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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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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후반기(1943~1945) ==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독일군은 최신식 전차인 티거를 앞세워 동부전선에서의 마지막 공세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쿠르스크 전투다. 1943년 7월과 8월사이에 전개된 쿠르스크 전투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군사 지도부는 독일군과의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했고, 대규모의 병력 투입과 반격을 통해서 독일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양측 모두 1만 대 이상의 탱크가 투입됐던 쿠르스크 전투는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소련은 이 전투에서 7천대 이상의 T-34 전차를 잃었지만, 성능이 좋은 티거와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진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1941년 독일군이 거침없는 진격을 했듯이, 독일군을 상대로 전격전을 아주 잘 수행하는 훈련된 군대로 거듭난다. 1943년 5월 아프리카 전투가 끝난 이후 영미 연합군은 1943년 7월 허스키 작전을 전개하여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시칠리아 섬 상륙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본토에도 상륙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나가면서 점진적으로 진격해 나간다. 여기에 더해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을 가지게 되고, 이때부터 전후 문제를 논의하게 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미연합군은 1944년 1월 부터 5월까지 몬테 카시노에서 전투를 치렀고, 영미 연합군은 4개월 간의 전투끝에 승리했다. 그외에도 영미연합군은 안치오 상륙 작전을 전개하고, 9월에는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영미연합군은 수도 로마를 향해 진군하게 된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축출되고 이탈리아 남부에는 살로 공화국이 서게 된다. 당시 스탈린은 영미연합군에게 제2전선을 형성해달라는 요청을 거듭 반복했는데. 이것은 1944년 6월이 되서야 이루어 졌다.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이 개시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대략 4년간의 준비 끝에 성사된 작전이었다. 비행기 1만대와 수천대의 함대를 동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영미연합군의 막대한 손실을 내고 성공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하기 위한 진격을 해나가게 된다. 이런 연합군의 상륙에 힘입어 프랑스에 있던 레지스탕스들은 1944년 8월 수도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영미연합군은 이들과 협력하여 8월 말에 수도 파리를 해방시킨다. 파리 해방 이후 영미 연합군은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했고, 마켓가든 작전을 전개했지만 아쉽게도 그 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마켓가든 작전 이후 1944년 12월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아르덴 대공세라 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에서 벌지 전투를 치렀지만, 이 전투는 1945년 2월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독일군은 후퇴하게 된다. 한편 영미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개한 이후 소련군은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를 900일 간의 포위 끝에 그 포위망을 뚫음으로서 되찾았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은 동부 전선 전역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을 전개하면서 나치 독일 치하의 유럽을 차츰차츰 해방시켜 나갔다. 1944년 7월에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등을 해방시키고, 폴란드 국경근처까지 도착했으며, 8월에는 루마니아까지 해방시켰다. 그해 9월에는 바르샤바 봉기 이후 소련군이 1945년 1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하면서 폴란드까지 해방시킨다. 이후 소련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슬로바키아를 해방시키고, 유고슬라비아까지 해방시킨다. 유고슬라비아에선 4년 전 독일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티토의 유격대와 함께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으며, 소련군은 폴란드 해방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르 보여주는 유대인 수용소 대다수를 해방시킨다. 이러한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은 1945년 4월 독일 국경지대를 넘었고,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진격하게 된다. 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서쪽에서 진격하던 영미연합군은 1945년 4월 후반에 서로 만나게 되고, 베를린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른 뒤 그해 5월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전쟁을 일으켰던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하며 생을 마감한다. 태평양에서는 일본군의 저항이 계속됐다. 1943년 11월 타라와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1944년 사이판 전투와 펠렐리우 섬 전투 그리고 필리핀 전투와 레이테만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특히나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전함인 야마토함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 본토에서도 국공합작으로 뭉친 중국군이 일본군을 상태로 전투를 치렀고, 청두 전투와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1944년 말 필리핀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1945년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쏟아 부었고, 1945년 2월엔 일본하고 가까운 이오지마 섬에 상륙하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는 그해 3월에 미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그해 4월부터 미군은 일본의 오키나와 섬에 상륙한다. 오키나와 전투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는 과정속에서도 지속됐고, 미군은 극심한 사상자를 낸 채 6월이 되서야 오키나와를 함락시킨다. 1945년 5월 유럽에서는 전쟁이 끝났지만, 태평양은 아니었다. 1943년 카이로와 테헤란 1945년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던 연합국 지도자들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전후 처리 과정을 다시한번 논하게 된다. 포츠담 회담에서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트루먼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합의봤고,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도 항복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다 2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게 된다. 이러는 사이 소련군은 만주에서 진격해 내려왔고, 만주와 몽골, 중국 일부, 사할린을 포함한 쿠릴열도와 한반도 이북까지 접수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천황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게 되고, 9월 2일에 공식적으로 항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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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후반기(1943~1945) ==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독일군은 최신식 전차인 티거를 앞세워 동부전선에서의 마지막 공세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쿠르스크 전투다. 1943년 7월과 8월사이에 전개된 쿠르스크 전투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군사 지도부는 독일군과의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했고, 대규모의 병력 투입과 반격을 통해서 독일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양측 모두 1만 대 이상의 탱크가 투입됐던 쿠르스크 전투는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소련은 이 전투에서 7천대 이상의 T-34 전차를 잃었지만, 성능이 좋은 티거와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진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1941년 독일군이 거침없는 진격을 했듯이, 독일군을 상대로 전격전을 아주 잘 수행하는 훈련된 군대로 거듭난다. 1943년 5월 아프리카 전투가 끝난 이후 영미 연합군은 1943년 7월 허스키 작전을 전개하여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시칠리아 섬 상륙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본토에도 상륙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나가면서 점진적으로 진격해 나간다. 여기에 더해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을 가지게 되고, 이때부터 전후 문제를 논의하게 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미연합군은 1944년 1월 부터 5월까지 몬테 카시노에서 전투를 치렀고, 영미 연합군은 4개월 간의 전투끝에 승리했다. 그외에도 영미연합군은 안치오 상륙 작전을 전개하고, 9월에는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영미연합군은 수도 로마를 향해 진군하게 된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축출되고 이탈리아 남부에는 살로 공화국이 서게 된다. 당시 스탈린은 영미연합군에게 제2전선을 형성해달라는 요청을 거듭 반복했는데. 이것은 1944년 6월이 되서야 이루어 졌다.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이 개시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대략 4년간의 준비 끝에 성사된 작전이었다. 비행기 1만대와 수천대의 함대를 동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영미연합군의 막대한 손실을 내고 성공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하기 위한 진격을 해나가게 된다. 이런 연합군의 상륙에 힘입어 프랑스에 있던 레지스탕스들은 1944년 8월 수도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영미연합군은 이들과 협력하여 8월 말에 수도 파리를 해방시킨다. 파리 해방 이후 영미 연합군은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했고, 마켓가든 작전을 전개했지만 아쉽게도 그 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마켓가든 작전 이후 1944년 12월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아르덴 대공세라 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에서 벌지 전투를 치렀지만, 이 전투는 1945년 2월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독일군은 후퇴하게 된다. 한편 영미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개한 이후 소련군은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를 900일 간의 포위 끝에 그 포위망을 뚫음으로서 되찾았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은 동부 전선 전역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을 전개하면서 나치 독일 치하의 유럽을 차츰차츰 해방시켜 나갔다. 1944년 7월에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등을 해방시키고, 폴란드 국경근처까지 도착했으며, 8월에는 루마니아까지 해방시켰다. 그해 9월에는 바르샤바 봉기 이후 소련군이 1945년 1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하면서 폴란드까지 해방시킨다. 이후 소련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슬로바키아를 해방시키고, 유고슬라비아까지 해방시킨다. 유고슬라비아에선 4년 전 독일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티토의 유격대와 함께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으며, 소련군은 폴란드 해방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르 보여주는 유대인 수용소 대다수를 해방시킨다. 이러한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은 1945년 4월 독일 국경지대를 넘었고,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진격하게 된다. 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서쪽에서 진격하던 영미연합군은 1945년 4월 후반에 서로 만나게 되고, 베를린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른 뒤 그해 5월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전쟁을 일으켰던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하며 생을 마감한다. 태평양에서는 일본군의 저항이 계속됐다. 1943년 11월 타라와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1944년 사이판 전투와 펠렐리우 섬 전투 그리고 필리핀 전투와 레이테만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특히나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전함인 야마토함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 본토에서도 국공합작으로 뭉친 중국군이 일본군을 상태로 전투를 치렀고, 청두 전투와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1944년 말 필리핀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1945년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쏟아 부었고, 1945년 2월엔 일본하고 가까운 이오지마 섬에 상륙하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는 그해 3월에 미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그해 4월부터 미군은 일본의 오키나와 섬에 상륙한다. 오키나와 전투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는 과정속에서도 지속됐고, 미군은 극심한 사상자를 낸 채 6월이 되서야 오키나와를 함락시킨다. 1945년 5월 유럽에서는 전쟁이 끝났지만, 태평양은 아니었다. 1943년 카이로와 테헤란 1945년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던 연합국 지도자들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전후 처리 과정을 다시한번 논하게 된다. 포츠담 회담에서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트루먼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합의봤고,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도 항복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다 2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게 된다. 이러는 사이 소련군은 만주에서 진격해 내려왔고, 만주와 몽골, 중국 일부, 사할린을 포함한 쿠릴열도와 한반도 이북까지 접수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천황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게 되고, 9월 2일에 공식적으로 항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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