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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최근 수정 시각 : 2023-01-06 23:01:52 | 조회수 : 26

김산(1905년 3월 10일 ~ 1938년 10월 19일)은 중국 혁명에 참가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다. 1938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 때문에 강성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1983년 중국공산당이 과오를 인정하면서 명예가 회복됐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으론 에드가 스노의 와이프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이 유명하다.

목차

1. 생애
1.1. 초기이력
1.2. 혁명 활동
2. 사망 후

1. 생애

1.1. 초기이력

평안북도 용천 출생이다. 본명은 장지학(님 웨일즈) 또는 장지락(일본문헌)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고 체포되었다. 그때문에 4일간 유치장에 구금되고 학교서 제적당했지만, 석방된 이후 공부를 위해 일본유학을 했다. 일본에서 고학하면서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죄없는 조선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일본을 떠나 소련으로 갈 준비를 했다.

1.2. 혁명 활동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학을 공부하고,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1925년 광저우의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여러 학문을 공부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1926년 4.12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무장봉기를 계획했고, 1927년 중국공산당이 주동이 된 광저우 봉기에 참가했다. 이 당시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했으나, 압도적인 국민당군의 병력 앞에 참패하고 대부분 전사했다. 김산은 패배를 무릅쓰고 국민당군의 체포를 피해 광저우를 빠져나왔다.

1929년 베이징에서 공산당의 지하투쟁에 참가하였다. 또한 독립운동단체인 조선혁명청년동맹의 활동도 했다. 이런 활동뿐만 아니라 저술활동에도 힘을 기울여서 많은 글을 남겼다.

1930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고 자백 및 전향요구를 받았으나 입을 다물었다. 김산은 명목상 조선인(일본국적)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은 김산을 처형하지 못하고, 톈진의 일본조계에 주둔하던 일본경찰에 넘겼다. 일본경찰도 김산을 고문했으나, 김산의 활동은 대부분 중국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중형을 가할 수 없었고, 일본당국은 김산을 조선으로 압송하는 것 이상의 형벌을 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김산은 이 체포기간동안 고문과 학대를 당해서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1932년 다시 김산은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체포된 전력을 가진 당원은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공산당은 다시 받아주지 않았다. 김산은 당의 명령을 기다리며 하북성 지역에서 교사로 일했다.

1933년 국민당의 공안-테러 조직인 남의사가 다시 김산을 체포해서, 톈진의 일본당국에 넘겼다. 일본은 김산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으나, 또다시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다시 조선으로 압송해서 석방했다. 김산은 이때 폐결핵이 심해지는 등 큰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1934년 김산은 다시 베이징으로 왔고, 다시 당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명령을 받아서 천신만고끝에 중국공산당이 장정을 거쳐 도착한 옌안 해방구로 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항일군정대학의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당시 미국인 기자 님 웨일즈를 만나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아 자서전을 저술하는데 이 책이 바로 《아리랑(Song of Ariran)》이다.

김산에게 불운하게도 당시 중국공산당은 갖은 배신과 정보누설 때문에 편집증적으로 밀정들을 솎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공산당의 방첩책임자인 캉성은 특히 두번이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김산을 일본간첩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김산은 그리하여 1938년 10월 "일본인 간첩"이라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이때 나이 33세였다. 사실 중국공산당도 김산에 대해 뚜렷한 스파이혐의를 찾을 수 없었으나, 처형은 캉성의 강권이었다고 한다.

캉성의 의심과는 달리 해방후 입수된 일본측 김산관련 문서에서는 그가 "전혀 전향의 의사가 없고, 당과 조직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는 점이 명시되어 억울한 누명을 썼음이 밝혀졌다.

2.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 집권 이후인 김산의 처형을 명령한 캉성을 사후출당하고 (캉성의 출당명목은 문화대혁명 당시 사인방과 어울리면서 국정을 농단한 혐의였다) ,1983년 김산을 복권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2005년 김산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다. 북한 측도 김산을 혁명열사릉에 안장하고 기념하고 있다.

김산의 자서전은 1941년 님웨일즈에 의해 출판되었으나, 출판사가 영세한데다가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 독자들에게 매우 생소했기 떄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미국과 번역판이 나온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리영희 교수 또한 일본 서점에서 김산의 존재를 알게 됐다. 1980년대 처음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김산과 님웨일즈는 주로 필담으로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김산은 영문독해는 문제가 없었으나 영어를 거의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김산은 아들 하나(고영광)를 남겼는데, 문화대혁명 이후 당에 아버지의 복권을 강력하게 청원했고, 결국 덩샤오핑 집권 이후 김산은 복권되어 당적이 모두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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