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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리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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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5661
==== 리비아의 무장해제 ==== 트리폴리에서 씨고넬라 해군항공기지까지 직선거리는 537km이고, 리비아 중부 내륙에서 수다만 해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800km이고, 트리폴리에서 아비아노 공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1,470km다. 지리적 조건을 살펴보면, 리비아군에게 사거리 1,5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만 있었어도, 미국군은 함부로 리비아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리비아군은 지중해에 전진배치된 미국군 기지를 타격할 준중거리 미사일이 한 발도 없어서 무력침공을 당하고 말았다. 1980년대에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무력침공에 매달렸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사이드라 만에서 해상작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에 배치한 제6함대를 동원하여 리비아 군사시설을 여러 차례 공습, 파괴하였고, 리비아 남쪽에 있는 리비아-수단 국경지대에서는 수단군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과 남쪽에서 이처럼 협공을 퍼부으면서도 리비아와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다. 그 까닭은, 리비아군이 무력침공을 격퇴할 미사일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비아군의 미사일 전력은 미국의 농간에 의해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 기막힌 사연은 이렇다. 1979년 12월 29일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았고, 1981년 5월 6일 리비아와 단교하였다. 미국이 리비아 압박이 더 심해진 까닭은,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정권이 출범하였기 때문이다.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와 단교한 뒤 석 달이 지난 8월 19일 미국군 전투기를 출격시켜 지중해 상공에서 리비아군 전투기 두 대를 격추하였다. 공공연한 도발의 시작이었다. 레이건 정권은 1986년 1월 7일 리비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추가로 실시한다고 발표하였고, 1986년 4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미국군 두 명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면서 4월 15일에 미국군 전폭기 편대를 동원하여 리비아를 공습하였다. 미국이 이처럼 리비아를 공습하면서도 공습을 한 차례만 감행하고 금방 물러선 까닭은, 계속적인 공습에 맞선 리비아군의 반격이 가해질 경우 리비아군의 미사일 공격이 자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리비아를 지원해준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리비아에서 급변사태와 정권교체를 일으키기 위한 봉쇄와 압박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움직여 리비아를 압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공작하였다. 1992년 1월 2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31호, 3월 3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48호, 1993년 11월 1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83호가 잇달아 나왔다. 거기에 더하여, 1996년 8월 5일 미국 연방의회는 이란-리비아 제재법안을 의결하였다. 10년 이상 지속된 강력한 봉쇄와 압박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된 리비아는 결국 1999년 봄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리비아가 요청한 굴욕적인 비밀협상에 관한 정보는 오랫동안 비밀로 묻혀있다가, 클린턴 정부 시기 미국 국무부 중동 담당 차관보였던 마틴 아인딕의 발언이 2004년 3월 31일 <파이낸셜 타임스>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언론에 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리비아는 미국에게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문제를 다룰 비밀협상을 시작하자고 요청하였는데, 미국은 비밀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리비아가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과 보상문제를 해결하라는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미국이 내건 전제조건은 리비아에게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리비아는 미국이 내건 굴욕적인 전제조건을 받아들였다. 미국에게 굴복한 리비아는 1988년에 있었던 미국 항공기 테러에 연루된, 리비아 정보기관에 연관된 혐의자 두 사람의 신병을 1999년 4월 5일 네덜란드에 넘겨주었고, 1989년에 있었던 프랑스 항공기 테러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조사에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가 굴복한 것을 보고 나서야 리비아의 비밀협상 요구를 받아주는 척하였다. 1999년 봄에 시작된 비밀협상에서 리비아는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자진해서 폐기하겠다고 미국에게 공약하였다. 리비아가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것은 무력침공을 막을 전쟁억지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인데도, 리비아는 자국의 주권을 지킬 마지막 군사적 수단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에게 굴복하였다. 리비아가 전쟁억지수단을 포기한 것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 실책으로 되었다. 리비아를 얕잡아본 미국은 화학무기를 폐기하겠다고 공약한 리비아에게 이번에는 생물학무기 의혹을 들이대면서 계속 압박하였다. 2001년 11월 19일 '생물학무기 국제협약 검토회의'에 나타난 당시 미국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 존 볼튼은 리비아가 국제협약을 위반하고 생물학무기를 개발 또는 배치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2002년 5월 6일에도 그는 리비아가 생물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태가 그처럼 심각해지고 있었는데도,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3월 초 리비아는 자국의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문제를 다룰 포괄적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에 따라 미국, 영국, 리비아의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리였던 플라인트 레버렛이 2004년 1월 23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비밀협상에서 미국은 리비아가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그에 대해 '확실하고 응당한 보상'을 주겠느라고 약속하였다. 미국이 그런 약속을 꺼내놓은 것은, 미국이 대량파괴무기를 제거하겠다는 거짓명분을 내걸고 이라크를 침공하기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이 2003년 3월 19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일단 대미관계에서 기가 꺾인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계속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3년 8월 15일 리비아는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에게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9월 11일에는 프랑스 항공기 테러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12월 19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화학무기 국제협약(CWC)을 준수하여 핵무기 및 화학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에 따라 탄도미사일의 사거리와 탄두중량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은 2004년 1월 18일 실무처리반을 리비아에 파견하여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 제거작업을 개시하였고, 1월 27일 27.5t에 달하는, 핵개발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관한 기밀문서들과 각종 관련장비들을 압수하여 미국으로 공수하였다. 3월 15일 스펜서 에이브러햄 당시 미국 동력자원부 장관은 미국이 가져온 기밀문서들과 관련장비들은 앞으로 미국이 압수할 전체 분량에서 불과 5%밖에 되지 않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2004년 3월 10일 당시 미국 국무부 검증 및 이행 담당 차관보 폴라 드수터는 미국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출석하여 미국은 리비아군이 보유한 사거리 800km의 스커드-C 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탄도미사일들과 우라늄농축설비를 제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9월 22일 그는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다시 출석하여 리비아의 무장해제에 대한 검증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2010년까지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화학무기 금지기구가 펴낸 2009년도 보고서는 2009년 말 현재 리비아가 보유한 화학무기 원료 가운데 39%가 폐기되었고, 겨자개스 23t 폐기작업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2011년 2월 23일 화학무기 금지기구 대변인이 <합동통신(AP)>에 전한 바에 따르면, 리비아가 보유한 겨자개스 가운데 약 54%에 달하는 13.5t이 폐기되었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개시한 2004년 1월 18일부터 2011년 1월까지 7년이 지나는 사이에 리비아의 전쟁억지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1월 현재, 리비아군에게는 미국군의 침공을 막아줄 전쟁억지력이 전혀 없었다. 리비아의 전쟁억지력 제거작업이 완료된 직후인 2011년 2월 25일 미국은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리비아에 있는 미국인들을 항공편으로 해외 대피시키고, 카다피 국가원수와 주변인물들의 미국 내 자산을 압류하는 제재를 재개하였다. 리비아를 침공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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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비아의 무장해제 ==== 트리폴리에서 씨고넬라 해군항공기지까지 직선거리는 537km이고, 리비아 중부 내륙에서 수다만 해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800km이고, 트리폴리에서 아비아노 공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1,470km다. 지리적 조건을 살펴보면, 리비아군에게 사거리 1,5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만 있었어도, 미국군은 함부로 리비아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리비아군은 지중해에 전진배치된 미국군 기지를 타격할 준중거리 미사일이 한 발도 없어서 무력침공을 당하고 말았다. 1980년대에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무력침공에 매달렸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사이드라 만에서 해상작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에 배치한 제6함대를 동원하여 리비아 군사시설을 여러 차례 공습, 파괴하였고, 리비아 남쪽에 있는 리비아-수단 국경지대에서는 수단군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과 남쪽에서 이처럼 협공을 퍼부으면서도 리비아와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다. 그 까닭은, 리비아군이 무력침공을 격퇴할 미사일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비아군의 미사일 전력은 미국의 농간에 의해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 기막힌 사연은 이렇다. 1979년 12월 29일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았고, 1981년 5월 6일 리비아와 단교하였다. 미국이 리비아 압박이 더 심해진 까닭은,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정권이 출범하였기 때문이다.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와 단교한 뒤 석 달이 지난 8월 19일 미국군 전투기를 출격시켜 지중해 상공에서 리비아군 전투기 두 대를 격추하였다. 공공연한 도발의 시작이었다. 레이건 정권은 1986년 1월 7일 리비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추가로 실시한다고 발표하였고, 1986년 4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미국군 두 명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면서 4월 15일에 미국군 전폭기 편대를 동원하여 리비아를 공습하였다. 미국이 이처럼 리비아를 공습하면서도 공습을 한 차례만 감행하고 금방 물러선 까닭은, 계속적인 공습에 맞선 리비아군의 반격이 가해질 경우 리비아군의 미사일 공격이 자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리비아를 지원해준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리비아에서 급변사태와 정권교체를 일으키기 위한 봉쇄와 압박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움직여 리비아를 압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공작하였다. 1992년 1월 2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31호, 3월 3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48호, 1993년 11월 1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83호가 잇달아 나왔다. 거기에 더하여, 1996년 8월 5일 미국 연방의회는 이란-리비아 제재법안을 의결하였다. 10년 이상 지속된 강력한 봉쇄와 압박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된 리비아는 결국 1999년 봄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리비아가 요청한 굴욕적인 비밀협상에 관한 정보는 오랫동안 비밀로 묻혀있다가, 클린턴 정부 시기 미국 국무부 중동 담당 차관보였던 마틴 아인딕의 발언이 2004년 3월 31일 <파이낸셜 타임스>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언론에 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리비아는 미국에게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문제를 다룰 비밀협상을 시작하자고 요청하였는데, 미국은 비밀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리비아가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과 보상문제를 해결하라는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미국이 내건 전제조건은 리비아에게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리비아는 미국이 내건 굴욕적인 전제조건을 받아들였다. 미국에게 굴복한 리비아는 1988년에 있었던 미국 항공기 테러에 연루된, 리비아 정보기관에 연관된 혐의자 두 사람의 신병을 1999년 4월 5일 네덜란드에 넘겨주었고, 1989년에 있었던 프랑스 항공기 테러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조사에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가 굴복한 것을 보고 나서야 리비아의 비밀협상 요구를 받아주는 척하였다. 1999년 봄에 시작된 비밀협상에서 리비아는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자진해서 폐기하겠다고 미국에게 공약하였다. 리비아가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것은 무력침공을 막을 전쟁억지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인데도, 리비아는 자국의 주권을 지킬 마지막 군사적 수단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에게 굴복하였다. 리비아가 전쟁억지수단을 포기한 것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 실책으로 되었다. 리비아를 얕잡아본 미국은 화학무기를 폐기하겠다고 공약한 리비아에게 이번에는 생물학무기 의혹을 들이대면서 계속 압박하였다. 2001년 11월 19일 '생물학무기 국제협약 검토회의'에 나타난 당시 미국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 존 볼튼은 리비아가 국제협약을 위반하고 생물학무기를 개발 또는 배치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2002년 5월 6일에도 그는 리비아가 생물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태가 그처럼 심각해지고 있었는데도,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3월 초 리비아는 자국의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문제를 다룰 포괄적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에 따라 미국, 영국, 리비아의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리였던 플라인트 레버렛이 2004년 1월 23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비밀협상에서 미국은 리비아가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그에 대해 '확실하고 응당한 보상'을 주겠느라고 약속하였다. 미국이 그런 약속을 꺼내놓은 것은, 미국이 대량파괴무기를 제거하겠다는 거짓명분을 내걸고 이라크를 침공하기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이 2003년 3월 19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일단 대미관계에서 기가 꺾인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계속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3년 8월 15일 리비아는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에게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9월 11일에는 프랑스 항공기 테러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12월 19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화학무기 국제협약(CWC)을 준수하여 핵무기 및 화학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에 따라 탄도미사일의 사거리와 탄두중량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은 2004년 1월 18일 실무처리반을 리비아에 파견하여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 제거작업을 개시하였고, 1월 27일 27.5t에 달하는, 핵개발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관한 기밀문서들과 각종 관련장비들을 압수하여 미국으로 공수하였다. 3월 15일 스펜서 에이브러햄 당시 미국 동력자원부 장관은 미국이 가져온 기밀문서들과 관련장비들은 앞으로 미국이 압수할 전체 분량에서 불과 5%밖에 되지 않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2004년 3월 10일 당시 미국 국무부 검증 및 이행 담당 차관보 폴라 드수터는 미국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출석하여 미국은 리비아군이 보유한 사거리 800km의 스커드-C 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탄도미사일들과 우라늄농축설비를 제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9월 22일 그는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다시 출석하여 리비아의 무장해제에 대한 검증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2010년까지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화학무기 금지기구가 펴낸 2009년도 보고서는 2009년 말 현재 리비아가 보유한 화학무기 원료 가운데 39%가 폐기되었고, 겨자개스 23t 폐기작업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2011년 2월 23일 화학무기 금지기구 대변인이 <합동통신(AP)>에 전한 바에 따르면, 리비아가 보유한 겨자개스 가운데 약 54%에 달하는 13.5t이 폐기되었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개시한 2004년 1월 18일부터 2011년 1월까지 7년이 지나는 사이에 리비아의 전쟁억지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1월 현재, 리비아군에게는 미국군의 침공을 막아줄 전쟁억지력이 전혀 없었다. 리비아의 전쟁억지력 제거작업이 완료된 직후인 2011년 2월 25일 미국은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리비아에 있는 미국인들을 항공편으로 해외 대피시키고, 카다피 국가원수와 주변인물들의 미국 내 자산을 압류하는 제재를 재개하였다. 리비아를 침공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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