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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光南(1), 1942년 7월 29일 ~ 1990년 6월 27일
한국의 문학비평가이자 불문학자. 김현은 필명으로 본명은 김광남이다. 국내에 바슐라르, 사르트르, 지라르, 푸코, 프로이트 등의 프랑스 문학이론을 소개하였으며 특히 그가 푸코에 대해 썼던 책은 국내에서 출간된 최초의 '읽을 만한' 푸코 입문서로 평가된다. 또한 문학비평을 통해 한국문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물. 한국 문단에서 문학 비평을 작품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장르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이다.
목차
1. 생애
1.1. 유년 시절
1.2. 대학 생활
1.2.1. 인간관계
1.2.2. 문학사관의 형성
1.2.3. 산문시대에서 문지까지
1.3. 학자 생활
1.3.1. 60년대 후반 : 학자 생활의 시작
1.3.2. 70년대 초반
1.3.3. 프랑스 유학
1.3.4. 귀국 후
1.4. 사망
2. 평가
2.1. 문학자
2.1.1. 프랑스 이론 수입상
2.1.2. '추한' 전통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한 문학사가
2.2. 현장 비평가
2.2.1. 당대 문학에 대한 애정
2.2.2. 미문가
2.3. 4·19세대 이론가
2.3.1. 앞세대 문단과의 단절
2.3.2. 창비와의 대결 의식
2.4. 자유주의자 : 해방을 위한 엘리트적·탈제도적 문학
2.4.1. 문학적 엘리트주의자
2.4.2. 자유주의자
3. 가십
4. 김현 전집
5. 참고
6. 영상
1. 생애
1.1. 유년 시절
1.2. 대학 생활
1.2.1. 인간관계
1.2.2. 문학사관의 형성
1.2.3. 산문시대에서 문지까지
1.3. 학자 생활
1.3.1. 60년대 후반 : 학자 생활의 시작
1.3.2. 70년대 초반
1.3.3. 프랑스 유학
1.3.4. 귀국 후
1.4. 사망
2. 평가
2.1. 문학자
2.1.1. 프랑스 이론 수입상
2.1.2. '추한' 전통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한 문학사가
2.2. 현장 비평가
2.2.1. 당대 문학에 대한 애정
2.2.2. 미문가
2.3. 4·19세대 이론가
2.3.1. 앞세대 문단과의 단절
2.3.2. 창비와의 대결 의식
2.4. 자유주의자 : 해방을 위한 엘리트적·탈제도적 문학
2.4.1. 문학적 엘리트주의자
2.4.2. 자유주의자
3. 가십
4. 김현 전집
5. 참고
6. 영상
1. 생애 ✎ ⊖
1.1. 유년 시절 ✎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 출생.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목포에서 생활했다. 아버지는 충청 이남의 양약 공급을 장악할 정도로 성공한 양약 도매업자였으며, 김현 또한 대체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훗날 주목을 받았던 그의 다독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의 경기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지만 떨어지고, 목포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이것으로 김현의 전라도 생활은 종지부를 찍지만, 전라도 출신이라는 자각은 김현 스스로 이름붙인 '4·19세대'라는 개념과 함께 김현의 의식을 규정짓는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김인환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이 어느 술자리에선가 "전라도라는 것은 원죄(原罪)야"하며 웃더라는 일화가 전해온다.(3) 김현 자신도 어느 글에선가 호남 사투리를 쓰는 자신을 서울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바람에 하숙집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과거를 회상한 바 있다. 또한 그가 르네 지라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1980년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4) 때문이었다. 특히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희생양』과 같은 저서에서 분석했던 폭력의 구조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듯.(5) 어떤 의미에서는 푸코에 대한 관심도 그러하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문예부에 가입해 부장까지 했다. 고등학교 2년 후배였던 황석영이 문예부에 가입하지도 않았으면서 문예부실이 몰래 담배피기 좋은 장소라는 이유로 숨어들어 담배피는 것을 적발하기도 했었다. 김현도 털털한 성격인데다가 이미 학원문학상, 경복 교내 문학상 등의 공모전에서 입상한 적이 있는 황석영을 알고 있어서 '나도 한 까치 줘봐' 하는 데서 끝났다고 한다. 이외에 고등학생 때 이미 김지하하고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불문과 60학번)에 진학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 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의 소설책들을 거의 다 읽어 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은 성큼성큼 뛰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 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은 것이었다.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 가지고 먹어 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2) |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의 경기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지만 떨어지고, 목포에 진학했다가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이것으로 김현의 전라도 생활은 종지부를 찍지만, 전라도 출신이라는 자각은 김현 스스로 이름붙인 '4·19세대'라는 개념과 함께 김현의 의식을 규정짓는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김인환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이 어느 술자리에선가 "전라도라는 것은 원죄(原罪)야"하며 웃더라는 일화가 전해온다.(3) 김현 자신도 어느 글에선가 호남 사투리를 쓰는 자신을 서울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바람에 하숙집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과거를 회상한 바 있다. 또한 그가 르네 지라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1980년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4) 때문이었다. 특히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이나 『희생양』과 같은 저서에서 분석했던 폭력의 구조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듯.(5) 어떤 의미에서는 푸코에 대한 관심도 그러하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문예부에 가입해 부장까지 했다. 고등학교 2년 후배였던 황석영이 문예부에 가입하지도 않았으면서 문예부실이 몰래 담배피기 좋은 장소라는 이유로 숨어들어 담배피는 것을 적발하기도 했었다. 김현도 털털한 성격인데다가 이미 학원문학상, 경복 교내 문학상 등의 공모전에서 입상한 적이 있는 황석영을 알고 있어서 '나도 한 까치 줘봐' 하는 데서 끝났다고 한다. 이외에 고등학생 때 이미 김지하하고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대학교(불문과 60학번)에 진학한다.
1.2. 대학 생활 ✎ ⊖
1.2.1. 인간관계 ✎ ⊖
대학 시절에는 김화영, 유평근. 김치수, 김승옥, 곽광수, 조동일, 김주연, 이청준, 염무웅, 박태순, 김지하 등 문리대 선·후배·동기들과 교류한다. 이중 이청준은 김승옥의 자취방에서 만난 사이였다고 한다.
신입생이던 1960년에는 2학기의 교양 과목 강사로 들어온 26세의 이어령에게 "교수님. 나이 차이가 열 살이 안 되면 벗 삼아도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농을 걸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지난 학기에 어느 노시인 강사가 강의를 부실하게 한다는 이유로 보이콧당한 바 있어 강사들이 긴장하던 상황이었다. 해서 처음에는 그 진의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이어령이 이내 농담임을 깨닫고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하며 웃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단순히 신입생의 치기 어린 장난만이 아니라, 서로 말을 높이면 벽이 생겨 관계가 원만해지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던 듯 보인다. 훗날 김현은 ‘문학과 지성’과 관계를 맺은 모든 문인에게 서로 말을 틀 것을 '강요'했다. 26세의 나이에 김동리의 강권으로 맡았던 강의를 인연으로 알게 된 문지 소속 문인 제자들에게 마찬가지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문지 내의 다른 문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가 형성되길 바랐다. 자신보다 연상이었던 김주연, 김병익 등에게도 시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지만 다섯살 위인 문인들에게는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김현의 '말 트기 주의'는 수포로 돌아간다.
신입생이던 1960년에는 2학기의 교양 과목 강사로 들어온 26세의 이어령에게 "교수님. 나이 차이가 열 살이 안 되면 벗 삼아도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농을 걸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지난 학기에 어느 노시인 강사가 강의를 부실하게 한다는 이유로 보이콧당한 바 있어 강사들이 긴장하던 상황이었다. 해서 처음에는 그 진의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이어령이 이내 농담임을 깨닫고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하며 웃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단순히 신입생의 치기 어린 장난만이 아니라, 서로 말을 높이면 벽이 생겨 관계가 원만해지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던 듯 보인다. 훗날 김현은 ‘문학과 지성’과 관계를 맺은 모든 문인에게 서로 말을 틀 것을 '강요'했다. 26세의 나이에 김동리의 강권으로 맡았던 강의를 인연으로 알게 된 문지 소속 문인 제자들에게 마찬가지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문지 내의 다른 문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가 형성되길 바랐다. 자신보다 연상이었던 김주연, 김병익 등에게도 시도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지만 다섯살 위인 문인들에게는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김현의 '말 트기 주의'는 수포로 돌아간다.
1.2.2. 문학사관의 형성 ✎ ⊖
대학 시절, YWCA에서 진행하던 함석헌의 역사 강의를 듣는다. 함석헌이 워낙 왕성한 강연 활동을 벌였던 만큼, 김현만이 유별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사를 고통과 그 극복으로 보는 함석헌의 사관은 김현의 문학사관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 훗날의 김현이 전통 문학의 빈약한 성과들을 혐오하였으며 거의 자학적으로 보이리만큼 문학사 편찬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 또한 함석헌의 영향으로 보인다.
1.2.3. 산문시대에서 문지까지 ✎ ⊖
《자유문학》 1962년 3월호에 「나르시스 시론」이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 때부터 김현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동료들과 함께 《산문시대》를 조직한다. 헌데 이 시절에 대한 산문시대 동인들에 대한 회고는 조금씩 다르다. 김치수에 따르면 '산문시대' 결성은 철저하게 김현에 의해 주도되었다. 1962년 당시의 김현은, 그 자신이 평론으로 문단에 데뷔를 했음에도 기존 문학지들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운영 때문에 그들의 문학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적인 욕구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6)
김승옥에 따르면 신문시대 결성은 김현과 김치수가 주도했다. 그는 김현과 김치수를 "불어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린 교수 지망생"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7) 대학 3학년 때에 이르러서 김현이 《자유문학》 평론 부문에서 당선되고 김승옥 자신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에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 아울러 김승옥은 산문시대의 출간에 김현의 아버지가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김현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증언을 해주고 있다.
김승옥 이후에 김현에 의해 영입된 최하림 ─ 그는 김현의 고향 친구였다 ─ 의 회고에 따르면 《산문시대》는 원래 당시 대부분의 동인지들이 그러하듯 타이프를 쳐서 등사기로 인쇄 할 예정이었다. 집안이 부유했던 김현이 타이프 일을 맡을 여성까지 구하였다. 그런데 최하림이 차라리 정식 인쇄물로 내자는 견해를 내자 '학생의 상업 행위'에 거부감을 느낀 김치수가 탈퇴, 최초에는 세명만으로 운영된다. 이후 전주 가림출판사의 김종배 사장이 인쇄비를 무료로 해주고 제본 방법을 가르쳐주는 호의를 베푼다. 이후 김치수, 염무웅, 곽광수, 강호무, 서정인이 합류하였다.
1964년에는 첫 평론집인 『존재와 언어』를 500부 한정판으로 찍었고, 고은, 황동규, 정현종, 박상륭 등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김현은 이들과 단순 친구로서 교류하는 정도를 넘어 문학 동인 '산문시대'(62년), '사계'(66년) 등의 결성을 주도하는 등, 이 인맥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8년에는 '산문시대'와 '사계'의 주력 멤버들을 끌어들여 이른바 '4·19세대'가 대거 참여하는 동인 '68그룹'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성과에 바탕하여 1970년에는 문학 계간지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다. 이 계간지는 문학과지성사의 모태가 된다. 《문학과 지성》은 당시 이미 나오던 《창작과 비평》(현 창비)이 주창해온 참여문학론에 맞서기 위한 잡지였다. 순수문학론을 옹호해왔던 김현은 오래전부터 창비에 견줄만한 동인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왔으며, 불문과 동기인 김치수와 김병익 등에게 참여를 권유하여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승옥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대신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문학과 지성'이라는 제호도 김현이 지었다. 김병익의 고교 동창인 황인철 변호사의 도움으로 자금 문제까지 해결된 뒤에는 다방 '비봉'(현 교보빌딩 터)에서 업무를 보았는데, 이 때의 모임도 늘 김현이 주도했다.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주연이 이듬해인 1971년에 합류함에 따라 이른바 '문지 4인방' 혹은 '4K' 시대가 열린다.
김승옥에 따르면 신문시대 결성은 김현과 김치수가 주도했다. 그는 김현과 김치수를 "불어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린 교수 지망생"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7) 대학 3학년 때에 이르러서 김현이 《자유문학》 평론 부문에서 당선되고 김승옥 자신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에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 아울러 김승옥은 산문시대의 출간에 김현의 아버지가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김현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증언을 해주고 있다.
김승옥 이후에 김현에 의해 영입된 최하림 ─ 그는 김현의 고향 친구였다 ─ 의 회고에 따르면 《산문시대》는 원래 당시 대부분의 동인지들이 그러하듯 타이프를 쳐서 등사기로 인쇄 할 예정이었다. 집안이 부유했던 김현이 타이프 일을 맡을 여성까지 구하였다. 그런데 최하림이 차라리 정식 인쇄물로 내자는 견해를 내자 '학생의 상업 행위'에 거부감을 느낀 김치수가 탈퇴, 최초에는 세명만으로 운영된다. 이후 전주 가림출판사의 김종배 사장이 인쇄비를 무료로 해주고 제본 방법을 가르쳐주는 호의를 베푼다. 이후 김치수, 염무웅, 곽광수, 강호무, 서정인이 합류하였다.
1964년에는 첫 평론집인 『존재와 언어』를 500부 한정판으로 찍었고, 고은, 황동규, 정현종, 박상륭 등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김현은 이들과 단순 친구로서 교류하는 정도를 넘어 문학 동인 '산문시대'(62년), '사계'(66년) 등의 결성을 주도하는 등, 이 인맥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8년에는 '산문시대'와 '사계'의 주력 멤버들을 끌어들여 이른바 '4·19세대'가 대거 참여하는 동인 '68그룹'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성과에 바탕하여 1970년에는 문학 계간지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다. 이 계간지는 문학과지성사의 모태가 된다. 《문학과 지성》은 당시 이미 나오던 《창작과 비평》(현 창비)이 주창해온 참여문학론에 맞서기 위한 잡지였다. 순수문학론을 옹호해왔던 김현은 오래전부터 창비에 견줄만한 동인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왔으며, 불문과 동기인 김치수와 김병익 등에게 참여를 권유하여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승옥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대신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문학과 지성'이라는 제호도 김현이 지었다. 김병익의 고교 동창인 황인철 변호사의 도움으로 자금 문제까지 해결된 뒤에는 다방 '비봉'(현 교보빌딩 터)에서 업무를 보았는데, 이 때의 모임도 늘 김현이 주도했다.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주연이 이듬해인 1971년에 합류함에 따라 이른바 '문지 4인방' 혹은 '4K' 시대가 열린다.
1.3. 학자 생활 ✎ ⊖
1.3.1. 60년대 후반 : 학자 생활의 시작 ✎ ⊖
1966년, 이휘영 교수의 지도 하에 「Le Vomissement de Céline - en comparison de la nausée de Sartre」(셀린느의 구토 - 사르트르의 구토와의 비교)라는 제목의 불문과 석사 학위 논문을 제출한다. 프랑스어로 제출된 논문이라 내용 확인이 어렵지만,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해 셀린느가 준 영향에 대해 규명한 논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오늘날에는 『구토』가 셀린느의 절대적 영향 하에 집필된 작품이라는 사실이 거의 정설로서 통용되고 있다.
김병익의 회고에 따르면 김현은 석사 학위 취득 후 대학원에 남아 계속 공부를 할 것인지 취직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 진로 고민은 김현이 66년 여름 즈음부터 『동아일보』에 시 월평을 실을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일단락된다. 당시 『동아일보』 문학부 기자로 근무하던 김병익이 주선한 결과였다. 김병익에 따르면 김현은 『동아일보』로부터 청탁을 받음으로써 자기 진로를 확고히 했다고 한다.(8) 김현은 이전에도 월간지 『세대』 등의 지면에 시 월평을 기고한 적이 있었지만, 일간지 기고는 『동아일보』가 최초였다.
김병익의 회고에 따르면 김현은 석사 학위 취득 후 대학원에 남아 계속 공부를 할 것인지 취직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이 진로 고민은 김현이 66년 여름 즈음부터 『동아일보』에 시 월평을 실을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일단락된다. 당시 『동아일보』 문학부 기자로 근무하던 김병익이 주선한 결과였다. 김병익에 따르면 김현은 『동아일보』로부터 청탁을 받음으로써 자기 진로를 확고히 했다고 한다.(8) 김현은 이전에도 월간지 『세대』 등의 지면에 시 월평을 기고한 적이 있었지만, 일간지 기고는 『동아일보』가 최초였다.
1.3.2. 70년대 초반 ✎ ⊖
김현은 1971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1973년에는 김윤식과 함께 『한국문학사』를 선보인다. 한국 근대 문학의 시작을 영·정조 시대로 끌어올린 예외적인 저작이었다. 이 저작 이후로는 이러한 관점을 계승한 국문학자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한국문학사』의 독특함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문학사의 책을 '국문학사'가 아닌 '한국문학사'라고 지었다는 사실은 김현의 탈민족주의적 문학사관을 드러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후 김현의 한국문학사 작업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70년대 후반에 계속된다.
1.3.3. 프랑스 유학 ✎ ⊖
1974년 10월 2일, 몇 달 앞서 떠난 김치수에 이어 프랑스 북부 스트라스부르로 유학을 떠난다. 1971년에 미셸 망수이 교수에게 그의 밑에서 1년 정도 바슐라르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 뒤 답장을 받은 결과였다. 김현은 미셸 망수이의 『바슐라르와 4원소』를 읽은 후 프랑스 유학 결정을 내렸었으며, 미셸 망수이 교수는 - 김현 자신이 들었다는 내용에 따르면 - 바슐라르의 4원소 철학을 동양인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기 위해 김현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프랑스로 향하는 과정에서 김현은 홍콩, 방콕, 로마에서 하루씩 머문다. 홍콩에서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으나 방콕의 불교 문화와 로마의 기독교 문화에 대해서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김현은 스스로 "문화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 중의 하나"(A)24쪽라고 불렀던 종교를 통하여 한국의 전통에 대해 되새길 기회를 갖는다. 즉 세워진지 불과 수백년에 지나지 않는 불교 사원에서는 한국의 불국사 등보다 더욱 큰 전통의 힘이 느껴지며 로마의 대성당들이 콜로세움의 돌을 뜯어 만든 건물들이라는 것 등을 통해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전통을 세워 가고 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는 것이다. 김현이 불과 하루씩에 불과한 체류들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새로이 생각했다기보다는, 외국 여행을 통해 본인이 한국의 전통에 대해 본래 갖고 있던 생각을 다시 환기하였다는 것이 옳겠다.
프랑스에서 김현은 미셸 망수이 교수 아래 바슐라르 철학을 연구하는 한편으로 미셸 망수이 교수에게 한국의 시를 보여준다. 김현은 불교 색채가 강한 서정주의 「내가 돌이 되면」, 「동천」과 같은 시를 통해 미셸 망수이가 프랑스의 마약쟁이 시인 앙리 미쇼를 떠올린다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A)102쪽 또한 바슐라르를 문학사 연구에 적용할 수 있겠는지의 여부를 묻지만 일언지하에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듣는다.(A)107쪽
한편으로 김현은 폴 발레리, 알퐁스 도데 등 여러 프랑스 작가들과 관련된 장소를 여행한다. 1975년 1월 3일에는 세트에 있는 발레리의 묘지에 갔으며 1월 8일에는 클로드 시몽의 강연을 듣는다. 김현은 시몽의 강연에서 "예(例)의 세잔의 사과 얘기를 다시 들었다. 진력이 나도록 뻔한 소리를 두 시간 가까이 들었다."라며 짧게만 기술한다.(A)41쪽 날짜가 명확하지 않은 어느 날에는 롤랑 바르트가 유년 시절을 보낸 바이욘을 구경하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이 가장 공을 들여 살핀 작가는 역시 프랑스 유학의 본래 목적이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였다. 김현은 1974년 말부터 약 3개월간 바슐라르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1974년 12월 22일에는 바슐라르가 교수로 재직했던 디종 대학을 방문한다. 1975년 1월 28일에는 파리로 향해 바슐라르가 말년에 소르본 대학을 방문한 뒤 프랑스 라디오·텔레비전 공사의 문서 보관소에서 바슐라르의 1952년 강연 녹음을 들었다. 1975년 2월 5일에는 바슐라르의 고향 바르 쉬르 오브로 향해 바슐라르의 제자이자 바슐라르의 중학교 교사 시절 후배였던 베르나르 프리외르를 만나 바슐라르의 생가와 묘지를 방문한다. 김현의 바슐라르 관련지 답사는 「가스통 바슐라르를 찾아서」라는 글을 통해 정리되었다.(A)81~97쪽
당초 1년을 예정하였으나 8개월 만에 귀국한다. 김현은 이른 귀국을 아내의 병환 탓이라고 설명했으나 장석주는 박사 학위를 피하기 위한 고의적인 귀국이라고 주장했다. 김현이 박사 학위 없는 교수라는 전례를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 그런데 김현이 애당초 1년 예정의 유학이었다고 설명했던 만큼, 김현의 유학은 처음부터 딱히 학위를 염두에 두지 않은 행위였던 것 같다.
프랑스로 향하는 과정에서 김현은 홍콩, 방콕, 로마에서 하루씩 머문다. 홍콩에서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으나 방콕의 불교 문화와 로마의 기독교 문화에 대해서는 깊은 인상을 받는다. 김현은 스스로 "문화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 중의 하나"(A)24쪽라고 불렀던 종교를 통하여 한국의 전통에 대해 되새길 기회를 갖는다. 즉 세워진지 불과 수백년에 지나지 않는 불교 사원에서는 한국의 불국사 등보다 더욱 큰 전통의 힘이 느껴지며 로마의 대성당들이 콜로세움의 돌을 뜯어 만든 건물들이라는 것 등을 통해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 전통을 세워 가고 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는 것이다. 김현이 불과 하루씩에 불과한 체류들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새로이 생각했다기보다는, 외국 여행을 통해 본인이 한국의 전통에 대해 본래 갖고 있던 생각을 다시 환기하였다는 것이 옳겠다.
프랑스에서 김현은 미셸 망수이 교수 아래 바슐라르 철학을 연구하는 한편으로 미셸 망수이 교수에게 한국의 시를 보여준다. 김현은 불교 색채가 강한 서정주의 「내가 돌이 되면」, 「동천」과 같은 시를 통해 미셸 망수이가 프랑스의 마약쟁이 시인 앙리 미쇼를 떠올린다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A)102쪽 또한 바슐라르를 문학사 연구에 적용할 수 있겠는지의 여부를 묻지만 일언지하에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듣는다.(A)107쪽
한편으로 김현은 폴 발레리, 알퐁스 도데 등 여러 프랑스 작가들과 관련된 장소를 여행한다. 1975년 1월 3일에는 세트에 있는 발레리의 묘지에 갔으며 1월 8일에는 클로드 시몽의 강연을 듣는다. 김현은 시몽의 강연에서 "예(例)의 세잔의 사과 얘기를 다시 들었다. 진력이 나도록 뻔한 소리를 두 시간 가까이 들었다."라며 짧게만 기술한다.(A)41쪽 날짜가 명확하지 않은 어느 날에는 롤랑 바르트가 유년 시절을 보낸 바이욘을 구경하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김현이 가장 공을 들여 살핀 작가는 역시 프랑스 유학의 본래 목적이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였다. 김현은 1974년 말부터 약 3개월간 바슐라르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1974년 12월 22일에는 바슐라르가 교수로 재직했던 디종 대학을 방문한다. 1975년 1월 28일에는 파리로 향해 바슐라르가 말년에 소르본 대학을 방문한 뒤 프랑스 라디오·텔레비전 공사의 문서 보관소에서 바슐라르의 1952년 강연 녹음을 들었다. 1975년 2월 5일에는 바슐라르의 고향 바르 쉬르 오브로 향해 바슐라르의 제자이자 바슐라르의 중학교 교사 시절 후배였던 베르나르 프리외르를 만나 바슐라르의 생가와 묘지를 방문한다. 김현의 바슐라르 관련지 답사는 「가스통 바슐라르를 찾아서」라는 글을 통해 정리되었다.(A)81~97쪽
당초 1년을 예정하였으나 8개월 만에 귀국한다. 김현은 이른 귀국을 아내의 병환 탓이라고 설명했으나 장석주는 박사 학위를 피하기 위한 고의적인 귀국이라고 주장했다. 김현이 박사 학위 없는 교수라는 전례를 만들고 싶어했다는 것. 그런데 김현이 애당초 1년 예정의 유학이었다고 설명했던 만큼, 김현의 유학은 처음부터 딱히 학위를 염두에 두지 않은 행위였던 것 같다.
1.3.4. 귀국 후 ✎ ⊖
프랑스에서 귀국한 뒤에는 《문학과 지성》 1975년 겨울호부터 「한국 문학의 위상」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문학은 억압을 하지 않되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라는 명제 하에 기획된 이 기획물은 훗날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책으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특히 이 기획물은 김현 문학 이론의 핵심인 명제 "문학은 고통이다", "문학은 꿈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한 저작으로도 평가된다.
이후로는 『바슐라르 연구』(1976, 곽광수와 공저), 『현대 비평의 혁명』(1977), 『문학 사회학』(1980),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1989), 『시칠리아의 암소』(1990) 등을 펴내며 프랑스 문학 이론의 소개와 해당 이론에 입각한 한국 문학 비평에 주력했다. 88년에 『외국문학』 논문상, 89년에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았다.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소감을 통해 "문학은 그 어떤 예술보다 더 뜨겁게 인간의 모든 문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 되돌아 봄을 다시 되돌아 보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비평입니다. 비평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반성적 행위입니다."라는 예의 문학론을 재확인한다.
이후로는 『바슐라르 연구』(1976, 곽광수와 공저), 『현대 비평의 혁명』(1977), 『문학 사회학』(1980),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1989), 『시칠리아의 암소』(1990) 등을 펴내며 프랑스 문학 이론의 소개와 해당 이론에 입각한 한국 문학 비평에 주력했다. 88년에 『외국문학』 논문상, 89년에 제1회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았다.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소감을 통해 "문학은 그 어떤 예술보다 더 뜨겁게 인간의 모든 문제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 되돌아 봄을 다시 되돌아 보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비평입니다. 비평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반성적 행위입니다."라는 예의 문학론을 재확인한다.
1.4. 사망 ✎ ⊖
비로소 바다로 간 거북이
1990년 6월 27일,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비평가로서는 이른 나이인 48세의 죽음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유고집 『말들의 풍경』(1990), 『행복한 책읽기』(1993) 등이 출간되었고, 1993년에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16권 분량의 『김현 문학전집』이 완간되었다. 각각 타계 10주기와 20주기였던 2000년, 2010년에는 문학과지성사의 주도로 문학 심포지엄 '말들의 풍경'이 열렸다. 김현의 저서 중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아울러 2011년에는 전라남도 목포시에 소재한 목포문학관에 김현 전시실이 개설될 예정이다. 이미 2010년에 김현의 유품이 문학관 측에 기증된 바 있다.
1990년 6월 27일,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비평가로서는 이른 나이인 48세의 죽음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유고집 『말들의 풍경』(1990), 『행복한 책읽기』(1993) 등이 출간되었고, 1993년에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16권 분량의 『김현 문학전집』이 완간되었다. 각각 타계 10주기와 20주기였던 2000년, 2010년에는 문학과지성사의 주도로 문학 심포지엄 '말들의 풍경'이 열렸다. 김현의 저서 중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아울러 2011년에는 전라남도 목포시에 소재한 목포문학관에 김현 전시실이 개설될 예정이다. 이미 2010년에 김현의 유품이 문학관 측에 기증된 바 있다.
2. 평가 ✎ ⊖
2.1. 문학자 ✎ ⊖
2.1.1. 프랑스 이론 수입상 ✎ ⊖
김현의 이론적 업적으로는 프랑스의 문학 비평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것이 특히 높이 평가된다. 미셸 푸코, 가스통 바슐라르, 르네 지라르 등 오늘날까지도 한국 지성계의 교양처럼 자리잡은 이 프랑스인 학자들은 상당수가 김현 혹은 김현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김현 자신이 펴낸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는 당시로서는 탁월한 지라르 입문서로 평가되었으며,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번역한 역자들 또한 김현을 통해 지라르를 접했다고 밝힌 바 있다.(14) 동료 비평가들이 프랑스 이론을 수입해오며 저지른 오류들에 대해 지적한 적도 있다. 가령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소설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편역한 김윤식은 번역 과정에서 상당한 오역을 저질렀고, 김치수 또한 같은 저작을 지나칠 정도로 욕망의 삼각형 이론 중심으로 이해한다며 비판했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나듯, 김현은 르네 지라르를 비롯한 프랑스 계통의 이론가들에 대해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다. 문제는 김현이 그 프랑스 이론에 지나치게 집착한데다 수입해온 학자들의 주장에 비해 이론적으로 크게 진전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김현의 저술에서 프랑스문학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킨 부분을 걷어낸 나머지 부분은 김현이 비평가로서 누린 명성에 비하면 상당히 '얕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가 성실한 서평자로서 탁월한 견해를 내놓고 당시로선 유려한 문체를 보였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김현 기저의 이론적 빈약함마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즉, 서평가 및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결과 이론적 약점마저 거기에 묻어간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나듯, 김현은 르네 지라르를 비롯한 프랑스 계통의 이론가들에 대해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다. 문제는 김현이 그 프랑스 이론에 지나치게 집착한데다 수입해온 학자들의 주장에 비해 이론적으로 크게 진전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즉 김현의 저술에서 프랑스문학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킨 부분을 걷어낸 나머지 부분은 김현이 비평가로서 누린 명성에 비하면 상당히 '얕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가 성실한 서평자로서 탁월한 견해를 내놓고 당시로선 유려한 문체를 보였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김현 기저의 이론적 빈약함마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즉, 서평가 및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지나치게 강조된 결과 이론적 약점마저 거기에 묻어간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2.1.2. '추한' 전통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한 문학사가 ✎ ⊖
1973년, 김현은 김윤식과 함께 『한국문학사』를 선보인다. 한국 근대 문학의 시작을 영·정조 시대로 끌어올린 예외적인 저작이었다. 이 저작 이후로는 이러한 관점을 계승한 국문학자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한국문학사』의 독특함이 드러난다. 이후로도 김현은 1970년대 내내 여러 차례 반복하여 한국문학사를 다시 쓰고자 하는 시도를 반복한다. 심지어는 한글 세대라 한문을 읽을줄 모르면서도 김윤식에게 영·정조 시대 이전의 문학까지 포괄하는 문학사를 쓰자고 제안했다가 냉랭한 반응을 얻고는 포기한 적도 있었을 정도다. 본전공이 프랑스문학인데다가 술자리에서까지 중언부언을 싫어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온 새벽에조차 신간 서적을 읽을 정도로 '전위'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던 비평가이기에, 10년에 걸친 반복 작업은 김현 이해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최소한 김현 자신에게는 상당한 의의를 갖는 작업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김현은 문학사를 쓸 때 '사료'보다는 '사관'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는데, 이는 김현이 문학사 작업을 통해 특정한 '사관'을 전달하고 싶어했음을 보여준다.
김현이 딱히 전통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현은 우리네 문학사가 계승할 가치도 없는 비루한 문학만을 선보여왔으며, 그나마의 성과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단절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사실상 「찬기파랑가」를 제외한다면 김현에게 있어 계승될만한 문학적 전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임화·백철 류의 이식문학론은 거부하면서도 '우리 것'만이 우월하다고 보는 민족주의적 사고를 깊이 혐오했다. 그러면서도 김현이 한국문학사에 거의 자학적으로 매달려왔던 것은, 비루한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 과거를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현이 1986년 4월 30일자의 일기에 "어떤 경우에건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C)256쪽 등의 구절을 남긴 사실을 볼 때 김현은 아무리 추한 것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직면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던 듯 보인다. '혐오스런 전통'에 대한 강박은 아마도 함석헌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현은 YMCA에서 진행되었던 함석헌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함석헌이 주창했던 '고난의 역사'에 깊이 공감하였다고 한다. 함석헌에 대한 김현의 학문적 호의는 『한국문학사』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1장 「방법론 비판」에서 김현은 근대 문학의 성과를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3·1운동~해방시기의 문학적 성과들을 총합한 결과물로 평가한다.
김현은 『한국문학사』 전후로 썼던 여러 문학사들을 통하여 "전통의 단절"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다. 가령 『한국 문학의 위상』에 실린 「한국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라는 글은 서정주의 「한국성략사」의 인용으로 시작된다.(D)93쪽 여기서 김현은 단장(斷腸)을 노래하는 구절의 인용을 통해 장의 끊어짐과 이음을 자신의 문학사 작업과 연결시킨다. 그 서정주의 싯구를 빌려 말하자면 김현에게 문학사란 "腸을 또 꿰매"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김현이 딱히 전통 문학에 대한 애정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현은 우리네 문학사가 계승할 가치도 없는 비루한 문학만을 선보여왔으며, 그나마의 성과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단절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사실상 「찬기파랑가」를 제외한다면 김현에게 있어 계승될만한 문학적 전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임화·백철 류의 이식문학론은 거부하면서도 '우리 것'만이 우월하다고 보는 민족주의적 사고를 깊이 혐오했다. 그러면서도 김현이 한국문학사에 거의 자학적으로 매달려왔던 것은, 비루한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 과거를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문학, 한국 문화는 세계의 여러 문명과 나란히 서서 어깨를 겨룰 만한 것을 산출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한국 문화의 주변성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그 문제 해결에는 우선 감정적 정직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전해종의 탁월한 지적 그대로 한국사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감정적으로 비하시켜서 거기에서 도피하려 해서도 안되며, 평범한 것을 굉장한 것으로 확대해서도 안 된다. 우선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그것들의 의미를 캐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 문화의 식민지성, 혹은 주변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새로운 의미망 속에 끌어넣어 이해하여야 한다는 진술이다.(B)23~25쪽 |
실제로 김현이 1986년 4월 30일자의 일기에 "어떤 경우에건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C)256쪽 등의 구절을 남긴 사실을 볼 때 김현은 아무리 추한 것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직면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던 듯 보인다. '혐오스런 전통'에 대한 강박은 아마도 함석헌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현은 YMCA에서 진행되었던 함석헌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함석헌이 주창했던 '고난의 역사'에 깊이 공감하였다고 한다. 함석헌에 대한 김현의 학문적 호의는 『한국문학사』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1장 「방법론 비판」에서 김현은 근대 문학의 성과를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3·1운동~해방시기의 문학적 성과들을 총합한 결과물로 평가한다.
한용운의 산문시, 염상섭·채만식 등의 작가들과 정지용, 윤동주 등의 시인, 임화·이헌구·김환태 등의 평론가, 그리고 조선학이라는 개념 형성에 사투한 민족주의자들(특히 신채호와 최현배)의 활약, 기독교의 속죄양 의식이 무교회주의자들을 통해 형성되어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가능케 했다.(B)35쪽 |
김현은 『한국문학사』 전후로 썼던 여러 문학사들을 통하여 "전통의 단절"에 대한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다. 가령 『한국 문학의 위상』에 실린 「한국문학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라는 글은 서정주의 「한국성략사」의 인용으로 시작된다.(D)93쪽 여기서 김현은 단장(斷腸)을 노래하는 구절의 인용을 통해 장의 끊어짐과 이음을 자신의 문학사 작업과 연결시킨다. 그 서정주의 싯구를 빌려 말하자면 김현에게 문학사란 "腸을 또 꿰매"는 작업이었던 셈이다.
2.2. 현장 비평가 ✎ ⊖
2.2.1. 당대 문학에 대한 애정 ✎ ⊖
전통에 대한 혐오와 강박은 김현으로 하여금 구세대를 철저하게 부정하게 했으며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당대 문학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실상 김현은 이론가로보다는 당대 문학의 비평가로서 더 많은 족적을 남긴 문인이었다. 김현이 현대 문학 서평자로서 지녔던 성실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김현은 비평이 작가를 감싸안을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술자리에서 만난 시인들에게 직접 시의 이미지에 대해 묻거나 대취하여 귀가한 새벽에도 신간을 읽을 정도로 당대의 문학에 애착을 보였다. 유명한 반포치킨 에피소드나 그가 시평에서 그 시인의 언어로 말하기를 즐겨하였던 점 등은 김현이 후학들에게 애정을 쏟았던 훌륭한 선배임과 동시에 그가 가장 성실하게 '새로운 문학'을 좇았던 학자임을 드러낸다. 이는 김현이 시인들과 대척했던 김우창이나 술을 마시지 않았던 김윤식과는 전혀 다른 기질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김현은 소설가 본인들이나 당대의 동료 학자들이 쉬이 집어내지 못하는 내면을 집어내는데도 탁월한 면을 보였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 대한 평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명을 찾아서』에 대한 평은 SF 소설이라거나 80년대 한국 상황에 대한 비판이라는 식의 평이 주류를 이룬다. 심지어 '민주화 때문에 자칫 간과되기 쉬운 민족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운' 소설이라는 평조차 있었다. 이에 반하여 김현은 소설의 각 장 서두에 나오는 사실 및 사실을 비튼 허구의 조합을 주목하며 "이 소설은 주네트가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른 텍스트의 곁다리를 제대로 읽어야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라는 평을 남긴다.(C)86쪽
이외에도 김훈에 대한 평 또한 주목할만하다. 김현 생전에는 김훈이 별다른 작품 활동을 벌인 바 없고 신문 기자로서 보다 명성을 떨쳤는데, 김현은 김훈에 대해서 "기자의 글로서는 거의 파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평을 남긴다.(C)87~88쪽
김현은 소설가 본인들이나 당대의 동료 학자들이 쉬이 집어내지 못하는 내면을 집어내는데도 탁월한 면을 보였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 대한 평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명을 찾아서』에 대한 평은 SF 소설이라거나 80년대 한국 상황에 대한 비판이라는 식의 평이 주류를 이룬다. 심지어 '민주화 때문에 자칫 간과되기 쉬운 민족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운' 소설이라는 평조차 있었다. 이에 반하여 김현은 소설의 각 장 서두에 나오는 사실 및 사실을 비튼 허구의 조합을 주목하며 "이 소설은 주네트가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른 텍스트의 곁다리를 제대로 읽어야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라는 평을 남긴다.(C)86쪽
이외에도 김훈에 대한 평 또한 주목할만하다. 김현 생전에는 김훈이 별다른 작품 활동을 벌인 바 없고 신문 기자로서 보다 명성을 떨쳤는데, 김현은 김훈에 대해서 "기자의 글로서는 거의 파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평을 남긴다.(C)87~88쪽
2.2.2. 미문가 ✎ ⊖
김현은 언어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4·19세대를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 첫 세대"라고 요약 정리하기도 했다. 실제 김현은 비평적 성과 외에 특유의 유려한 문장으로도 기억된다. 황지우가 '김현체'라고까지 표현했던 그의 문체는 당대 문학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고종석은 06년에 김현을 회고하는 글에서 '문학평론을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의 첫 비평가고, 어쩌면 마지막 비평가일지도 모른다'고 평할 정도였다.(21)
그의 미문은 부러 짜낸 수사가 아니라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데에 미덕이 있다. 그 결과 김현의 평론문장은 서구어의 번역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국어의 외연과 가능성을 늘리려는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대명사 "나"를 공적인 글에 떳떳이 도입하게 된 것도 김현에서부터이며, "말의 바른 의미에서"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와 같은 표현, 또 "놀라워라" "무서워라"와 같은 발랄한 삽입구를 유행시킨 이 역시 문장가 김현이었다.
복거일은 김현의 제자인 정과리가 엮은 김현 선집인 『전체에 대한 통찰』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미문은 부러 짜낸 수사가 아니라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데에 미덕이 있다. 그 결과 김현의 평론문장은 서구어의 번역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국어의 외연과 가능성을 늘리려는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대명사 "나"를 공적인 글에 떳떳이 도입하게 된 것도 김현에서부터이며, "말의 바른 의미에서"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와 같은 표현, 또 "놀라워라" "무서워라"와 같은 발랄한 삽입구를 유행시킨 이 역시 문장가 김현이었다.
복거일은 김현의 제자인 정과리가 엮은 김현 선집인 『전체에 대한 통찰』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기도 했다.
"축배! 당신이 처음으로 김현이라는 멋진 대륙을 탐험하러 나서는 지금, 나는 부럽기만 합니다. 아쉽게도, 그것은 당신이 평생 한 번밖에 맛보지 못할 경험입니다. 그래서 나는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빕니다."(22) |
2.3. 4·19세대 이론가 ✎ ⊖
2.3.1. 앞세대 문단과의 단절 ✎ ⊖
동세대 밑 후학들에 대한 애정은 그 특유의 4·19세대론으로 발전한다. 극단적으로 전통을 혐오했던 김현만이 아니라 실상 그의 세대는 스스로를 그 윗대와는 전혀 다른 세대로 여겼다. 구세대가 감당했던 '고통스러운 역사'와 '우월한 서구'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실제로 김현을 포함한 '신세대' 비평가와 그 이전 세대의 차이는 꽤 컸다. 이 신예 비평가들은 김현이 '한글 세대'라고 지칭했듯 일본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세대였고, 전후 대학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첫 (외국) 문학 전공자였다. 훗날 이어령이 "선배 기성 문인 중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23)라고 회고했던 것은 이전 세대 비평가들과 신세대 비평가들의 분위기 차이를 잘 설명해준다.
물론 김현 이전 세대에도 유종호처럼 외국문학을 전공한 비평가들은 있었다. 그러나 김현 이전 세대에 유종호와 같은 비평가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반면 김현의 세대에 와서는 외국 문학 전공자 출신의 비평가들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김현이 중심되어 활동했던 《문학과 지성》 소속 비평가들 중에서는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문지 에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하상일은 이를 표까지 만들어 정리한 바 있다.(24)
'경성제국대학'의 원죄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외국 서적을 통해 문학 선진국의 비평 이론 지식들로 무장한 신예 비평가들은 선배 비평가들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그 반감이 김현의 '4·19세대'의식으로 대표된 것이다. 김윤식의 회고에 따르면 김현은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E)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4·19세대 의식에 집착했었다.
김현은 4·19세대의 제창을 통해 사실상 구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김현에게 4·19세대는 기존의 한문 세대나 일본어 세대와는 다른, 오롯이 '우리말'로 사유하고 행동했던 첫 세대라는 의미였다. 그에게 4·19는 한국인이 기존의 억압과 부정한 과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사유를 갖게 된, 말하자면 집단적 전위를 경험하게 된 순간으로 이해되었던 셈이다. 즉 김현이 4·19세대로서 말한 단절은 전통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식민사관적 문학관과 그것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배들과의 결별이었다.
물론 김현 이전 세대에도 유종호처럼 외국문학을 전공한 비평가들은 있었다. 그러나 김현 이전 세대에 유종호와 같은 비평가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반면 김현의 세대에 와서는 외국 문학 전공자 출신의 비평가들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김현이 중심되어 활동했던 《문학과 지성》 소속 비평가들 중에서는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문지 에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하상일은 이를 표까지 만들어 정리한 바 있다.(24)
편집동인(고정필자) | 신인 | ||
출신대 | 전공 | 名 | |
서울대
| 서울대 | 불문4, 독문1, 국문1, 언어1, 영문1 | 08 |
외 대 | 영문1, 불문1, 인도1 | 03 | |
경희대 | 국문1 | 01 | |
건국대 | 국문1 | 01 | |
영남대 | 국문1 | 01 | |
고려대 | 독문1 | 01 | |
연세대 | 학과미상, 73년 시문학추천 기성시인 | 01 | |
미확인 | 3(1명은 중앙대 영문과 교수) | 01 | |
19 |
'경성제국대학'의 원죄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외국 서적을 통해 문학 선진국의 비평 이론 지식들로 무장한 신예 비평가들은 선배 비평가들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그 반감이 김현의 '4·19세대'의식으로 대표된 것이다. 김윤식의 회고에 따르면 김현은 "내 나이는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았다"(E)고까지 표현할 정도로 4·19세대 의식에 집착했었다.
김현은 4·19세대의 제창을 통해 사실상 구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한다. 김현에게 4·19세대는 기존의 한문 세대나 일본어 세대와는 다른, 오롯이 '우리말'로 사유하고 행동했던 첫 세대라는 의미였다. 그에게 4·19는 한국인이 기존의 억압과 부정한 과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사유를 갖게 된, 말하자면 집단적 전위를 경험하게 된 순간으로 이해되었던 셈이다. 즉 김현이 4·19세대로서 말한 단절은 전통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식민사관적 문학관과 그것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배들과의 결별이었다.
2.3.2. 창비와의 대결 의식 ✎ ⊖
김현의 4·19세대론은 선배 세대 비평가 외에, 자신보다 불과 몇년 앞서 문단의 주류로 떠오른 리얼리즘문학 동인들을 겨냥한 주장이기도 했다. 비단 김현을 비롯한 문지 동인들만이 4·19세대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4·19혁명 이후 조동일·구중서·백낙청 등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참여론적 시각의 비평을 발표함으로써 김현이 대두되기 이전에 이미 참여문학론의 기틀을 잡았고, 기존의 전후세대 비평가들과는 또다른 제도권을 창출해내고 있었다.
특히 백낙청을 중심으로 한 《창작과비평》 동인들이 문단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는 상황에서 후발 주자인 문지 동인들은 전후 세대 비평가와 더불어 창비를 비롯한 참여문학 계열 비평가들을 동시에 의식해야 했다. 김현이 문학 동인 '문학과 지성'을 꾸린 것만 하더라도 당시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창작과비평사 계열의 리얼리즘문학에 반대되는 자유주의문학을 위한 장이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창비와의 대결 의식은 김현의 4·19 세대론이 다분히 관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결과를 낳았다. 즉 김현이 이야기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다분히 정신적인 해방이었다.
특히 백낙청을 중심으로 한 《창작과비평》 동인들이 문단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는 상황에서 후발 주자인 문지 동인들은 전후 세대 비평가와 더불어 창비를 비롯한 참여문학 계열 비평가들을 동시에 의식해야 했다. 김현이 문학 동인 '문학과 지성'을 꾸린 것만 하더라도 당시 문단의 주류를 이루던 창작과비평사 계열의 리얼리즘문학에 반대되는 자유주의문학을 위한 장이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창비와의 대결 의식은 김현의 4·19 세대론이 다분히 관념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결과를 낳았다. 즉 김현이 이야기하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다분히 정신적인 해방이었다.
2.4. 자유주의자 : 해방을 위한 엘리트적·탈제도적 문학 ✎ ⊖
2.4.1. 문학적 엘리트주의자 ✎ ⊖
김현은 1977년에 펴낸 명저 『한국 문학의 위상』에서 문학에 관한 몇 가지 독창적인 명제를 내놓는다. 문학은 써 먹을 수가 없다; 문학은 써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써 먹는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은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이 명제들은 '문학은 꿈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체제적'이라는 또 다른 명제와 함께 그가 쓴 모든 글을 관류하는 대원칙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이 써먹을 수 없는 것이기에 오히려 유효할 수 있다는 명제는, 매체 자체를 억압하는 여러가지 조건들 - 특히 자본과 권력 - 으로부터 문학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주장으로 발전된다.
실상 김현의 문학론에는 엘리트주의적 요소가 깔려 있었다. 김현 자신이 엘리트주의자-문학우월주의자였고, 대중을 소비사회와 매스미디어에 놀아나는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특히 김현이 경계했던 매체는 영화, 특히 서구(주로 헐리우드) 영화였다. 김현이 프랑스문학 전공자였던데다 스스로도 영화를 즐겨보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영화를, 서구 문명이 가장 값싸면서도 가장 치명적으로 대중들에게 파고드는 (그와 동시에 서구에 대한 쓸만한 비판 하나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매체로 보았다.
또한 영화를 비롯한 문화 상품들은 그 생산과정에서 자본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갖게 한 원인이었던 듯 싶다. 자본의 개입 때문에 문화 상품은 매체 내외의 검열 - 즉 외부의 검열만이 아니라 자기 검열까지 포함하여 - 을 거쳐 생산되며 결국 관객/독자들에게 세계 전체에 대한 통찰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본 것이다. 김현은 문화가 대중을 체제 안으로 포섭시키는 것과, 그 문화가 문학에 영향을 끼치는 사태를 우려하였다. 결국 김현이 말한 억압이란 소비 사회가 대중들에게 요구하는 무비판적 수용/태도였다. 이 때문에 김현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도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에 반하여 김현은 스스로 문학만의 특성이라 여겼던 탈제도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김현이 『한국 문학의 위상』에서 펼친 지론에 따르면 문학은 그 자체로는 인간에 대한 억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억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현은 문학이 억압의 바깥에서 그 외연을 감싸 억압의 모습을 폭로하고, 억압 없는 쾌락을 제시함으로서 그 인간이 억압 없는 세계를 꿈꾸게 한다고 보았다. 요컨대 문학만이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실상 김현의 문학론에는 엘리트주의적 요소가 깔려 있었다. 김현 자신이 엘리트주의자-문학우월주의자였고, 대중을 소비사회와 매스미디어에 놀아나는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특히 김현이 경계했던 매체는 영화, 특히 서구(주로 헐리우드) 영화였다. 김현이 프랑스문학 전공자였던데다 스스로도 영화를 즐겨보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영화를, 서구 문명이 가장 값싸면서도 가장 치명적으로 대중들에게 파고드는 (그와 동시에 서구에 대한 쓸만한 비판 하나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매체로 보았다.
또한 영화를 비롯한 문화 상품들은 그 생산과정에서 자본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갖게 한 원인이었던 듯 싶다. 자본의 개입 때문에 문화 상품은 매체 내외의 검열 - 즉 외부의 검열만이 아니라 자기 검열까지 포함하여 - 을 거쳐 생산되며 결국 관객/독자들에게 세계 전체에 대한 통찰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본 것이다. 김현은 문화가 대중을 체제 안으로 포섭시키는 것과, 그 문화가 문학에 영향을 끼치는 사태를 우려하였다. 결국 김현이 말한 억압이란 소비 사회가 대중들에게 요구하는 무비판적 수용/태도였다. 이 때문에 김현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도 매우 적대적이었다.
이에 반하여 김현은 스스로 문학만의 특성이라 여겼던 탈제도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김현이 『한국 문학의 위상』에서 펼친 지론에 따르면 문학은 그 자체로는 인간에 대한 억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억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현은 문학이 억압의 바깥에서 그 외연을 감싸 억압의 모습을 폭로하고, 억압 없는 쾌락을 제시함으로서 그 인간이 억압 없는 세계를 꿈꾸게 한다고 보았다. 요컨대 문학만이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2.4.2. 자유주의자 ✎ ⊖
김현은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자본·문화 상품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혐오했다. 그러나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언어 미학 이상에서 가능한 범위 이상으로 과격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소위 참여문학론에 대해서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왔다. 24세 때 남긴 「참가 문학 시비」(1965)라는 글에서는 에밀 졸라와 사르트르의 문학/정치 활동을 예로 들면서 작가로서의 혁명 참여와 혁명가로서의 혁명 참여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즉 "사르트르는 '앙리 마르탱 사건' 때문에, '로젠버그 부처 사건' 때문에, 헝가리 사건 때의 그의 발언 때문에 작가인 것은 아니다. 그는 「벽」을 썼고, 『자유의 길』을 썼기 때문에 작가인 것이다."(D)256쪽 혁명성에 대한 거부는 김현이 자신의 평론에서 김수영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데서도 드러난다.(E)
김현은 문학에 억압에 대한 폭로를 주문한다. 그러나 김현은 그 고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문학을 통해 '배고픈 거지'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하여 문학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추문'에 대한 각성 이후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아무것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문학이 세계의 억압에 대한 인식을 끌어낼 수 있다는 김현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인간이 억압을 깨달았을 때 거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이야기해주지 못한다면, 기왕에 문학이 수행한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억압에 대한 각성 자체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각성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억압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결국 '안그래도 골치아픈 세상에 왜 문학을 읽어서 답 없는 고민을 얻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무력하다.
김현은 스스로 '4·19세대'를 자처하고, 문학에서도 전위적 성과를 달취한 문인들을 사랑할 정도로 전위와 혁명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런 학자가 정작 본인은 내면의 혁명을 넘어선 그 어떠한 사회적 혁명에도 참여한바 없고, 문학의 사회 참여를 이야기했던 소위 '참여문학' 진영에 대해서도 반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김현의 억압 깨기가 결국 내면의 혁명, 내면의 각성에 머무르는 반쪽짜리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딴에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행운을 누렸던 부르주아적 비평가의 한계일런지도.
김현은 문학에 억압에 대한 폭로를 주문한다. 그러나 김현은 그 고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문학을 통해 '배고픈 거지'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하여 문학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추문'에 대한 각성 이후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아무것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문학이 세계의 억압에 대한 인식을 끌어낼 수 있다는 김현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인간이 억압을 깨달았을 때 거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이야기해주지 못한다면, 기왕에 문학이 수행한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억압에 대한 각성 자체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각성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억압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결국 '안그래도 골치아픈 세상에 왜 문학을 읽어서 답 없는 고민을 얻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무력하다.
김현은 스스로 '4·19세대'를 자처하고, 문학에서도 전위적 성과를 달취한 문인들을 사랑할 정도로 전위와 혁명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런 학자가 정작 본인은 내면의 혁명을 넘어선 그 어떠한 사회적 혁명에도 참여한바 없고, 문학의 사회 참여를 이야기했던 소위 '참여문학' 진영에 대해서도 반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김현의 억압 깨기가 결국 내면의 혁명, 내면의 각성에 머무르는 반쪽짜리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딴에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행운을 누렸던 부르주아적 비평가의 한계일런지도.
3. 가십 ✎ ⊖
- '등단'을 거치지 않았던 복거일의 장편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바로 단행본으로 내 주는 방식으로 데뷔를 시켜 준 사람이 바로 김현이다. 이 사건은 복거일 자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답안지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는데 글이 뛰어 나다고 해서 장원으로 뽑아 준 당나라 시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데뷔 이후로는 복거일의 보수주의적 색채 때문에 자주 충돌했다고 한다. 복거일이 자기 어머니의 임종 장면을 보지 못하고 김현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어야 했던 것은 당시부터 이미 문지가 누렸던 '문단권력'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 매일 저녁 퇴근 후 강남고속터미널 근처 구반포상가의 반포치킨이라는 가게에 들러 문청들의 글을 봐주곤 했다고 한다. 황지우가 김현을 추모하며 쓴 시 「비로소 바다로 간 거북이」에 등장하는 맥주집이 바로 반포치킨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비평가를 꿈꾸었던 고명철이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이 가게를 찾아 김현과의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김현은 생전에 이 가게에 외상 장부를 트고 월급날에 외상값을 갚았다고 한다. 주인이 아직도 그의 미결 외상장부를 갖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 김현은 간경화로 사망하였는데, 생전에 술을 몹시 좋아하였다고 한다. 아예 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적은 「불꽃의 말」이라는 에세이까지 썼을 정도다. 이 글에 따르면 김현은 기독교를 믿었던 가정 환경의 영향으로 동년배에 비해 다소 늦은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술을 접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술을 접한 뒤에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지워 버린 나의 삶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평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철학자 김영민이 김현의 음주 취향을 통해 김현의 문학관을 설명하는 글을 쓴 적도 있을 정도.(28)
- 김현은 술자리에서 안주를 거의 먹지 않았고, 담배나 바짝 졸인 라면만을 안주 삼아 거의 매일 문인들과 그리고 제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심지어 몸이 너무 아플 때조차 "나 대신 마시라."며 주변에 술값을 건넬 정도였다. 술과 관련된 가십거리로는 대취한 뒤 종로 5가에서 박상륭과 더불어 반발광(!)을 한 사건, 사상계 인근의 '북경반점'에서 빼갈 18병을 나누어 마시고 필름이 끊어진 것, 항상 낙지를 놓고 이문구와 함께 막걸리 한 되를 마셨다는 얘기 따위가 전한다. 이 외에 김현은 술자리에서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면서도 술자리에서 중언부언하는 사람만은 몹시 싫어했다. 반복된 언어는 지루한 감수성 밖에 담지 못하기에, 중언부언은 문학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 김현의 아들에 따르면 김현의 집에서는 김현과 김현의 아내 모두 담배를 피웠는데, 아내 쪽이 더 골초였다고 한다.
4. 김현 전집 ✎ ⊖
- 01권『한국 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
- 02권『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 03권『상상력과 인간/시인을 찾아서』
- 04권『문학과 유토피아』
- 05권『책읽기의 괴로움/살아 있는 시들』
- 06권『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말들의 풍경』
- 07권『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 08권『프랑스 비평사』(근대/현대)
- 09권『행복의 시학/제강의 꿈』
- 10권『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
- 11권『현대 비평의 양상』
- 12권『존재와 언어/현대 프랑스 문학을 찾아서』
- 13권『김현 예술 기행/반고비 나그네 길에』
- 14권『우리 시대의 문학/두꺼운 삶과 얇은 삶』
- 15권『행복한 책읽기/문학 단평 모음』
- 16권『자료집』
5. 참고 ✎ ⊖
- 강진호 외, 『증언으로서의 문학사』(서울:깊은샘, 2003).
- 고종석, 『말들의 풍경』(서울:개마고원, 2007)
- 김영민, 「김현, 혹은 술에 대한 단상」, 『인물과사상』 2007년 3월호(서울:인물과사상사)
- 김윤식, 「김현 그리고 4·19와 말라르메」, 한겨레신문, 2010년 4월 1일.
- 김인환, 「글쓰기의 지형학-김현론」, 『문학과 사회』(서울:문학과지성사, 1988)
- 김치수, 『문학의 목소리』(서울:문학과지성사, 2006).
- 김현, 『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서울:문학과지성사, 1992).
- 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서울: 문학과지성사, 1991).
- 김현, 『행복한 책읽기/문학 단평 모음』(서울:문학과지성사, 1993).
- 김현·김윤식, 『한국문학사』(서울:민음사, 1996).
- 민노씨, 「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2009년 5월 18일.
- 복거일, 『수성의 옹호』(서울:문학과지성사, 2010).
- 장석주, 「한국문단 비사-문학평론가 김현」
- 위키백과「김현」
6. 영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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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광남
(2)김현「책읽기의 즐거움과 괴로움」, 『책읽기의 괴로움/살아 있는 시들』(서울:문학과지성사, 1992).
(3)김인환, 「글쓰기의 지형학-김현론」, 『문학과 사회』Vol.3, 문학과지성사, 1988.
(4)김현, 『폭력의 구조/시칠리아의 암소』(서울:문학과지성사, 1992), 19p
(5)민노씨, 「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2009년 5월 18일.
(6)김치수, 「문학적 편력」, 『문학의 목소리』(서울:문학과지성사, 2006), 16쪽.
(7)김승옥, 「『산문시대』 시절의 김현」, 김현 외, 『자료집』(서울:문학과지성사, 1993), 248쪽.
(8)김병익, 『반지성의 폭력을 허무는 지성의 열림」, 『말·삶·글 1』(서울:열음사, 1992), 117~140쪽.
(A) (9) (10) (11) (12) (13)김현, 『김현 예술 기행/반고비 나그네 길에』(서울: 문학과지성사, 1993).
(14)르네 지라르 저, 김진식·박무호 역, 「역자 후기」, 『폭력과 성스러움』(서울: 민음사, 2000), 503~504쪽.
(B) (15) (17)김현·김윤식, 「방법론 비판」, 『한국문학사』(서울:민음사, 1996).
(C) (16) (19) (20)김현, 『행복한 책읽기/문학 단평 모음』(서울:문학과지성사, 1993).
(D) (18) (26)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서울: 문학과지성사, 1991).
(21)고종석,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 『말들의 풍경』(서울:개마고원, 2007)
(22)복거일, 「너른 대륙으로 가는 차표」, 『수성의 옹호』(서울:문학과지성사, 2010), 209쪽.
(23)강진호 외, 『증언으로서의 문학사』(서울:깊은샘, 2003), 58쪽.
(24)하상일, 「전후비평의 타자화와 폐쇄적 권력지향성」, 『한국문학논총』Vol.36, 2004, 303쪽.
(E) (25) (27)김윤식, 「김현 그리고 4·19와 말라르메」한겨레, 2010년 4월 1일
(28)김영민, 「술, 혹은 김현에 대한 단상」, 『인물과사상』Vol.108, 인물과사상사, 2007, 169~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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