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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逸 / Bundesrepublik Deutschland /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독일은 중부 유럽에 있는 나라이며, 수도는 베를린이다. 독일어로는 도이칠란트(Deutschland)로, 정식 명칭은 독일 연방 공화국이다. 인구는 2017년 기준 80,594,017이다. 내각책임제 국가이다. 행정수반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이다.
1. 명칭 ✎ ⊖
'독일(獨逸)'이라는 명칭은 일본식 음차다. 이걸 일본식으로 읽으면 도이치(ドイツ)가 된다. 중국식 음차는 덕의지(德意志), 중국식으로 읽으면 더이즈(déyìzhì)가 된다. 중국 사람들은 덕의지 첫 글자에 나라 국(國) 자을 붙여서 더궈=덕국(德國)이라고 부른다.
2. 역사 ✎ ⊖
현재 독일은 게르만족이 살던 게르마니아(Germania)(1) 지역의 일부에 위치해 있다. 프랑크족의 왕국 분열 이후, 동프랑크 왕국이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단절 이후, 독일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이 세워졌으며, 신성 로마 제국이 국력이 약화되면서 끝내 붕괴되자 다수의 국가가 독립하고 프로이센 왕국과 라인 동맹 등이 설립되었다.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독일 제국이 통일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11월 혁명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 공화국은 나치당의 집권으로 나치 독일이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네 지역(2)으로 분할 점령되었다. 이후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었으며,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현재의 독일이 통일되었다.
프로이센 왕국 주도로 독일 제국이 통일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11월 혁명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 공화국은 나치당의 집권으로 나치 독일이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여 네 지역(2)으로 분할 점령되었다. 이후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었으며,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현재의 독일이 통일되었다.
3. 지리 ✎ ⊖
동쪽으론 폴란드, 남쪽으론 체코와 스위스, 오스트리아, 서쪽으론 프랑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북쪽으론 북해, 발트해와 접한다.
4. 이미지 ✎ ⊖
첨단 과학기술과 자동차, 정밀기계 등 공산품의 뛰어남으로 유명하다. 의료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복지의 수준도 다른 서방 국가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상당히 높다.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시작해서 2차대전 이후로는 기민당 같은 주류 우파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장해 독일의 복지제도를 확립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과 대비하여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서의 과거를 철저하게 청산하고 반성하는 나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또한 높은 시민 의식을 지닌 시민 사회로서의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인 것일 뿐, 실상을 들여다 보면, 상당 부분이 이미지 세탁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나치 독일의 악명높은 인종학살은 유대인 뿐 아니라, 롬족(통칭 '집시')에게도 가해졌는데, 이스라엘 및 유럽 거주 유대인들에 대해서와는 달리 독일 정부는 롬족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한 적이 없다. 전후 그 어떤 재판에서도 롬족들에 대한 배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이 롬족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과 인종청소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도 패전 후 무려 수십년이 지난 1982년(당시 서독)에 이르러서였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롬족들은 독일을 비롯한 서방 사회에서 여전히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발칸 지역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와 학살에 대해서도 독일은 직, 간접적으로 역사적인 책임이 있음에도 홀로코스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나치 독일은 크로아티아의 극우 파시스트 민병대 '우스타샤'를 내세워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우스타샤는 수십만에 이르는 세르비아인, 롬족, 유대인, 좌파 내지는 반파시스트 성향의 크로아티아인 및 보스니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수십년이 지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각 구성국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각 민족 간에 인종청소와 전쟁범죄가 자행되었는데, 이 때도 독일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써 중재와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크로아티아 독립 세력을 적극 지원했다. 독일이 지원한 크로아티아 독립 세력 중에는 반유대주의, 역사 수정주의적 성향을 띤 이들도 꽤 있었다.
나치 독일의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그리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는 나치 독일의 점령지 중 수많은 유대인들이 참혹하게 희생된 곳이자 가장 격렬한 민중적 저항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은 그리스에서 수억 라이히 마르크에 이르는 돈을 은행에서 강탈해갔으며, 민족해방을 내세운 빨치산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제재와 봉쇄 조치를 가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아사했다. 나치 독일의 점령으로 그리스 인구의 10퍼센트 가량이 사망했으며, 각종 인프라 및 기간 시설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그리스는 경제 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대의 그리스 좌파들 중 상당수가 좌익 내셔널리즘 및 반독 정서를 지닌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나치 독일의 점령과 2010년을 전후한 그리스 금융 위기 사이에 역사적 연속성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여러 구제금융과 긴축 조치가 독일을 위시한 유럽연합의 경제 침탈의 성격을 지닌다고 본다.
한편, 독일 사회에서는 차별과 혐오 언행에 대한 강력한 법적 조치가 있음에도 역사 수정주의와 인종주의적 행태로 물의를 빚고 있는 '페기다', '독일을 위한 대안' 같은 정당 및 단체들이 부상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종합해서 볼 때, 현대 한국 사회에서 통념으로 퍼져있는 '일본과 대비되는 모범 국가', '선진적인 의식을 지닌 시민 사회'로서 독일의 이미지는 서구에 대한 낭만적 대상화 내지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일본 시민 사회 내에서도 침략적 과거를 반성하고 문화적, 인종적 소수자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남한이 친미 군부 독재 정권이던 시대라 일본 내 양심적인 진보 및 좌파 세세력이 남한의 민중 세력과 교류할 창구가 많지 않았으며, 남한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후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우경화된 일본 사회의 모습이 현재 독일 사회와 대조되어 보이는 것은 이러한 맥락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독일이 일본과 다른 점이라면 자신들의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주변의 여러 지역 강국에 대해서는 과거사 청산과 반성 노력을 보여왔고, 일본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는 차이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과 대비하여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서의 과거를 철저하게 청산하고 반성하는 나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또한 높은 시민 의식을 지닌 시민 사회로서의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상대적인 것일 뿐, 실상을 들여다 보면, 상당 부분이 이미지 세탁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나치 독일의 악명높은 인종학살은 유대인 뿐 아니라, 롬족(통칭 '집시')에게도 가해졌는데, 이스라엘 및 유럽 거주 유대인들에 대해서와는 달리 독일 정부는 롬족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한 적이 없다. 전후 그 어떤 재판에서도 롬족들에 대한 배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이 롬족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과 인종청소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도 패전 후 무려 수십년이 지난 1982년(당시 서독)에 이르러서였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롬족들은 독일을 비롯한 서방 사회에서 여전히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발칸 지역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와 학살에 대해서도 독일은 직, 간접적으로 역사적인 책임이 있음에도 홀로코스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나치 독일은 크로아티아의 극우 파시스트 민병대 '우스타샤'를 내세워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우스타샤는 수십만에 이르는 세르비아인, 롬족, 유대인, 좌파 내지는 반파시스트 성향의 크로아티아인 및 보스니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다. 수십년이 지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각 구성국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각 민족 간에 인종청소와 전쟁범죄가 자행되었는데, 이 때도 독일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써 중재와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크로아티아 독립 세력을 적극 지원했다. 독일이 지원한 크로아티아 독립 세력 중에는 반유대주의, 역사 수정주의적 성향을 띤 이들도 꽤 있었다.
나치 독일의 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그리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는 나치 독일의 점령지 중 수많은 유대인들이 참혹하게 희생된 곳이자 가장 격렬한 민중적 저항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은 그리스에서 수억 라이히 마르크에 이르는 돈을 은행에서 강탈해갔으며, 민족해방을 내세운 빨치산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제재와 봉쇄 조치를 가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아사했다. 나치 독일의 점령으로 그리스 인구의 10퍼센트 가량이 사망했으며, 각종 인프라 및 기간 시설이 파괴되어 전후에도 그리스는 경제 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현대의 그리스 좌파들 중 상당수가 좌익 내셔널리즘 및 반독 정서를 지닌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나치 독일의 점령과 2010년을 전후한 그리스 금융 위기 사이에 역사적 연속성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여러 구제금융과 긴축 조치가 독일을 위시한 유럽연합의 경제 침탈의 성격을 지닌다고 본다.
한편, 독일 사회에서는 차별과 혐오 언행에 대한 강력한 법적 조치가 있음에도 역사 수정주의와 인종주의적 행태로 물의를 빚고 있는 '페기다', '독일을 위한 대안' 같은 정당 및 단체들이 부상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종합해서 볼 때, 현대 한국 사회에서 통념으로 퍼져있는 '일본과 대비되는 모범 국가', '선진적인 의식을 지닌 시민 사회'로서 독일의 이미지는 서구에 대한 낭만적 대상화 내지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일본 시민 사회 내에서도 침략적 과거를 반성하고 문화적, 인종적 소수자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남한이 친미 군부 독재 정권이던 시대라 일본 내 양심적인 진보 및 좌파 세세력이 남한의 민중 세력과 교류할 창구가 많지 않았으며, 남한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후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우경화된 일본 사회의 모습이 현재 독일 사회와 대조되어 보이는 것은 이러한 맥락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독일이 일본과 다른 점이라면 자신들의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주변의 여러 지역 강국에 대해서는 과거사 청산과 반성 노력을 보여왔고, 일본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는 차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