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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편집)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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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3,18404
==== 자유주의자 ==== 김현은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자본·문화 상품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혐오했다. 그러나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언어 미학 이상에서 가능한 범위 이상으로 과격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소위 참여문학론에 대해서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왔다. 24세 때 남긴 「참가 문학 시비」(1965)라는 글에서는 에밀 졸라와 사르트르의 문학/정치 활동을 예로 들면서 작가로서의 혁명 참여와 혁명가로서의 혁명 참여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즉 "사르트르는 '앙리 마르탱 사건' 때문에, '로젠버그 부처 사건' 때문에, 헝가리 사건 때의 그의 발언 때문에 작가인 것은 아니다. 그는 「벽」을 썼고, 『자유의 길』을 썼기 때문에 작가인 것이다."[*D]^^256쪽^^ 혁명성에 대한 거부는 김현이 자신의 평론에서 김수영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데서도 드러난다.[*E] 김현은 문학에 억압에 대한 폭로를 주문한다. 그러나 김현은 그 고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문학을 통해 '배고픈 거지'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하여 문학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추문'에 대한 각성 이후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아무것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문학이 세계의 억압에 대한 인식을 끌어낼 수 있다는 김현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인간이 억압을 깨달았을 때 거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이야기해주지 못한다면, 기왕에 문학이 수행한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억압에 대한 각성 자체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각성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억압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결국 '안그래도 골치아픈 세상에 왜 문학을 읽어서 답 없는 고민을 얻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무력하다. 김현은 스스로 '4·19세대'를 자처하고, 문학에서도 전위적 성과를 달취한 문인들을 사랑할 정도로 전위와 혁명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런 학자가 정작 본인은 내면의 혁명을 넘어선 그 어떠한 사회적 혁명에도 참여한바 없고, 문학의 사회 참여를 이야기했던 소위 '참여문학' 진영에 대해서도 반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김현의 억압 깨기가 결국 내면의 혁명, 내면의 각성에 머무르는 반쪽짜리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딴에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행운을 누렸던 부르주아적 비평가의 한계일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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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주의자 ==== 김현은 정치 권력만이 아니라 자본·문화 상품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혐오했다. 그러나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언어 미학 이상에서 가능한 범위 이상으로 과격한 수단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소위 참여문학론에 대해서 상당히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왔다. 24세 때 남긴 「참가 문학 시비」(1965)라는 글에서는 에밀 졸라와 사르트르의 문학/정치 활동을 예로 들면서 작가로서의 혁명 참여와 혁명가로서의 혁명 참여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즉 "사르트르는 '앙리 마르탱 사건' 때문에, '로젠버그 부처 사건' 때문에, 헝가리 사건 때의 그의 발언 때문에 작가인 것은 아니다. 그는 「벽」을 썼고, 『자유의 길』을 썼기 때문에 작가인 것이다."[*D]^^256쪽^^ 혁명성에 대한 거부는 김현이 자신의 평론에서 김수영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데서도 드러난다.[*E] 김현은 문학에 억압에 대한 폭로를 주문한다. 그러나 김현은 그 고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문학을 통해 '배고픈 거지'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하여 문학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추문'에 대한 각성 이후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아무것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문학이 세계의 억압에 대한 인식을 끌어낼 수 있다는 김현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인간이 억압을 깨달았을 때 거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이야기해주지 못한다면, 기왕에 문학이 수행한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억압에 대한 각성 자체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각성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억압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결국 '안그래도 골치아픈 세상에 왜 문학을 읽어서 답 없는 고민을 얻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김현의 문학은 무력하다. 김현은 스스로 '4·19세대'를 자처하고, 문학에서도 전위적 성과를 달취한 문인들을 사랑할 정도로 전위와 혁명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런 학자가 정작 본인은 내면의 혁명을 넘어선 그 어떠한 사회적 혁명에도 참여한바 없고, 문학의 사회 참여를 이야기했던 소위 '참여문학' 진영에 대해서도 반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김현의 억압 깨기가 결국 내면의 혁명, 내면의 각성에 머무르는 반쪽짜리 혁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딴에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는 행운을 누렸던 부르주아적 비평가의 한계일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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