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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23:49:56 | 조회수 :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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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次世界大戰 / World War II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대략 6년간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약 20년 만에 일어났다. 대략 5천만에서 6천 5백만 이상의 사람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전쟁의 양상이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더 많이 죽게 되었고,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전쟁 당시 일어났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해를 낳은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다.

이 전쟁의 영향으로 국제연합(UN)이 창설되었고, 식민 제국들의 몰락이 가속화 되었으며, 미국 달러 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가 수립(브레튼우즈 협정)되었고, 소련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사회주의권 국가가 탄생하면서 냉전체제가 수립되었다.

목차

1. 배경
2. 전쟁 전반기(1939~1941)
3. 전쟁 중반기(1941~1943)
4. 전쟁 후반기(1943~1945)
5. 영상

1. 배경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자 미국과 같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았다. 일본이나 독일도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공했고, 히틀러는 혼란스러운 독일 정세를 틈타 1933년 1월 정권을 잡는다. 히틀러 정권은 경제를 재건시키고, 군비를 증강시키는가 하면, 1936년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라인란트 지역을 합병한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1932년 상해 사변을 일으켰고, 만주지역에서 부터 중국 영토를 차츰 점령해 나갔다.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점령했으며,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1936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프랑코에 의해 내전이 일어나자, 군대를 보내어 파시스트 세력들을 도왔다. 반대로 영국과 프랑스 미국 그리고 소련은 반프랑코 세력을 지원했다. 1938년 히틀러는 주변국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했고, 193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국민당의 수도 남경에서 대략 20~30만이나 되는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고, 중국 대륙에서 전쟁을 이어나가며 승승장구 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1939년 노몬한에서 소련군과 붙었지만, 소련군을 무시했던 일본군은 말 그대로 대패했다.

라인란트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까지 합병한 히틀러는 또 다른 나라의 영토를 요구하게 되는데 바로 폴란드령 단치히가 그것이었다. 이번에는 폴란드까지 영토야욕을 히틀러가 드러내자 영국과 프랑스가 가만있지 않았으나, 히틀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1939년 8월 리벤트로프를 모스크바로 보내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게 했고,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게 된다.

2. 전쟁 전반기(1939~1941)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침공 당시 독일군은 160만 명의 병력과, 3600대의 탱크, 6000대의 화포와 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당시 독일은 전격전(Blitz Krieg)이라고 하여 전차와 항공기 그리고 기계화된 보병을 이용한 작전을 구사했다. 이 전술은 상대측의 허점을 찔러 파고드는 형대의 공격 전술로서 굉장히 치명적이었고, 무엇보다 기동력이 추가된 신속한 공격이었기에, 단기간에 걸처 상대측의 군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가 폴란드까지 침공하자 한 때 평화를 갈구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과정에서 스탈린의 소련도 폴란드를 공격했고, 소련은 폴란드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은 1939년 겨울 핀란드를 침공했는데, 막대한 사상자만 내면서 결국 핀란드에서 물러났다. 폴란드에서 만족하지 않은 히틀러는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단순에 점령했다. 그리고 그 해 5월 나치독일은 프랑스와 서유럽을 침공하며 지난 해 폴란드 침공에서 보였던 전격전을 구사했다. 독일군의 서유럽 진격에는 대략 135개의 독일군 사단과 2400대의 탱크 3000여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서유럽으로 거침없이 진격하던 독일군은 당연히 프랑스가 공들여 만들어 놓았던 마지노선을 우회했고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를 단기간에 점령했다. 1940년 5월 말에서 6월 사이 프랑스에서 독일군에 맞서 방어하던 영국군과 프랑스군, 폴란드 서부군, 네덜란드군, 벨기에군 그리고 캐나다군은 덩케르크에서 굴욕적인 철수를 감행해야 했었다. 프랑스까지 점령한 히틀러는 수도 파리에 도착하여 기념 퍼레이드까지 하게 된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점령한 독일은 프랑스를 절반으로 나눈다.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간에 삼국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추축국(Axis Power)을 형성하였다. 중국과의 전쟁을 지속중이던 일본은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함락하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고, 더 나아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황된 구호아래 동남아시아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구 식민지 세력들을 위협했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에게 석유 수출을 금지하게 되었고, 이에 타격을 받은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1941년 4월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1940년 6월 전격전이라는 작전을 구사하여 단기간에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은 바다 넘어 있는 영국을 공격할 준비를 하게 되었고, 수천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영국을 무차별 폭격하였다. 초반에는 주로 영국군의 군사 시설을 공격했지만, 독일군 조종사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투하하고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영국이 베를린에 몇 방의 폭탄을 투하하자 분노한 히틀러는 영국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영국에서 개발한 스핏츠 파이어 같은 항공기가 독일의 항공기 보다 성능이 좋았기 때문이다. 1940년 10월 31일 본토 항공전은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독일군의 산발적인 야간 공습은 지속되었다. 해가 넘어 1941년에도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을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에 감행했고, 1941년 5월 10일 독일공군은 대략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을 런던에 감행한 것을 시작으로 런던에 대한 폭격을 중지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독일 군대은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토 항공전 기간 동안 독일은 총 1800대 이상의 전투기를 잃었던 데에 비해 영국은 총 150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아무튼 히틀러는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진전을 보이지 않자 서부전선에 있던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시키게 되는데, 소련과의 전쟁 준비를 위함이었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지만, 곧 교착 상태가 되며 그리스가 알바니아로 공세를 펼쳤다. 1940년 12월, 영연방군은 반격을 시작하며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 전진을 시작했다. 1941년 초, 이탈리아군이 리비아 내로 후퇴하자, 처칠은 그리스를 방어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의 병력을 그리스로 증원했다. 이탈리아 해군은 영국 해군에 의해 타란토 전투에서 3척의 전함을 잃고, 캐이프 마타펜 전투에서 다른 함선도 더 잃었다. 독일은 곧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개입했다. 히틀러는 2월에 북아프리카에 병력을 증원하고, 명장 에르빈 롬멜 장군을 보냈다. 1941년 4월 히틀러는 그리스에 있는 크레타 섬에 대규모의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여 단번에 점령했고,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이로써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유럽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 만조하지 않은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300만 대군을 동원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하게 된다.

1941년 6월 22일 2300대의 전차와 3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300만 대군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소련군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한 당일에 대략 1200대의 주력 항공기를 지상에서 잃었었다. 그 바람에 1941년 11월 말에는 모스크바 외곽까지 밀렸고,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으며, 독일군은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향해 진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1년 6월 히틀러의 독일이 침략하자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우랄산맥을 거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전하여, 소련군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소총과 기관총 등을 대량으로 생산해냈고, 1941년 11월 7일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하면서 소련 인민을 단결시켰다. 그 결과 소련의 겨울을 준비하지 못했던 히틀러의 군대는 모스크바 외각에서 진격을 멈췄고, 1942년 1월 소련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때맞춰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기지를 폭격하면서 미국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3. 전쟁 중반기(1941~1943)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고난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일본의 동맹국이던 이탈리아와 나치독일도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이 시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연합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을 선보인 일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령 필리핀을 침공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영국령 홍콩과 말레이시아, 버마(현재 미얀마), 그리고 싱가폴을 점령했고, 인도네시아와 파푸아 뉴기니까지 점령했으며, 알래스카의 알류산 열도와 괌과 사이판 그리고 웨이크 섬까지 차례대로 점령했다. 1942년 5월까지 태평양에서의 일본군은 승승장구했다. 1942년 1월 모스크바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독일군의 진격은 거침없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독일군은 다시 진격을 개시했다. 그해 봄부터 진격을 개시한 독일군은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해 나갔고, 1942년 8월과 9월 사이 스탈린그라드의 볼가강 지역에서 소련군과 교전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1941년에 아프리카 전선에 배치된 독일의 에르빈 롬멜 장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을 차례대로 격파하며 이집트의 카이로로 진격해 나갔다. 적어도 1942년 중후반까지의 전세는 독,이,일을 중심으로 하는 추축국에게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여러 전환점을 맞게 되면서 전황은 점점 추축국에게 불리해져 갔다.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한 독일군은 그 도시 지역에서 소련군과의 시가전을 반복해가며 지쳐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찾아왔다. 1942년 말에 찾아온 겨울은 스탈린그라드에 발이 묶인 독일군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소련군으로 하여금 독일군을 포위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1943년 2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휘하의 독일군 20만 명은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독일군은 더 이상 진격이 아닌 후퇴를 반복해야 했고, 오히려 소련군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보여주었던 독일군의 모습을 체계적으로 닮아 갔다. 비록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적잖은 소련군이 전사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독일군에게 대패를 안겨준 소련군은 보다 더 체계적인 군대로 변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독일군을 섬멸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진격해나갔다.

북아프리카에서 활약하던 롬멜 장군 휘하의 독일군들은 1942년 8~9월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 지역에서 전투를 겪고난 이후 부터 진격을 멈추게 되었다. 당시 영국군을 이끌었던 몽고메리 장군은 독일군에 맞서 점진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거기다 북아프리카 전선에 미군까지 투입되면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부담은 더 커졌다. 특히나 알제리와 모로코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이는 독일군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독일군은 본국으로 부터 지원 병력을 받지 못했고, 미군까지 합세한 영국군의 공세를 받았다. 그 결과 독일군은 이집트에서 리비아 그리고 튀니지까지 철수했고, 1943년 5월 북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한 영미연합국은 무솔리니가 있는 이탈리아에 상륙할 준비를 하게 된다.

또한 태평양 전선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으로 단결된 중국군이 일본군에 맞서 여러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1942년 5월 7일과 8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쪽에 있는 산호해 전투에서 연합국은 승리를 거두었다. 1942년 6월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을 파괴했고, 순향함 1척과 전투기 248대를 파괴했다. 그리고 몇 달 후인 1942년 8월 솔로몬 제도에서 반격에 나섰고, 특히나 과다카날 섬 전투에서 6개월 간의 전투 끝에 적잖은 일본군을 섬멸했다. 1942년과 1943년을 거치면서 미군을 중심으로한 연합국은 태평양에서 재해권을 장악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에 맞서 반격해 나갔다.

4. 전쟁 후반기(1943~1945)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난 이후 독일군은 최신식 전차인 티거를 앞세워 동부전선에서의 마지막 공세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쿠르스크 전투다. 1943년 7월과 8월사이에 전개된 쿠르스크 전투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군사 지도부는 독일군과의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했고, 대규모의 병력 투입과 반격을 통해서 독일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 양측 모두 1만 대 이상의 탱크가 투입됐던 쿠르스크 전투는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소련은 이 전투에서 7천대 이상의 T-34 전차를 잃었지만, 성능이 좋은 티거와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함으로써 동부전선에서 진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1941년 독일군이 거침없는 진격을 했듯이, 독일군을 상대로 전격전을 아주 잘 수행하는 훈련된 군대로 거듭난다.

1943년 5월 아프리카 전투가 끝난 이후 영미 연합군은 1943년 7월 허스키 작전을 전개하여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시칠리아 섬 상륙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본토에도 상륙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나가면서 점진적으로 진격해 나간다. 여기에 더해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회담을 가지게 되고, 이때부터 전후 문제를 논의하게 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영미연합군은 1944년 1월 부터 5월까지 몬테 카시노에서 전투를 치렀고, 영미 연합군은 4개월 간의 전투끝에 승리했다. 그외에도 영미연합군은 안치오 상륙 작전을 전개하고, 9월에는 칼라브리아에 상륙하여 영미연합군은 수도 로마를 향해 진군하게 된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축출되고 이탈리아 남부에는 살로 공화국이 서게 된다.

당시 스탈린은 영미연합군에게 제2전선을 형성해달라는 요청을 거듭 반복했는데. 이것은 1944년 6월이 되서야 이루어 졌다.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이 개시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대략 4년간의 준비 끝에 성사된 작전이었다. 비행기 1만대와 수천대의 함대를 동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영미연합군의 막대한 손실을 내고 성공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영미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하기 위한 진격을 해나가게 된다. 이런 연합군의 상륙에 힘입어 프랑스에 있던 레지스탕스들은 1944년 8월 수도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영미연합군은 이들과 협력하여 8월 말에 수도 파리를 해방시킨다. 파리 해방 이후 영미 연합군은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했고, 마켓가든 작전을 전개했지만 아쉽게도 그 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마켓가든 작전 이후 1944년 12월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아르덴 대공세라 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에서 벌지 전투를 치렀지만, 이 전투는 1945년 2월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독일군은 후퇴하게 된다.

한편 영미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개한 이후 소련군은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를 900일 간의 포위 끝에 그 포위망을 뚫음으로서 되찾았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은 동부 전선 전역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을 전개하면서 나치 독일 치하의 유럽을 차츰차츰 해방시켜 나갔다. 1944년 7월에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등을 해방시키고, 폴란드 국경근처까지 도착했으며, 8월에는 루마니아까지 해방시켰다. 그해 9월에는 바르샤바 봉기 이후 소련군이 1945년 1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하면서 폴란드까지 해방시킨다. 이후 소련군은 거침없이 진격하여 슬로바키아를 해방시키고, 유고슬라비아까지 해방시킨다. 유고슬라비아에선 4년 전 독일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티토의 유격대와 함께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으며, 소련군은 폴란드 해방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르 보여주는 유대인 수용소 대다수를 해방시킨다. 이러한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은 1945년 4월 독일 국경지대를 넘었고,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진격하게 된다. 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서쪽에서 진격하던 영미연합군은 1945년 4월 후반에 서로 만나게 되고, 베를린 공방전에서 소련군은 치열한 전투를 치른 뒤 그해 5월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전쟁을 일으켰던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하며 생을 마감한다.

태평양에서는 일본군의 저항이 계속됐다. 1943년 11월 타라와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1944년 사이판 전투와 펠렐리우 섬 전투 그리고 필리핀 전투와 레이테만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특히나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전함인 야마토함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 본토에서도 국공합작으로 뭉친 중국군이 일본군을 상태로 전투를 치렀고, 청두 전투와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1944년 말 필리핀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1945년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쏟아 부었고, 1945년 2월엔 일본하고 가까운 이오지마 섬에 상륙하게 된다. 이오지마 전투는 그해 3월에 미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그해 4월부터 미군은 일본의 오키나와 섬에 상륙한다. 오키나와 전투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는 과정속에서도 지속됐고, 미군은 극심한 사상자를 낸 채 6월이 되서야 오키나와를 함락시킨다.

1945년 5월 유럽에서는 전쟁이 끝났지만, 태평양은 아니었다. 1943년 카이로와 테헤란 1945년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던 연합국 지도자들은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전후 처리 과정을 다시한번 논하게 된다. 포츠담 회담에서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트루먼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합의봤고, 일본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도 항복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9일에는 나가사키에다 2개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게 된다. 이러는 사이 소련군은 만주에서 진격해 내려왔고, 만주와 몽골, 중국 일부, 사할린을 포함한 쿠릴열도와 한반도 이북까지 접수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천황은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게 되고, 9월 2일에 공식적으로 항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5.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