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편집
최근 토론
게시판 메인
도구
투표
무작위 문서
스킨 설정
파일 올리기
기타 도구
216.73.216.162
IP
사용자 도구
사용자 설정
로그인
회원 가입
최근 편집
최근 토론
돌아가기
삭제
이동
파일 올리기
노비
(편집) (2)
(편집 필터 규칙)
471,2445
== 가축보다 못한, 동정받지 못한 == 조선의 노비들은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도야지', '두꺼비'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그야말로 짐승 취급을 당했다. 이는 동시대의 양반·양인은 물론이고 전대인 고려의 노비와도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짐승 이름이면 그나마 괜찮은 거였다. 노비들은 '썩을년', '모진놈', '노랑이', '망나니', '말종'처럼 저열함을 나타내거나, '개똥', '말똥', '물똥', '똥싼이', '똥녀[糞女]', '방귀'처럼 더러움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심지어 이름이 '시체'인 노비도 있었다.[* 정성미, 가축보다 못한 노비의 이름, 〈고문서향기〉, 호남기록문화시스템] 오늘날 일부 국수주의적인 역사 학자/동호인들은 조선의 노비들이 받은 '인간적인 대우'에 대해 절절이 말을 늘곤 하지만, 실제 노비에 관한 사료들을 살펴 보면 당시 양반 사대부 계층이 노비에 대해 오늘날의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대하며 느끼는 것만큼의 동정심이나 지니고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 16세기 중반에 작성된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작성자 묵재 이문건이 노비에게 체벌을 가한 기록이 수백 건이나 나타난다. 물건 잃어버렸다고 패고, 부르는데 빨리 안 왔다고 패고,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패고, 거문고에 기러기발이 없어졌다고 패고, 말먹이 주는 걸 걸렀다고 패고, 말 먹을 물이 없다고 패고, 그릇 깨끗이 안 씻었다고 패고, 책이 물에 젖었다고 패고, 밥때 늦었다고 패고, 국 제대로 안 익었다고 패고, 제사 음식 제대로 못 만들었다고 패고, 잠자리 미리 안 펴 놨다고 패고, 이 안 잡았다고 패고, 말이 넘어졌다고 패고, 연못에 물 안 채워넣었다고 패고, 손님 왔을 때 떠들었다고, 머리 안 빗었다고 팼다. '이문건 구타 전설' 중에서는 특히 '주인 집 아기'[* 다 같은 애는 아니다.] 시리즈가 볼 만하다. 이문건은, 주인 집 아기를 보다가 실수로 눈을 건드려서 울게 만들었다고 비 돌금에게 매를 댔고, 한 번은 낙서를 하는 것을 못 막았다고, 다른 한 번은 방죽 위에 올라가게 했다고, 또 한 번은 벽에 밀쳐서 울렸다고 비 옥춘를 후려갈겼으며, 애를 놔 두고 먼저 들어왔다고 노 작은손과 필이를 때렸고, 거지 흉내를 시켰다고 노 종만을 손수 몽둥이로 구타했다. 자신의 아이는 귀한 줄 알면서 노비는 그냥 동물처럼 취급한 거다.[* 심희기, 〈16세기 이문건가의 노비에 대한 체벌의 실태분석〉, 《국사관논총》 제97집, 2001.]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오희문이라는 양반이 쓴 일기인 《쇄미록(瑣尾錄)》을 보면, 계집종이 죽어가는데 밥 지을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거나, 노비의 죽음에 대해, 오희문 본인이 그 죽음에 책임이 있거나 자신이 '훌륭한 노비'라고 인식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아쉬울 것이 없다[不惜]"고 말하는 것이 양반들이 노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이었다.[* 정성미, 〈조선시대 사노비의 사역영역과 사적영역〉, 《전북사학》 제38호, 2011.] 조선 말의 문인인 서유영(徐有英)은 본인의 저서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정조, 순조대에 한성부판윤,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이기 했던 이서구가 젊은 시절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는 이유로 노비를 때려 죽이고 그 일을 '조용하게 처리한' 즉 관가에 신고를 하지 않은 일화를 '미담'으로 여겨 수록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양반들에게 노비를 맘대로 죽일 권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노비제가 해체 중'이었다고 하는 18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김종성,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9989&categoryId=62041&cid=62041|동정 받지 못한 노비의 죽음]], 《조선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예담, 2013.] 그렇게 노비라는 이유로 학대와 살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던 조선의 양반 노비주들이 노비 신분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얼마나 존중했을지는 불문가지다.
(임시 저장)
(임시 저장 불러오기)
기본값
모나코 에디터
normal
namumark
namumark_beta
macromark
markdown
custom
raw
(↪️)
(💎)
(🛠️)
(추가)
== 가축보다 못한, 동정받지 못한 == 조선의 노비들은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도야지', '두꺼비'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그야말로 짐승 취급을 당했다. 이는 동시대의 양반·양인은 물론이고 전대인 고려의 노비와도 차별화되는 것이었다. 짐승 이름이면 그나마 괜찮은 거였다. 노비들은 '썩을년', '모진놈', '노랑이', '망나니', '말종'처럼 저열함을 나타내거나, '개똥', '말똥', '물똥', '똥싼이', '똥녀[糞女]', '방귀'처럼 더러움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심지어 이름이 '시체'인 노비도 있었다.[* 정성미, 가축보다 못한 노비의 이름, 〈고문서향기〉, 호남기록문화시스템] 오늘날 일부 국수주의적인 역사 학자/동호인들은 조선의 노비들이 받은 '인간적인 대우'에 대해 절절이 말을 늘곤 하지만, 실제 노비에 관한 사료들을 살펴 보면 당시 양반 사대부 계층이 노비에 대해 오늘날의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대하며 느끼는 것만큼의 동정심이나 지니고 있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 16세기 중반에 작성된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작성자 묵재 이문건이 노비에게 체벌을 가한 기록이 수백 건이나 나타난다. 물건 잃어버렸다고 패고, 부르는데 빨리 안 왔다고 패고,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패고, 거문고에 기러기발이 없어졌다고 패고, 말먹이 주는 걸 걸렀다고 패고, 말 먹을 물이 없다고 패고, 그릇 깨끗이 안 씻었다고 패고, 책이 물에 젖었다고 패고, 밥때 늦었다고 패고, 국 제대로 안 익었다고 패고, 제사 음식 제대로 못 만들었다고 패고, 잠자리 미리 안 펴 놨다고 패고, 이 안 잡았다고 패고, 말이 넘어졌다고 패고, 연못에 물 안 채워넣었다고 패고, 손님 왔을 때 떠들었다고, 머리 안 빗었다고 팼다. '이문건 구타 전설' 중에서는 특히 '주인 집 아기'[* 다 같은 애는 아니다.] 시리즈가 볼 만하다. 이문건은, 주인 집 아기를 보다가 실수로 눈을 건드려서 울게 만들었다고 비 돌금에게 매를 댔고, 한 번은 낙서를 하는 것을 못 막았다고, 다른 한 번은 방죽 위에 올라가게 했다고, 또 한 번은 벽에 밀쳐서 울렸다고 비 옥춘를 후려갈겼으며, 애를 놔 두고 먼저 들어왔다고 노 작은손과 필이를 때렸고, 거지 흉내를 시켰다고 노 종만을 손수 몽둥이로 구타했다. 자신의 아이는 귀한 줄 알면서 노비는 그냥 동물처럼 취급한 거다.[* 심희기, 〈16세기 이문건가의 노비에 대한 체벌의 실태분석〉, 《국사관논총》 제97집, 2001.]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오희문이라는 양반이 쓴 일기인 《쇄미록(瑣尾錄)》을 보면, 계집종이 죽어가는데 밥 지을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 하거나, 노비의 죽음에 대해, 오희문 본인이 그 죽음에 책임이 있거나 자신이 '훌륭한 노비'라고 인식한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아쉬울 것이 없다[不惜]"고 말하는 것이 양반들이 노비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이었다.[* 정성미, 〈조선시대 사노비의 사역영역과 사적영역〉, 《전북사학》 제38호, 2011.] 조선 말의 문인인 서유영(徐有英)은 본인의 저서 《금계필담(錦溪筆談》에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정조, 순조대에 한성부판윤,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이기 했던 이서구가 젊은 시절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는 이유로 노비를 때려 죽이고 그 일을 '조용하게 처리한' 즉 관가에 신고를 하지 않은 일화를 '미담'으로 여겨 수록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양반들에게 노비를 맘대로 죽일 권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노비제가 해체 중'이었다고 하는 18세기 후반의 일이었다.[* 김종성,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59989&categoryId=62041&cid=62041|동정 받지 못한 노비의 죽음]], 《조선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예담, 2013.] 그렇게 노비라는 이유로 학대와 살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던 조선의 양반 노비주들이 노비 신분인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얼마나 존중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비로그인 상태입니다. 편집한 내용을 저장하면 지금 접속한 IP가 기록됩니다.
편집을 전송하면 당신은 이 문서의 기여자로서 본인이 작성한 내용이
CC BY 4.0
에 따라 배포되고, 기여한 문서의 하이퍼링크나 URL로 저작자 표시가 충분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전송
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