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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1938)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소속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정치인이며, 중요한 수정주의자 중 한 명이다.
1. 생애 ✎ ⊖
프라하 출신. 7세에 가족이 빈으로 이사하여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활동하였다. 1874년 빈 대학에서 역사, 철학,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1875년 오스트리아 사민당에 입당하면서 정당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1년에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만나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잠깐 언론 활동을 하다가, 1885년에서 1890년까지 영국에 거주하면서 엥겔스와 절친한 관계가 되었고 이 시기 마르크스의 유작 『잉여가치론』을 편집하면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1891년에는 SPD에서 베른슈타인,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을 작성하면서 당대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명이 되었다. 이후 베벨과 함께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을 기초하였다. 1890년대 후반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를 창시하자 이를 극렬하게 비판하면서 베른슈타인과 갈라서게 되지만 정작 본인도 시간이 가면서 수정주의에 가까워지는 행보를 보였다.
1차세계대전 참전을 두고 SPD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카우츠키는 이것이 봉건 차르에 대한 성전이라며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투표에서는 기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0개월 후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 확실해지자 카우츠키는 SPD내의 전쟁 찬성파 베른슈타인과 휴고 하세 등을 비판하였으며, 1917년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등과 함께 반전파들을 이끌고 사회당에서 탈당하여 독립사민당(USPD)를 결성하였다.
1918년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멘셰비키가 몰락하자 카우츠키는 볼셰비즘은 차르 독재와 다를 게 없다며 레닌과 트로츠키를 극렬 비판하였다. 한편으로는 반전주의에 대해 타협하여 USPD를 SPD에 재통합시켜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이끌던 스파르타쿠스단과도 척을 졌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카우츠키는 잠시 SPD 외무부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1925년에는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공동 기초하여 완전히 수정주의에 기울었음을 보여주었다. 1924년 빈으로 돌아온 후에는 다른 이론가들과 논쟁도 벌이고 저술활동에 주력하다가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가 같은 해 사망하였다. 카우츠키 본인은 비교적 곱게 죽었지만 가족은 탈출하지 못하여 아내인 루이제 카우츠키는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고 아들인 베네딕트 카우츠키 역시 수용소에서 7년간 갇혀있어야 했다.
그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1881년에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만나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잠깐 언론 활동을 하다가, 1885년에서 1890년까지 영국에 거주하면서 엥겔스와 절친한 관계가 되었고 이 시기 마르크스의 유작 『잉여가치론』을 편집하면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1891년에는 SPD에서 베른슈타인,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을 작성하면서 당대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명이 되었다. 이후 베벨과 함께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을 기초하였다. 1890년대 후반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를 창시하자 이를 극렬하게 비판하면서 베른슈타인과 갈라서게 되지만 정작 본인도 시간이 가면서 수정주의에 가까워지는 행보를 보였다.
1차세계대전 참전을 두고 SPD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카우츠키는 이것이 봉건 차르에 대한 성전이라며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투표에서는 기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0개월 후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 확실해지자 카우츠키는 SPD내의 전쟁 찬성파 베른슈타인과 휴고 하세 등을 비판하였으며, 1917년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등과 함께 반전파들을 이끌고 사회당에서 탈당하여 독립사민당(USPD)를 결성하였다.
1918년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멘셰비키가 몰락하자 카우츠키는 볼셰비즘은 차르 독재와 다를 게 없다며 레닌과 트로츠키를 극렬 비판하였다. 한편으로는 반전주의에 대해 타협하여 USPD를 SPD에 재통합시켜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가 이끌던 스파르타쿠스단과도 척을 졌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카우츠키는 잠시 SPD 외무부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1925년에는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공동 기초하여 완전히 수정주의에 기울었음을 보여주었다. 1924년 빈으로 돌아온 후에는 다른 이론가들과 논쟁도 벌이고 저술활동에 주력하다가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가 같은 해 사망하였다. 카우츠키 본인은 비교적 곱게 죽었지만 가족은 탈출하지 못하여 아내인 루이제 카우츠키는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고 아들인 베네딕트 카우츠키 역시 수용소에서 7년간 갇혀있어야 했다.
2. 주요 사상 ✎ ⊖
카우츠키는 과소소비론을 주창하였다. 과소소비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 잉여생산은 증가하지만, 이윤율 저하로 인해 노동자들의 임금은 그에 비례해서 오르지 못하고 자본가들도 잉여생산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한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는 잉여자본을 해외로 진출시켜서 위기를 막으려고 하며, 그로 인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 카우츠키의 아이디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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