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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최근 수정 시각 : 2023-01-30 01:02:02 | 조회수 : 4

Sanctus Aurelius Augustinus(1), 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

4세기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 또한 주교로써 로마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며 많은 교회에서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고대 기독교의 교부로 존중받는다. 주요 저서로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고백록과 신국론 등이 있다.

목차

1.
1.1. 청년기
1.2. 회심
1.3. 교회 활동 및 말년
2. 트리비아
3. 영상

1.

그의 삶은 저서 고백록에서 전해진다.

1.1. 청년기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의 타가 스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트리키스는 이교도였으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지만 세례는 안 받았다. 그리고 고향 인근인 마다 우라에서 초등교육을 받았고 카르타고로 유학 가려고 했으나 가정 형편으로 중단하고, 370년에는 카르타고로 유학을 가서 수사학을 배운다.

372년에는 어떤 여자와 동거하여 사생아 아데오다투스를 낳았으나, 아데오다투스(372~388)는 단명했다. 그리고 동거 생활은 15년간 지속된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일을 이해하지 못해 절교를 선언한다. 이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존재의 문제에 골몰했는데 그 답을 마니교에서 찾았다 생각하고 373년에는 마니교도가 된다. 그러다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회의감이 들고 생각보다 마니교 지도자들이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신 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가, 383년에는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에서 수사학 교수로 일했으나 학생이 학비를 내지 않자 밀라노로 간다. 이곳에서 회심의 원인이 되는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만난다.

1.2. 회심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강론을 듣고 감명을 받았고, 내적 갈등을 겪은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여름 부활주일 날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일설에는 그가 바울의 로마서(13장 13~14절)을 읽고 세례를 받게 됐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자택 정원을 거닐며 고민하고 있었을 때, 어디선가 집에서 읽어라하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는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으로 와서 눈에 보이는 책을 펼쳤는데 그것이 바울의 로마서(13장 13~14절)이었다고 한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장 13~14절, 공동번역성서


어찌 됐든 이 시기에 그가 내적 갈등을 겪고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건 명확하다.

1.3. 교회 활동 및 말년

387년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아들과 친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때 도중에 어미니 모니카가 오스티아에서 사망한다. 388년에는 그는 재산을 털어 수도공동체와 같은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시기 그의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사망한다. 이때 만든 공동체는 이후 규모가 커져 성서연구회와 같이 됐고, 13세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만든 회칙을 바탕으로 탁발 수도회인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로 발족한다.

그러다, 391년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히포 레기우스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는다. 그후 그는 한때, 그의 종교였던 마니교와 자유의지와 인간의 도덕적완성을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주의와 도나투스 아리우스파 등의 이단에 대한 비판과 저술을 하였고 설교활동도 열심히 했다. 395년 발레리우스 주교가 노쇠하자 공동주교가되어 보좌하다가 발레레우스가 죽자 히포의 주교가 됐다. 이후 평생을 헌신하여 교회를 위해 살다가, 427년 반달족이 쳐들어오저 피난민들이 히포에 왔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였으므로 피신할 수도 있었으나, 피난민들을 돌보았다. 그러다 430년 8월 28일 반달족들이 히포를 반달하기 얼마전, 피난민을 돌보다 생긴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시편 7장을 읊으며 사망한다.

2. 트리비아

  • 그의 이름은 영어권에서는 성 어거스틴(s.t Agustine)이라고도 하며 종종 아우구스틴이라고 하기도 한다.
  • 종종 그는 데카르트와 비교되는데, 그는 당시 아카데메이아의 회의론자들에게 반박을 가하기 위해 "만일 내가 속고 있다면 나는 존재한다." 즉 의심하는 자아에 확실성을 통해 회의론을 반박했다. 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자는 신의 존재를 위해 후자는 철학의 확실성을 위해 만든 논증이라는 점이다.

3. 영상



(1) 성 아우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