내 문학상 등의 공모전에서 입상한 적이 있는 황석영을 알고 있어서 '나도 한 까치 줘봐' 하는 데서 끝났다고 한다. 이외에 고등학생 때 이미 김지하하고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불문과 60학번)에 진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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