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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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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의 분할 === 이렇듯 정소연의 SF담론에서는 사회에 대한 문학의 역할이 상당히 많이 강조된다. 이는 정소연의 본의와 관계 없이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있어 최근의 문학 담론에서 제기되는 정치성의 문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특히 자크 랑시에르와 같이 '정치성'의 문제를 통념적으로 이해되는 '정치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주체성에 대한 개념으로 재정의한 학자들의 논의와 비슷한 면을 보여, 한번 비교해볼만 하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언어란 인간이 자기 주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자기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정 주류 세력의 정치만이, 다시 말해 사회적 주류의 생각만이 그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랑시에르는 문학이 이런 상황에서 소외된 인간들을 발굴해내고, 그럼으로서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목소리를 갖는 것이야말로 '주체'로 일어서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노예는, 그가 언어를 이해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 자크 랑시에르 저, 오윤성 역, 『감성의 분할』(서울:도서출판b, 2008), 14p]은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작업을 '감성의 분할'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이는 한 방향밖에 보지 못하던 사회의 시선(감성)을 분리하여 지금까지 지각되지 못했던 존재,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주목하게끔 하는 일을 이야기한다. 이 '느끼는 행위'를 통해서 여태껏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개인은 비로소 공동체 안의 주체로 인정받게 된다. 즉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좋은 문학이란 종전의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소수자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발굴해내는, 말하자면 '전위'로서의 문학이다. 정소연에게서 재정의된 '경이감'이라는 개념 또한 경이감을 인간에 대한 인식의 확장과 관련하여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한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정소연 개인의 문학관을 주류 지향적이냐 아니냐 하는 따위의 주장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다만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SF에 대한 정소연의 담론이 SF와 기존의 리얼리즘 문학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가능성이 SF팬덤 중 SF를 '기존의 문학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문학이자 기존 리얼리즘문학의 대안'인 마냥 이해하는 선민주의자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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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성의 분할 === 이렇듯 정소연의 SF담론에서는 사회에 대한 문학의 역할이 상당히 많이 강조된다. 이는 정소연의 본의와 관계 없이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있어 최근의 문학 담론에서 제기되는 정치성의 문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특히 자크 랑시에르와 같이 '정치성'의 문제를 통념적으로 이해되는 '정치 권력'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주체성에 대한 개념으로 재정의한 학자들의 논의와 비슷한 면을 보여, 한번 비교해볼만 하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언어란 인간이 자기 주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자기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정 주류 세력의 정치만이, 다시 말해 사회적 주류의 생각만이 그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랑시에르는 문학이 이런 상황에서 소외된 인간들을 발굴해내고, 그럼으로서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목소리를 갖는 것이야말로 '주체'로 일어서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노예는, 그가 언어를 이해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 자크 랑시에르 저, 오윤성 역, 『감성의 분할』(서울:도서출판b, 2008), 14p]은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작업을 '감성의 분할'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이는 한 방향밖에 보지 못하던 사회의 시선(감성)을 분리하여 지금까지 지각되지 못했던 존재,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주목하게끔 하는 일을 이야기한다. 이 '느끼는 행위'를 통해서 여태껏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개인은 비로소 공동체 안의 주체로 인정받게 된다. 즉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좋은 문학이란 종전의 사회가 주목하지 않았던 소수자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발굴해내는, 말하자면 '전위'로서의 문학이다. 정소연에게서 재정의된 '경이감'이라는 개념 또한 경이감을 인간에 대한 인식의 확장과 관련하여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한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정소연 개인의 문학관을 주류 지향적이냐 아니냐 하는 따위의 주장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다만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SF에 대한 정소연의 담론이 SF와 기존의 리얼리즘 문학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가능성이 SF팬덤 중 SF를 '기존의 문학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문학이자 기존 리얼리즘문학의 대안'인 마냥 이해하는 선민주의자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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