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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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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시대에서 문지까지 ==== 《자유문학》 1962년 3월호에 「나르시스 시론」이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 때부터 김현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동료들과 함께 《산문시대》를 조직한다. 헌데 이 시절에 대한 산문시대 동인들에 대한 회고는 조금씩 다르다. 김치수에 따르면 '산문시대' 결성은 철저하게 김현에 의해 주도되었다. 1962년 당시의 김현은, 그 자신이 평론으로 문단에 데뷔를 했음에도 기존 문학지들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운영 때문에 그들의 문학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적인 욕구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김치수, 「문학적 편력」, 『문학의 목소리』(서울:문학과지성사, 2006), 16쪽.] 김승옥에 따르면 신문시대 결성은 김현과 김치수가 주도했다. 그는 김현과 김치수를 "불어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린 교수 지망생"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김승옥, 「『산문시대』 시절의 김현」, 김현 외, 『자료집』(서울:문학과지성사, 1993), 248쪽.] 대학 3학년 때에 이르러서 김현이 《자유문학》 평론 부문에서 당선되고 김승옥 자신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에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 아울러 김승옥은 산문시대의 출간에 김현의 아버지가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김현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증언을 해주고 있다. 김승옥 이후에 김현에 의해 영입된 최하림 ─ 그는 김현의 고향 친구였다 ─ 의 회고에 따르면 《산문시대》는 원래 당시 대부분의 동인지들이 그러하듯 타이프를 쳐서 등사기로 인쇄 할 예정이었다. 집안이 부유했던 김현이 타이프 일을 맡을 여성까지 구하였다. 그런데 최하림이 차라리 정식 인쇄물로 내자는 견해를 내자 '학생의 상업 행위'에 거부감을 느낀 김치수가 탈퇴, 최초에는 세명만으로 운영된다. 이후 전주 가림출판사의 김종배 사장이 인쇄비를 무료로 해주고 제본 방법을 가르쳐주는 호의를 베푼다. 이후 김치수, 염무웅, 곽광수, 강호무, 서정인이 합류하였다. 1964년에는 첫 평론집인 『존재와 언어』를 500부 한정판으로 찍었고, 고은, 황동규, 정현종, 박상륭 등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김현은 이들과 단순 친구로서 교류하는 정도를 넘어 문학 동인 '산문시대'(62년), '사계'(66년) 등의 결성을 주도하는 등, 이 인맥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8년에는 '산문시대'와 '사계'의 주력 멤버들을 끌어들여 이른바 '4·19세대'가 대거 참여하는 동인 '68그룹'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성과에 바탕하여 1970년에는 문학 계간지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다. 이 계간지는 문학과지성사의 모태가 된다. 《문학과 지성》은 당시 이미 나오던 《창작과 비평》(현 창비)이 주창해온 참여문학론에 맞서기 위한 잡지였다. 순수문학론을 옹호해왔던 김현은 오래전부터 창비에 견줄만한 동인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왔으며, 불문과 동기인 김치수와 김병익 등에게 참여를 권유하여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승옥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대신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문학과 지성'이라는 제호도 김현이 지었다. 김병익의 고교 동창인 황인철 변호사의 도움으로 자금 문제까지 해결된 뒤에는 다방 '비봉'(현 교보빌딩 터)에서 업무를 보았는데, 이 때의 모임도 늘 김현이 주도했다.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주연이 이듬해인 1971년에 합류함에 따라 이른바 '문지 4인방' 혹은 '4K'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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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시대에서 문지까지 ==== 《자유문학》 1962년 3월호에 「나르시스 시론」이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 때부터 김현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동료들과 함께 《산문시대》를 조직한다. 헌데 이 시절에 대한 산문시대 동인들에 대한 회고는 조금씩 다르다. 김치수에 따르면 '산문시대' 결성은 철저하게 김현에 의해 주도되었다. 1962년 당시의 김현은, 그 자신이 평론으로 문단에 데뷔를 했음에도 기존 문학지들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운영 때문에 그들의 문학 작품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적인 욕구를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김치수, 「문학적 편력」, 『문학의 목소리』(서울:문학과지성사, 2006), 16쪽.] 김승옥에 따르면 신문시대 결성은 김현과 김치수가 주도했다. 그는 김현과 김치수를 "불어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린 교수 지망생"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김승옥, 「『산문시대』 시절의 김현」, 김현 외, 『자료집』(서울:문학과지성사, 1993), 248쪽.] 대학 3학년 때에 이르러서 김현이 《자유문학》 평론 부문에서 당선되고 김승옥 자신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에야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 아울러 김승옥은 산문시대의 출간에 김현의 아버지가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김현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증언을 해주고 있다. 김승옥 이후에 김현에 의해 영입된 최하림 ─ 그는 김현의 고향 친구였다 ─ 의 회고에 따르면 《산문시대》는 원래 당시 대부분의 동인지들이 그러하듯 타이프를 쳐서 등사기로 인쇄 할 예정이었다. 집안이 부유했던 김현이 타이프 일을 맡을 여성까지 구하였다. 그런데 최하림이 차라리 정식 인쇄물로 내자는 견해를 내자 '학생의 상업 행위'에 거부감을 느낀 김치수가 탈퇴, 최초에는 세명만으로 운영된다. 이후 전주 가림출판사의 김종배 사장이 인쇄비를 무료로 해주고 제본 방법을 가르쳐주는 호의를 베푼다. 이후 김치수, 염무웅, 곽광수, 강호무, 서정인이 합류하였다. 1964년에는 첫 평론집인 『존재와 언어』를 500부 한정판으로 찍었고, 고은, 황동규, 정현종, 박상륭 등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김현은 이들과 단순 친구로서 교류하는 정도를 넘어 문학 동인 '산문시대'(62년), '사계'(66년) 등의 결성을 주도하는 등, 이 인맥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8년에는 '산문시대'와 '사계'의 주력 멤버들을 끌어들여 이른바 '4·19세대'가 대거 참여하는 동인 '68그룹'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성과에 바탕하여 1970년에는 문학 계간지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다. 이 계간지는 문학과지성사의 모태가 된다. 《문학과 지성》은 당시 이미 나오던 《창작과 비평》(현 창비)이 주창해온 참여문학론에 맞서기 위한 잡지였다. 순수문학론을 옹호해왔던 김현은 오래전부터 창비에 견줄만한 동인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왔으며, 불문과 동기인 김치수와 김병익 등에게 참여를 권유하여 《문학과 지성》을 창간하기에 이른 것이다. 김승옥에게도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대신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문학과 지성'이라는 제호도 김현이 지었다. 김병익의 고교 동창인 황인철 변호사의 도움으로 자금 문제까지 해결된 뒤에는 다방 '비봉'(현 교보빌딩 터)에서 업무를 보았는데, 이 때의 모임도 늘 김현이 주도했다.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주연이 이듬해인 1971년에 합류함에 따라 이른바 '문지 4인방' 혹은 '4K'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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