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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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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1990
=== 혁명 활동 ===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학을 공부하고,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1925년 광저우의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여러 학문을 공부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1926년 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무장봉기를 계획했고, 1927년 중국공산당이 주동이 된 광저우 봉기에 참가했다. 이 당시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했으나,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 앞에 참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 김산은 패배를 무릅쓰고 국민당군의 체포를 피해 광저우를 빠져나왔다. 1929년 베이징에서 공산당의 지하투쟁에 참가하였다. 또한 독립운동단체인 조선혁명청년동맹의 활동도 했다. 이런 활동뿐만 아니라 저술활동에도 힘을 기울여서 많은 글을 남겼다. 1930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고 자백 및 전향요구를 받았으나 입을 다물었다. 김산은 명목상 조선인(일본국적)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은 김산을 처형하지 못하고, 톈진의 일본조계에 주둔하던 일본경찰에 넘겼다. 일본경찰도 김산을 고문했으나, 김산의 활동은 대부분 중국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중형을 가할 수 없었고, 일본당국은 김산을 조선으로 압송하는 것 이상의 형벌을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산은 이 체포기간동안 고문과 학대를 당해서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1932년 다시 김산은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체포된 전력을 가진 당원은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공산당은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 김산은 당의 명령을 기다리며 하북성 지역에서 교사로 일했다. 1933년 국민당의 공안-테러 조직인 남의사가 다시 김산을 체포해서, 톈진의 일본당국에 넘겼다. 일본은 김산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으나, 또다시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다시 조선으로 압송해서 석방했다. 김산은 이때 폐결핵이 심해지는 등 큰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1934년 김산은 다시 베이징으로 왔고, 다시 당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명령을 받아서 천신만고끝에 중국공산당이 장정을 거쳐 도착한 옌안 해방구로 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항일군정대학의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당시 미국인 기자 님 웨일즈를 만나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아 자서전을 저술하는데 이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다. 김산에게 불운하게도 당시 중국공산당은 갖은 배신과 정보누설 때문에 편집증적으로 밀정들을 솎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공산당의 방첩책임자인 캉성은 특히 두번이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김산을 일본간첩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김산은 그리하여 1938년 10월 "일본인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이때 나이 33세였다. 사실 중국공산당도 김산에 대해 뚜렷한 스파이혐의를 찾을 수 없었으나, 처형은 캉성의 강권이었다고 한다. 캉성의 의심과는 달리 해방후 입수된 일본측 김산관련 문서에서는 그가 "전혀 전향의 의사가 없고, 당과 조직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는 점이 명시되어 억울한 누명을 썼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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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활동 ===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학을 공부하고,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1925년 광저우의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여러 학문을 공부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1926년 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무장봉기를 계획했고, 1927년 중국공산당이 주동이 된 광저우 봉기에 참가했다. 이 당시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했으나,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 앞에 참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 김산은 패배를 무릅쓰고 국민당군의 체포를 피해 광저우를 빠져나왔다. 1929년 베이징에서 공산당의 지하투쟁에 참가하였다. 또한 독립운동단체인 조선혁명청년동맹의 활동도 했다. 이런 활동뿐만 아니라 저술활동에도 힘을 기울여서 많은 글을 남겼다. 1930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고 자백 및 전향요구를 받았으나 입을 다물었다. 김산은 명목상 조선인(일본국적)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은 김산을 처형하지 못하고, 톈진의 일본조계에 주둔하던 일본경찰에 넘겼다. 일본경찰도 김산을 고문했으나, 김산의 활동은 대부분 중국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중형을 가할 수 없었고, 일본당국은 김산을 조선으로 압송하는 것 이상의 형벌을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산은 이 체포기간동안 고문과 학대를 당해서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1932년 다시 김산은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체포된 전력을 가진 당원은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공산당은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 김산은 당의 명령을 기다리며 하북성 지역에서 교사로 일했다. 1933년 국민당의 공안-테러 조직인 남의사가 다시 김산을 체포해서, 톈진의 일본당국에 넘겼다. 일본은 김산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으나, 또다시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다시 조선으로 압송해서 석방했다. 김산은 이때 폐결핵이 심해지는 등 큰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1934년 김산은 다시 베이징으로 왔고, 다시 당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명령을 받아서 천신만고끝에 중국공산당이 장정을 거쳐 도착한 옌안 해방구로 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항일군정대학의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당시 미국인 기자 님 웨일즈를 만나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아 자서전을 저술하는데 이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다. 김산에게 불운하게도 당시 중국공산당은 갖은 배신과 정보누설 때문에 편집증적으로 밀정들을 솎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공산당의 방첩책임자인 캉성은 특히 두번이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김산을 일본간첩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김산은 그리하여 1938년 10월 "일본인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이때 나이 33세였다. 사실 중국공산당도 김산에 대해 뚜렷한 스파이혐의를 찾을 수 없었으나, 처형은 캉성의 강권이었다고 한다. 캉성의 의심과는 달리 해방후 입수된 일본측 김산관련 문서에서는 그가 "전혀 전향의 의사가 없고, 당과 조직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는 점이 명시되어 억울한 누명을 썼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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