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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최근 수정 시각 : 2023-04-03 19:05:29 | 조회수 : 28

김재규(한자: 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군인, 정치인이다.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부장이기도 했다.

목차

1. 10.26 사건
2. 약력
3. 인용문
4. 영상

1. 10.26 사건

차치철의 오만함에 욱하는 심정으로 저질렀다는 의견이 있다. 단 김재규는 차지철을 쏴 죽일 때 "이 버러지 같은 놈!"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고 심수봉이 증언했다.(1) 이는 차지철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을 강조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당시 수사본부장 전두환)의 조작이라는 의견이 있다. 사실 그와 같이 10.26을 '사감으로 인해 일어난 우발적 사태'로 몰아갔던 것은 군사독재의 연장을 꿈꿨던 전두환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는데, 김재규의 주장처럼 10.26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결단'으로 인정해 버리는 것은 당시 민중의 민주주의 열망을 자극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약력

  • 1926년 3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 선산읍)에서 출생.
  • 1943년 안동농림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중등교원양성소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 김천중·고교에서 교직생활을 함.
  • 국군 창설 당시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교하여 1946년 12월 제2기생으로 졸업.
  • 1954년 제5사단 제36연대장.
  • 1957년 육군대학부총장.
  • 1963년 제6사단장.
  • 1966년 제6관구 사령관과 방첩대장.
  • 1969년 육군보안사령관.
  • 1971년 제3군단장. 이후 중장으로 예편.
  • 1973년 유신정우회 소속 제9대 국회의원이 됨.
  •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제13대 건설부 장관을 역임.
  •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에 임명.
  • 1979년 10.26 사건
  •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으로 사망

3. 인용문


부마항쟁은 김재규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김재규는 부산에 내려가서 사태를 파악한 결과, 그것이 일반 국민들의 폭넓은 반정부 감정이 폭발한 자발적인 민중봉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유신정권의 강압적 통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아주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그 불만의 정당성을 확실하게 인정했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마사태가 발생한 이후 김재규는 말수가 줄어드는 등 그의 태도에 있어서 상당한 변화를 보였다. 또한 김재규는 자신의 손아랫 동서가 부산사태를 가리켜 '반란'이라는 표현을 쓰자, 그러한 부정적 의미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꾸짖고 '민중봉기'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또한 (부하인) 박선호에게 '흐르는 물을 막을 수는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0·26 사건의 원인 분석: 김재규의 행위와 동기를 중심으로


10·26 당시 부산지방법원장을 하던 분을 나중에 만난 적이 있다. 김 장군이 10·26 직전에 부마사태를 직접 보기 위해 부산에 내려와서 기관장 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석상에서 김 장군이 강조한 첫 번째 사항이 국군이 국민에게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국민이 국군에게 대항해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의의 끝자락에서 김 장군이 '이런 상황에서는 제3의 길 밖에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0·26이 터지고 나서야 제3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부산지방법원장이 말했다.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서: 김진우가 본 인간 김재규

4.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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