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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는 중부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이다. 인구는 약 1억 천만명, 수도는 아디스아바바이다.
1. 지리 ✎ ⊖
적도 근처 고원지대라는 천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토 거의 대부분이 해발고도 1,000m가 넘는 고원지대이며, 덕분에 연교차가 거의 없이 1년 내내 초가을같은 날씨를 만끽할 수 있다. 그리고 적도 지방 답게 건기와 우기가 존재하고 우기가 아니면 상당히 건조한 기후여서 일교차는 매우 크다.
지정학적으로는 홍해의 출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홍해 쪽 영토를 확보할 수 있다면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해상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다. 악숨 왕국은 이런 위치를 이용해 전성기를 누렸으나 현재는 에리트레아가 독립해 나가면서 위와 같은 이점은 잃은 상태이다. 사막화와 산림파괴, 과도한 목축 등 반 이상은 본인들 탓이긴 하지만, 만성적이고 주기적인 대기근 문제를 겪고 있는 에티오피아에게는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항구를 차지하느냐 못하느냐는 사활이 걸린 문제라 오랜기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지정학적으로는 홍해의 출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홍해 쪽 영토를 확보할 수 있다면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해상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다. 악숨 왕국은 이런 위치를 이용해 전성기를 누렸으나 현재는 에리트레아가 독립해 나가면서 위와 같은 이점은 잃은 상태이다. 사막화와 산림파괴, 과도한 목축 등 반 이상은 본인들 탓이긴 하지만, 만성적이고 주기적인 대기근 문제를 겪고 있는 에티오피아에게는 식량을 수입할 수 있는 항구를 차지하느냐 못하느냐는 사활이 걸린 문제라 오랜기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2. 역사 ✎ ⊖
2.1. 고대 ✎ ⊖
이집트만큼은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사회를 형성하였으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의 리즈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악숨 왕국이 성립되어 홍해 해상무역로를 장악하면서 1~3세기경 최전성기를 누렸다. 또한 이 시기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고 이후에 에티오피아 정교회로 발전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지금도 주변국이 죄다 이슬람인 와중에 기독교 신자가 40%를 넘는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이다. 악숨 왕국은 중동 지역에 이슬람 왕국들이 번성하자 아라비아 반도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점점 쇠퇴해 가다가 7세기에는 이름만 남았고 10세기경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2.2. 중세 ✎ ⊖
악숨 왕국의 쇠퇴 이후 이 지역에는 호족들에 의한 소국들이 난립하였고, 그 중 자그위 왕조나 솔로몬 왕조 등이 잠시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솔로몬 왕조는 주변 이슬람 세력들의 물결 속에서 16세기부터 세력을 크게 상실하였다.
2.3. 근대 ✎ ⊖
솔로몬 왕조가 지리멸렬한 이후 1755년에서 1855년까지 에티오피아는 판관 시대(zemene masafint), 서양으로 따지면 일종의 대공위시대를 맞게 되어 거의 무정부 상대로 있다가, 지방 총독이던 테오드로스 2세(Tewodros)가 세력을 키우면서 나라꼴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에티오피아는 이 때 성립되었다고 본다. 테오드로스는 황제 자리에 올라 근대식 공장을 설치하고 군비를 강화하면서 호족들을 억누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과정에서 안으로는 반란, 밖으로는 오스만, 이집트, 제국주의 유럽 국가들과의 항쟁에 시달렸으며, 그러다가 1868년 아비시니아를 침공해 온 영국 원정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대권을 넘겨받은 요하네스 4세도 전쟁으로 일생을 보내다 전사하였다. 요하네스 4세가 전사하자 즉위한 메넬리크 2세(Menelik II)는 호족들에 의해 분열되어 있던 에티오피아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점차 동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넓혀가면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를 아드와 전투에서 물리쳐 제국주의의 물결에서 에티오피아를 지켜냈다. 하지만 메넬리크의 치세도 순탄치는 않아서 이 시기 에티오피아 대기근(1888~1892)로 인구의 1/3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1913년 메넬리크가 죽고 손자인 이야수(Lij Iyasu V)가 황제가 되었으나 이야수는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는 등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하였으므로 젊은 나이에 하라르 지방의 통치자가 된 마코넨 타파리(Lij Tafari Makonnen)의 주도로 폐위되었다. 마코넨 타파리는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자우디투(Zewditu)를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24세의 나이로 섭정에 올랐으며, 자우디투의 양자로 입적하여 황태자가 되었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현대화를 꽤 성공적으로 주도하였으며, 강력한 사회 개혁 정책을 밀고 나갔다.
2.4. 하일레 셀라시에 치세~현재 ✎ ⊖
1930년 자우디투가 죽자 마코넨 타파리는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1935년 이 지역을 노리던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였다. 에티오피아는 결사적으로 맞섰지만 패배하여 황제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잠시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2차 대전 기간인 1941년 영국이 이탈리아를 몰아내고 황제를 복위시켜 에티오피아는 해방되었고 즉시 연합국으로 참전하였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에도 남한 측에 육군을 파병하기도 하였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치세 후반에 들어가면서 점점 민주주의적 권력을 제한하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독재자가 되어갔다. 여기에 북쪽에서는 1962년 에리트레아 의회 해산을 계기로 에리트레아 무장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옆동네 소말리아와도 오가덴 지역을 두고 분쟁이 벌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회 불안은 점점 심해져 에티오피아는 실업과 기근, 잦은 쿠데타에 시달리게 되었고, 하일레 셀라시에는 1974년 공산주의 성향 군인이었던 멩기스투의 쿠데타로 인해 궁전에 유폐되었다가 다음해에 의문사하였다(사실상 살해된 것으로 추정). 멩기스투는 공산주의 정권을 세웠는데 말이 공산주의지 흔한 친소파 막장 독재자 중 하나였다. 멩기스투 시대에 수십만명 이상의 정치범 학살이 벌어졌고, 최대 2백만명의 기근+전쟁 사망자, 그리고 백만 단위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소말리아와 벌인 오가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신기할 지경... 멩기스투는 80년대 말에 들어 점점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할 조짐을 보이자 민정 복귀를 선언했지만 제도만 바뀌었을 뿐이지 독재정권인 것은 여전하였고, 1988년 좌파 계열 무장단체인 에티오피아 인민 해방 전선(EPLF, 이후 에티오피아 민주인민혁명 전선, EPRDF 으로 변경)이 결성되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EPRDF는 1991년 수도 아디스 아바바를 함락하고, 반란 지도자인 멜레스 제나위가 정권을 잡아 새로운 독재자로 즉위하였다. 이런 혼란상황을 틈타서 에리트레아가 1991년에는 사실상, 1993년에는 완전히 독립하여 에티오피아가 내륙국이 되는 바람에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멜레스 제나위는 이런 상황에서도 소말리아, 신생 에리트레아와 전쟁질을 멈추지 않다가 선황처럼 엄청난 기근 사망자와 정치범들을 양산하였다. 그는 5년간 대통령을 맡고 이후 16년간은 수상이 되어 21년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다가 사망하였고, 후임자로 하일레 마리암 데살렘 총리가 역시 독재자로 즉위하였다. 2000년대 말에 들어 미국발 경제 불황에서 반사효과를 얻어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고 있지만 그에 따라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다. 2018년 초 마리암 데살렘 총리는 최근 3년간의 반정부 소요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후임자로 아비 아메드 총리가 집권하여 정치 개혁을 약속하였다. 에티오피아 민중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약속은 허언은 아니었는지, 2018년 들어 에티오피아는 정치범 대규모 석방과 함께 상습적 기근과 정치불안을 야기하던 주변국들과의 오랜 분쟁 관계를 청산하기 시작하였고, 정치, 경제 개혁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치세 후반에 들어가면서 점점 민주주의적 권력을 제한하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면서 독재자가 되어갔다. 여기에 북쪽에서는 1962년 에리트레아 의회 해산을 계기로 에리트레아 무장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옆동네 소말리아와도 오가덴 지역을 두고 분쟁이 벌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회 불안은 점점 심해져 에티오피아는 실업과 기근, 잦은 쿠데타에 시달리게 되었고, 하일레 셀라시에는 1974년 공산주의 성향 군인이었던 멩기스투의 쿠데타로 인해 궁전에 유폐되었다가 다음해에 의문사하였다(사실상 살해된 것으로 추정). 멩기스투는 공산주의 정권을 세웠는데 말이 공산주의지 흔한 친소파 막장 독재자 중 하나였다. 멩기스투 시대에 수십만명 이상의 정치범 학살이 벌어졌고, 최대 2백만명의 기근+전쟁 사망자, 그리고 백만 단위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소말리아와 벌인 오가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신기할 지경... 멩기스투는 80년대 말에 들어 점점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할 조짐을 보이자 민정 복귀를 선언했지만 제도만 바뀌었을 뿐이지 독재정권인 것은 여전하였고, 1988년 좌파 계열 무장단체인 에티오피아 인민 해방 전선(EPLF, 이후 에티오피아 민주인민혁명 전선, EPRDF 으로 변경)이 결성되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EPRDF는 1991년 수도 아디스 아바바를 함락하고, 반란 지도자인 멜레스 제나위가 정권을 잡아 새로운 독재자로 즉위하였다. 이런 혼란상황을 틈타서 에리트레아가 1991년에는 사실상, 1993년에는 완전히 독립하여 에티오피아가 내륙국이 되는 바람에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멜레스 제나위는 이런 상황에서도 소말리아, 신생 에리트레아와 전쟁질을 멈추지 않다가 선황처럼 엄청난 기근 사망자와 정치범들을 양산하였다. 그는 5년간 대통령을 맡고 이후 16년간은 수상이 되어 21년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다가 사망하였고, 후임자로 하일레 마리암 데살렘 총리가 역시 독재자로 즉위하였다. 2000년대 말에 들어 미국발 경제 불황에서 반사효과를 얻어 급격한 경제성장을 하고 있지만 그에 따라 양극화도 심해지고 있다. 2018년 초 마리암 데살렘 총리는 최근 3년간의 반정부 소요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후임자로 아비 아메드 총리가 집권하여 정치 개혁을 약속하였다. 에티오피아 민중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약속은 허언은 아니었는지, 2018년 들어 에티오피아는 정치범 대규모 석방과 함께 상습적 기근과 정치불안을 야기하던 주변국들과의 오랜 분쟁 관계를 청산하기 시작하였고, 정치, 경제 개혁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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