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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구름 전쟁

최근 수정 시각 : 2023-01-07 00:09:08 | 조회수 : 4

붉은 구름 전쟁(영어: Red cloud's war)은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있었던 수우, 샤이엔, 아라파호등의 서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연합과 백인들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무력충돌을 말한다.

목차

1. 배경
2. 전초전
3. 본격적인 충돌
4. 페터먼 전투
5. 또 하나의 사기극

1. 배경

1851년과 1858년 평원 인디언 추장들과 미국이 맺은 조약은 원주민들에게는 '원주민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는'선에서 백인들이 서부 해안가 도시들과 교류하기 위해 원주민 땅에 들어올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백인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원주민 땅에 무단으로 들어가 요새와 마을을 세워도 된다'는 뜻이었다. 콜로라도 주와 덴버 시는 이렇게 세워졌다. 1860년대 초 미국과 평화롭게 지내길 원했던 샌티 수우족이 비참하게 멸망하자 테톤, 양크톤 수우족은 1860년대부터 복수심에 불타 백인 거주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수우족 바로 남쪽에 거주하던 북부 샤이엔과 아라파호 족은 1864년 11월 시빙턴 대령이라는 인간 쓰레기의 주도로 백인과 잘 지내고 싶어하던 남부 샤이엔 주화파 추장들의 뒷통수를 쳐 죽인 샌드 크리크 학살 사건 때문에 완전히 미국과 싸울 마음을 굳히고 테톤 수우족 지파인 오글라라 부족과 합류하였다. 이 때부터 평원 인디언 부족들은 자신들이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느끼고 미국에 대항해 공동전선을 펴게 된다.

2. 전초전

백인들은 금광을 찾으려고 인디언 땅 한가운데에 낸 보즈먼 도로의 안전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1865년 8월 경 '인디언'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된 패트릭 코너 장군 휘하 3개 부대를 파우더 강으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이 군대는 남북전쟁 중에 징집되어 전쟁이 끝나고도 제대하지 못해 사기가 매우 낮은 군대였다. 코너 자신이 이끄는 부대는 8월 말 경 아라파호 족 마을 하나를 발견해 쑥대밭으로 만들었다(텅 강 전투). 그러나 남은 두 부대는 8월 중순부터 붉은 구름과 매부리코, 앉은 소 등이 이끄는 원주민 본대의 게릴라전에 말려들어 패주하고 있었고 9월이 되어서야 코너의 부대와 합류하여 파우더 강에 코너가 건설해 놓은 요새(리노 요새)에 틀어박혔다.

3. 본격적인 충돌

그 사이 1865년 가을과 1866년 초에 다코타 주지사인 뉴턴 에드먼즈와 샌티 족을 멸망시켰던 시블리는 대부분의 부족민들이 서쪽에서 전투를 벌이는 사이 상대적으로 동쪽에 머물러 있던 수우족 추장들에게 선물을 뿌리면서 화평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하지만 결국 붉은 구름 등의 영향력 있는 전투 추장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면 이 조약은 휴지조각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라라미 요새로 오면 물자를 주겠다는 소문을 뿌렸다. 이에 응해서 1866년 초부터 6월까지 붉은 구름을 포함한 2천명이 넘는 원주민 부족들이 라라미 요새로 백인들과 회담을 하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그 순간, 6월 13일 경 캐링턴 대령이 지휘하는 7백명 규모의 미군들이 라라미 요새로 접근했다. 그 부대의 목적 역시 파우더 강 유역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제서야 미군들이 자기 땅에 기웃거리던 목적을 정확하게 깨달은 원주민들은 분노하여 떠났고, 7월경부터 캐링턴의 부대 역시 게릴라전에 말려들게 되었다.

4. 페터먼 전투

원주민들의 게릴라에 휘말린 미군들은 이전에 건설했던 리노, 필 커니, 그리고 새로 건설한 스미스 요새 등에 틀어박혔다. 이미 초기 형태의 기관총이 쓰이기 시작한 시대라 원주민들은 구식 무기로는 진을 치거나 요새에 주둔한 미군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오글라라 족 전사인 등뼈(High back bone)과 노란독수리(Yelloweagle), 미친 말(Crazy horse) 등은 미군을 유인하여 추격하는 미군을 역격하는 전략을 입안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1866년 12월 21일에 원주민들은 페터먼 대위가 이끄는 80명 가량의 미군을 필 커니 요새 밖으로 유인해 내는 데 성공하여 매복 공격으로 그들을 도륙했다. 다만 원주민들도 200명이 죽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페터먼 전투라고 하는데, 미국 역사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뻔뻔하게도 페터먼 학살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원주민들이 미군을 아주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인데, 이는 원주민들이 샌드 크리크 학살 때 당한 것을 그대로 배워서 갚아준 것에 불과했다. 페터먼 전투는 미국 역사상 생존자가 한명도 돌아오지 않은 두 번째 전투로 기록되었다.

5. 또 하나의 사기극

페터먼 전투에 큰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캐링턴을 해임하고, 원주민들을 잘 구슬려 수용소로 제발로 걸어들어가게 하는 데 도가 튼 샌번과 앨프리드 설리 장군을 협상단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파우더 강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원주민들에게 이런 협상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유명한 장군인 윌리엄 테쿰세 셔먼과 인디언 문제 담당관인 나다니엘 테일러가 직접 나섰으나 역시 협상은 지지부진하였고 파우더 강 유역 요새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편, 그 때 한창 건설중이던 태평양 횡단 철도(유니온 퍼시픽 철도)까지 수우족 전사들의 습격을 받자 드디어 미국 정부는 보즈먼 도로와 인근 요새들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1868년 7월 경 마지막 미군이 파우더 강을 떠났고 11월에 붉은 구름은 라라미 요새로 가서 화평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 1868년의 조약이 말장난으로 점철된 사기문서였다는 사실은 10년도 지나지 않아 드러났지만, 그래도 검은 언덕 근처의 원주민들은 10년에 걸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