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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리비아 내전

최근 수정 시각 : 2023-01-06 21:05:34 | 조회수 : 5

1차 리비아 내전은 2011년 2월 13일부터 발발한 시위로부터 미국,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시민군에 의해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전복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이다.

목차

1. 배경
1.1.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회복
1.1.1. 리비아의 무장해제
2. 전개
2.1. 지방도시에서의 소규모 시위
2.2. 분노의 날
2.3. 하프타군의 군사정변
2.3.1. 하프타군이 제국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
2.4.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
3. 결과
4. 참고자료

1. 배경

1.1.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회복

먼저 카다피 정권의 몰락을 이해하려면 리비아와 미국의 관계회복이라는 배경을 살펴보아야한다. 2004년 6월 28일 미국 국무부는 리비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로부터 이태가 지난 2006년 5월 15일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은 미국이 리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하였다고 발표하였고,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다는 보고서를 연방의회에 제출하였다.

조심스럽게 추진되어온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정상화가 가시적 성과를 전 세계에 보여준 때는 2008년이다. 그 해 1월 3일 압델 라흐만 샬감(Abdel Rahman Shalgam) 당시 리비아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미국-리비아 과학기술협력 협정이 체결되었고, 8개월 뒤인 9월 5일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무장관이 트리폴리를 답방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2008년 10월 5일 미국은 리비아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리비아에 미국 무역사무소가 개설되자 자연히 교역량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두 나라는 2010년 5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미국-리비아 무역투자기본협정(TIFA)을 체결하였다.

이처럼 리비아와 미국은 2004년 이후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게 관계정상화를 추진해왔다. 리비아는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여 자국의 주권과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이 리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한 것은 리비아를 기만하고 농락한 특대형 사기극에 지나지 않았고, 미국의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리비아는 자국의 주권과 안전이 보장받았다고 안심하며 깊은 최면상태에 빠져들었다.

미국이 리비아 공습을 개시하기 보름 전인 2011년 3월 4일 미국 군부가 지중해로 급파한 41,000t급 초대형 강습상륙함 키어사지호(USS Kearsarge)와 16,000t급 상륙수송함 폰스호(USS Ponce)가 수에즈 운하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해병대 병력 1,890명, 지상공격기 5대, 틸트로터(tiltrotor) 헬기 22대, 대잠수함전 헬기 6대를 실은 키어사지호는 폰스호와 함께 그리스 크레테섬(Crete)의 수다만 해군기지(Souda Bay Naval Base)에 도착하였다.

그보다 앞서 2011년 2월 28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공보실장 데이빗 레이펀(David Lapan) 대령은 “결정이 내려질 경우 유연하게 다양한 선택방안들을 택할 수 있도록 미국 공군력과 해군력을 리비아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이동시키고 있다. 리비아에 대한 여러 가지 비상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리비아에서 반정부 투쟁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군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리비아 침공계획을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1.1.1. 리비아의 무장해제

트리폴리에서 씨고넬라 해군항공기지까지 직선거리는 537km이고, 리비아 중부 내륙에서 수다만 해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800km이고, 트리폴리에서 아비아노 공군기지까지 직선거리는 1,470km다. 지리적 조건을 살펴보면, 리비아군에게 사거리 1,500km의 준중거리 미사일만 있었어도, 미국군은 함부로 리비아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리비아군은 지중해에 전진배치된 미국군 기지를 타격할 준중거리 미사일이 한 발도 없어서 무력침공을 당하고 말았다.

1980년대에 미국은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무력침공에 매달렸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사이드라 만에서 해상작전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에 배치한 제6함대를 동원하여 리비아 군사시설을 여러 차례 공습, 파괴하였고, 리비아 남쪽에 있는 리비아-수단 국경지대에서는 수단군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미국은 리비아 북쪽과 남쪽에서 이처럼 협공을 퍼부으면서도 리비아와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다. 그 까닭은, 리비아군이 무력침공을 격퇴할 미사일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비아군의 미사일 전력은 미국의 농간에 의해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 기막힌 사연은 이렇다.

1979년 12월 29일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려놓았고, 1981년 5월 6일 리비아와 단교하였다. 미국이 리비아 압박이 더 심해진 까닭은,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정권이 출범하였기 때문이다.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와 단교한 뒤 석 달이 지난 8월 19일 미국군 전투기를 출격시켜 지중해 상공에서 리비아군 전투기 두 대를 격추하였다. 공공연한 도발의 시작이었다.

레이건 정권은 1986년 1월 7일 리비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추가로 실시한다고 발표하였고, 1986년 4월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미국군 두 명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면서 4월 15일에 미국군 전폭기 편대를 동원하여 리비아를 공습하였다. 미국이 이처럼 리비아를 공습하면서도 공습을 한 차례만 감행하고 금방 물러선 까닭은, 계속적인 공습에 맞선 리비아군의 반격이 가해질 경우 리비아군의 미사일 공격이 자기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리비아를 지원해준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리비아에서 급변사태와 정권교체를 일으키기 위한 봉쇄와 압박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움직여 리비아를 압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공작하였다. 1992년 1월 2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31호, 3월 3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748호, 1993년 11월 11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883호가 잇달아 나왔다. 거기에 더하여, 1996년 8월 5일 미국 연방의회는 이란-리비아 제재법안을 의결하였다.

10년 이상 지속된 강력한 봉쇄와 압박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된 리비아는 결국 1999년 봄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고 말았다. 리비아가 요청한 굴욕적인 비밀협상에 관한 정보는 오랫동안 비밀로 묻혀있다가, 클린턴 정부 시기 미국 국무부 중동 담당 차관보였던 마틴 아인딕의 발언이 2004년 3월 31일 <파이낸셜 타임스>에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언론에 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리비아는 미국에게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문제를 다룰 비밀협상을 시작하자고 요청하였는데, 미국은 비밀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리비아가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과 보상문제를 해결하라는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미국이 내건 전제조건은 리비아에게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리비아는 미국이 내건 굴욕적인 전제조건을 받아들였다. 미국에게 굴복한 리비아는 1988년에 있었던 미국 항공기 테러에 연루된, 리비아 정보기관에 연관된 혐의자 두 사람의 신병을 1999년 4월 5일 네덜란드에 넘겨주었고, 1989년에 있었던 프랑스 항공기 테러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조사에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가 굴복한 것을 보고 나서야 리비아의 비밀협상 요구를 받아주는 척하였다. 1999년 봄에 시작된 비밀협상에서 리비아는 리비아군 화학무기를 자진해서 폐기하겠다고 미국에게 공약하였다. 리비아가 화학무기를 폐기하는 것은 무력침공을 막을 전쟁억지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인데도, 리비아는 자국의 주권을 지킬 마지막 군사적 수단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에게 굴복하였다.

리비아가 전쟁억지수단을 포기한 것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 실책으로 되었다. 리비아를 얕잡아본 미국은 화학무기를 폐기하겠다고 공약한 리비아에게 이번에는 생물학무기 의혹을 들이대면서 계속 압박하였다. 2001년 11월 19일 '생물학무기 국제협약 검토회의'에 나타난 당시 미국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 존 볼튼은 리비아가 국제협약을 위반하고 생물학무기를 개발 또는 배치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2002년 5월 6일에도 그는 리비아가 생물학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태가 그처럼 심각해지고 있었는데도,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03년 3월 초 리비아는 자국의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문제를 다룰 포괄적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에 따라 미국, 영국, 리비아의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관리였던 플라인트 레버렛이 2004년 1월 23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비밀협상에서 미국은 리비아가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그에 대해 '확실하고 응당한 보상'을 주겠느라고 약속하였다. 미국이 그런 약속을 꺼내놓은 것은, 미국이 대량파괴무기를 제거하겠다는 거짓명분을 내걸고 이라크를 침공하기 불과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이 2003년 3월 19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일단 대미관계에서 기가 꺾인 리비아는 미국과의 굴욕협상에 계속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2003년 8월 15일 리비아는 미국 항공기 테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 유족들에게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9월 11일에는 프랑스 항공기 테러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보상하기로 공약하였고, 12월 19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화학무기 국제협약(CWC)을 준수하여 핵무기 및 화학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고,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의 규정에 따라 탄도미사일의 사거리와 탄두중량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에 따라 미국은 2004년 1월 18일 실무처리반을 리비아에 파견하여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 제거작업을 개시하였고, 1월 27일 27.5t에 달하는, 핵개발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관한 기밀문서들과 각종 관련장비들을 압수하여 미국으로 공수하였다. 3월 15일 스펜서 에이브러햄 당시 미국 동력자원부 장관은 미국이 가져온 기밀문서들과 관련장비들은 앞으로 미국이 압수할 전체 분량에서 불과 5%밖에 되지 않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2004년 3월 10일 당시 미국 국무부 검증 및 이행 담당 차관보 폴라 드수터는 미국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출석하여 미국은 리비아군이 보유한 사거리 800km의 스커드-C 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탄도미사일들과 우라늄농축설비를 제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9월 22일 그는 연방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 다시 출석하여 리비아의 무장해제에 대한 검증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2010년까지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화학무기 금지기구가 펴낸 2009년도 보고서는 2009년 말 현재 리비아가 보유한 화학무기 원료 가운데 39%가 폐기되었고, 겨자개스 23t 폐기작업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2011년 2월 23일 화학무기 금지기구 대변인이 <합동통신(AP)>에 전한 바에 따르면, 리비아가 보유한 겨자개스 가운데 약 54%에 달하는 13.5t이 폐기되었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미국은 리비아군 무장해제를 개시한 2004년 1월 18일부터 2011년 1월까지 7년이 지나는 사이에 리비아의 전쟁억지력을 완전히 제거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2011년 1월 현재, 리비아군에게는 미국군의 침공을 막아줄 전쟁억지력이 전혀 없었다. 리비아의 전쟁억지력 제거작업이 완료된 직후인 2011년 2월 25일 미국은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리비아에 있는 미국인들을 항공편으로 해외 대피시키고, 카다피 국가원수와 주변인물들의 미국 내 자산을 압류하는 제재를 재개하였다. 리비아를 침공하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2. 전개

2.1. 지방도시에서의 소규모 시위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리비아의 반정부 투쟁이 격화된 현상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해하고, ‘민주혁명’ 또는 ‘재스민혁명’이 리비아에까지 번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비아 반정부 투쟁의 격화과정을 정밀분석하면, 그런 주장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헛소리인지 알 수 있다.

2011년 1월 13일부터 16일까지 지방도시들인 벵가지(Benghazi), 다르나(Darnah), 바니 왈리드(Bani Walid)에서 소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시위대가 외친 구호는 지연된 공공주택 건설을 하루속히 마무리해달라고 정부당국에 촉구하고, 정치인들의 부패를 청산하라는 수준이었다.(1) 그러한 수준의 요구를 제기하는 소규모 시위는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이때 리비아 정부도 1 월 27 일까지 주택과 개발을 제공하기 위해 200억 유로가 넘는 투자 기금으로 주택 불안에 대응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듯했다.

2.2. 분노의 날

이후 이상하게도 2월 15일부터 시위양상이 갑자기 폭동화되었다. 카다피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경찰본부를 방화하는 폭력사태로 돌변한 것이다.

2월 17일을 이른바 ‘분노의 날’로 선포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선동하였을 뿐아니라 실제로 폭동을 조직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를 위한 리비아 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 for the Libyan Opposition)’가 폭동을 선동하고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카다피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해외 망명객들이 2005년 6월 25일 영국 런던에서 결성한 것이다. 시위가 폭동으로 돌변한 때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2월 27일 미국 피츠벅 대학 출신의 전직 법무장관 무스타파 압둘 잘릴(Mustafa Abdul Jalil)을 대표로 한 ‘과도국가협의회’가 벵가지에서 결성되었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친미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일어난 다른 나라의 반정부 투쟁과 리비아의 반정부 투쟁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는, 리비아에서 시위발생 열흘만에 신속하게 과도정부가 출현한 것에서 나타난다.

리비아 반정부 투쟁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일어난 다른 나라 반정부 투쟁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차이점은, 리비아 국민들이 일으킨 자연발생적 시위가 경찰 탄압으로 과격해지면서 차츰 폭동으로 전화된 것이 아니라, 반란세력이 폭동을 선동하고 경찰 탄압을 유도하여 내전을 일으킨 것이다.

2.3. 하프타군의 군사정변

과도국가협의회는 결성되자마자 반란군 조직부터 서둘렀다. 반란군은 개인화기는 물론이고, 다련장로켓포, 대전차 미사일, 견착식 대공미사일, 방공포, 곡사포, 전차, 보병전투차량, 미그 전투기, 정찰기, 공격헬기, 수송기, 프리깃함, 콜벳함으로 무장하였다. 리비아 반란군은 자기들의 공군부대를 ‘자유 리비아 공군’이라 부르고, 자기들의 지상군부대를 ‘리비아 인민군’이라 부른다.

리비아군의 무장반란 덕택에 리비아 반란군이 정규군의 각종 무기로 중무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규군의 무장반란을 군사정변이라 하는데, 군부에 침투한 반란세력이 오랜 기간 동안 암약하면서 준비하지 않고서는 군사정변이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월 스트릿 저널> 2011년 2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리비아 토브룩 지방의 군지휘관이었던 술레이만 마흐모드(Suleiman Mahmoud) 육군 중장이 2월 20일 자기 휘하의 병사 3,000여 명을 이끌고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런던에 있는 반카다피 망명단체 반대를 위한 리비아 전국회의의 선동으로 폭동이 일어난 때로부터 불과 사흘 만에 현역 중장이 병사 3,000여 명을 이끌고 무장반란을 일으킨 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반란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미국 중앙정보국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리비아군에 침투하여 암약한 하프타군이 은밀히 준비해온 반란사건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2004년 6월 28일 이후 앞에서는 리비아와 관계를 정상화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카다피 정권 전복공작을 추진하면서 내란을 일으킬 결정적인 기회를 찾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리비아 인접국인 이집트에서 반정부 시위로 친미독재정권이 무너진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 중앙정보국은 하프타군에게 리비아군이 무장반란을 일으키도록 지령을 내렸다. 하프타군과 리비아군 반란세력이 합세하여 내란을 일으키자, 미국 군부는 내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방대한 무력을 리비아 인근으로 급파하여 무력침공을 개시하였고, 원래 대사가 없었던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대리대사로 있었던 크리스토퍼 스티븐스(J. Christopher Stevens)를 ‘연락관’에 임명하였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리비아 반란군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임무를 ‘연락관’에게 맡겼다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 논한 것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번에 리비아에서 일어난 내란은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급변사태’인 것이다. 내전을 교사하고, 내란에 개입하는 무력침공을 감행하고, 무력침공으로 반미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선호하는 전형적인 침략전쟁 시나리오다.

2.3.1. 하프타군이 제국주의 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

리비아 반란군을 지휘하는 리비아군 출신 군사지휘관이 두 명 있는데, 리비아군 육군 대령으로 복무한 경력과 미국 망명경력이 있는 칼리파 벨카심 하프타(Khalifa Belqasim Haftar)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비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미국 망명생활을 급히 청산하고 리비아로 돌아가 반란군 지휘관이 되었다.

프랑스의 국제전문 월간지 <르 몽드 디플로마띠끄>가 2001년 3월에 발간한 책 ‘아프리카를 조종하다’에 따르면, 리비아와 차드가 영토분쟁을 벌인 1980년대 후반, 당시 리비아군 육군 대령이었던 하프타가 차드군에게 전쟁포로로 붙잡혔는데, 차드에 잠입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으로 전쟁포로인 그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워싱턴 포스트> 1996년 3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하프타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란단체인 ‘리비아 구국전선’ 산하의 무장조직 ‘리비아 국군’ 지휘관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도움으로 전쟁포로 신세를 면한 하프타는 1990년대에 어느덧 반란군 지휘관으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1996년 12월 19일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리비아 구국전선과 리비아 국군에게 무기와 재정을 지원해주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리비아 국군을 하프타의 이름을 따서 하프타군이라 불렀다.

2011년 3월 25일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세계화 연구소(Centre for Research on Globalization)의 웹싸이트 <글로벌 리서취(Global Research)>에 ‘리비아의 자유투사들과 그 후원자는 누구일까?(Who are the Libyan Freedom Fighters and Their Patrons?)’라는 제목의 긴 글이 실렸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캐나다 외교관 출신으로 미국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이며 세계화 연구소 연구원인 피터 데일 스캇(Peter Dale Scott)이다. 그 글에는 리비아 반란군의 정체를 밝혀주는 정보가 들어있다.

여기에 옮긴 정보들은, 카다피 국가원수를 암살하고 카다피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오래 전부터 집요하게 비밀공작을 추진해온 미국 중앙정보국이 이번에 ‘리비아 구국전선’을 배후조종하여 내란을 일켰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리비아군을 카다피군이라 부르고, 반란군을 시민군이라 부르는 것은, 리비아 내란의 진실을 왜곡하고 미국의 리비아 침공을 정당화하려는 친미언론매체들의 전형적인 왜곡보도다.

리비아의 강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전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 나라들에서 리비아를 반대하는 반란자들을 훈련시켰다.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는 소식지 《비밀의 아프리카》(African Confidential) 1989년 1월 5일부 기사에 따르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차드와 주변나라들에 훈련기지들을 설치해놓고 차드군이 전쟁포로로 잡은 2,000명의 리비아 반란자들을 훈련시켰다. ‘리비아 구국전선’이라고 불리는 단체의 거점은 차드에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과 이스라엘 모싸드의 비밀공작 내막》


미국 정부 문서들에 따르면, (미국만이 아니라)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모로코, 이스라엘, 이라크도 차드에 거점을 둔 리비아 침공작전에 재정을 지원하였다. 예컨대 사우디 아라비아는 (미국 중앙정보국과 프랑스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는) ‘리비아 구국전선’이라는 반란단체에 7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그러나 1984년 5월 8일 카다피를 암살하고 리비아 정부를 전복시키려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그 이듬해 미국은 이집트에게 리비아를 침공하여 카다피 정권을 전복시키라고 요구하였으나, 무바라크 대통령은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리비아를 침공하여 카다피 정권을 전복시키라고 미국이 이집트에게 사주한) 그 계획은 의회지도자들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그 계획의 부당성과 관련한) 항의편지를 보낸 이후인 1985년 말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리비아를 공격하는 은밀한 전쟁》, 리처드 키블


“”리비아 구국전선(NFSL)은 2005년 런던에서 결성된 ‘반대를 위한 리비아 전국회의’의 산하단체인데, 이 단체와 다른 반란단체들이 사용하는 자원은 영국에서 나오고 있다. 리비아 구국전선은 2007년 7월 미국에서 전체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단체의) 워싱턴 거점들에서 작성된 (리비아군의) 민간인 살해와 ‘잔혹행위’들에 대한 정보는 서방 언론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데, 리비아 구국전선은 리비아 국내와 국외에서 저항과 군사공격을 조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아프리카의 석유와 제국, 나토가 리비아를 침략하다》, 케이스 하먼 스노우

2.4.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

미국이 리비아를 기만하고 농락한 특대형 사기극은, 2011년 3월 15일 백악관 지하에 있는 상황실에서 끝났다. 그 날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 백악관 상황실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안보회의가 계속되었고, 그 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리비아 무력침공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무력침공 결정에 따라, 나흘 뒤 미국 군부는 영국군, 프랑스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미사일구축함, 핵추진 잠수함, 스텔스 전투기, 전폭기,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전자전기, 무인정찰기, 특수전 병력, 강습상륙함, 상륙소송함 등을 동원한 ‘오디세이 새벽 작전(Operation Odyssey Dawn)’이라는 선제공습으로 리비아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미국 군부는 리비아 침공을 위해 지중해 지역에서 군사기지 세 군데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시고넬라에 있는 시고넬라 해군항공기지를 리비아 침공을 위해 사용하는데, 이 군사기지는 미국군이 중시하는 지중해의 전략요충지다. 또한 그리스 크레타 섬의 수다만 해군기지도 리비아 침공 군사기지다. 또한 이탈리아 동북부에 있는 아비아노 공군기지도 리비아 침공 군사기지다. 바로 이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미국군 F-22 랩터 스텔스 전투기가 리비아를 공습하였다.

리비아군은 119,000명 정규군과 45,000명 예비군으로 편성되어 있다. 다 합해봐야 164,000명밖에 되지 않는다. 리비아군이 비록 160,0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침공을 격퇴할 전투력을 가졌더라면, 미국군이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리비아군이 미국군의 침공을 격퇴하려면 미국군 전략거점을 타격할 작전능력이 있어야 한다. 만일 리비아군이 미국군의 선제공습을 받은 즉시 반격에 나서 지중해 지역의 미국군 군사기지를 한 곳이라도 타격하였다면, 전세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군이 영국군, 프랑스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선제공습을 계속하는데도 이미 완벽히 무장해제당한 리비아군은 반격하지 못했으며, 무아마르 카다피는 2011년 10월 20일 반군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카다피 정권은 2011년 10월 23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만다.

3. 결과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후 시민군은 녹색 혁명을 상징하는 기존 국기에서 왕정 시절의 국기로 바꾼다.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이슬람주의파와 세속주의파 간의 갈등으로 분열됐고 2014년에는 다시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카다피 정권이 사라지고 힘의 공백이 생긴 현재 리비아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통합정부의 파예즈 사라지 총리, 리비아 동부 국토를 장악한 할리파 하프타르 군사령관, 동부 도시 토브룩에 소재한 토브룩 정부의 하원 이장 아그라 살레, 트리폴리 내 고등 평의회 의장 칼레드 미슈리 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다에쉬 등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은 세력들 간의 갈등을 이용해 2017년 중반까지 시르테(Sirte)를 포함한 여러 해안 도시의 통제권을 얻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2009년 기준 1인당 GDP가 $1만 6400에 달하던 리비아는 연속된 내전으로[* 리비아 국민소득, 1만6400달러에 달해 2016년 기준 $4035(2)까지 추락했다. 풍요로운 복지국가 리비아는 순식간에 전쟁난민이 넘치는 나라가 되어버렸음은 두 말 할 것 없다.

4.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