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ent State shootings
1970년 5월 4일 오하이오주의 켄트 주립대에서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 반대하는 반전 집회를 벌이던 학생들에게 주방위군이 총을 발포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4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9명의 학생이 부상을 당했다.(1) 이 사건으로 닉슨 정부는 많은 항의와 규탄을 받았으며, 이는
목차
1. 배경
2. 전개
2.1. 시위
3. 5월 4일, 발포
4. 사망자
5. 여파
5.1. 전국적 학생 시위 및 휴교
5.2. 조사 및 재판
5.3. 정치적 및 사회적 파장
6. Ohio
7. 유산 및 추모
1. 배경
2. 전개
2.1. 시위
3. 5월 4일, 발포
4. 사망자
5. 여파
5.1. 전국적 학생 시위 및 휴교
5.2. 조사 및 재판
5.3. 정치적 및 사회적 파장
6. Ohio
7. 유산 및 추모
1. 배경 ✎ ⊖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 개입이 장기화되면서 극심한 국론 분열을 겪고 있었다.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강도 높은 반전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징집에 대한 저항과 함께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1970년 4월 30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을 확대하여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 국경 지대의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 기지를 공격하는 캄보디아 침공을 개시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겠다는 공약과는 상반되는 조치로 받아들여졌고, 미국 전역의 대학가에서 즉각적이고 격렬한 항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닉슨은 이 작전이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를 앞당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전쟁의 확대로 간주했다.
1970년 4월 30일,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을 확대하여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 국경 지대의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 기지를 공격하는 캄보디아 침공을 개시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겠다는 공약과는 상반되는 조치로 받아들여졌고, 미국 전역의 대학가에서 즉각적이고 격렬한 항의 시위를 촉발시켰다. 닉슨은 이 작전이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를 앞당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전쟁의 확대로 간주했다.
2. 전개 ✎ ⊖
2.1. 시위 ✎ ⊖
닉슨의 발표 이후 켄트 주립대학교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 5월 1일 (금): 평화로운 반전 집회가 열렸으나, 밤이 되자 시내에서 일부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고 기물 파손 행위가 벌어졌다.
- 5월 2일 (토): 캠퍼스 내 학군단 건물이 방화로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방화범이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 사건으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고 주방위군 소집이 결정되었다.
- 5월 3일 (일): 로즈 주지사는 기자회견에서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며 시위대를 "혁명분자들보다 더 나쁘다"고 비난했다. 이는 학생들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날 저녁에도 시위대와 주방위군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3. 5월 4일, 발포 ✎ ⊖
1970년 5월 4일 정오 무렵, 약 2,000명의 학생이 캠퍼스 중앙 공터에 모여 전날 집회 금지 명령에 항의하고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주방위군은 해산을 명령했으나 학생들이 이에 불응하고 일부는 돌을 던지거나 야유를 보내며 저항했다.
주방위군 병력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고,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주방위군은 학생들을 언덕(Blanket Hill) 너머 축구 연습장까지 밀어냈다가 다시 언덕 위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언덕 정상 부근에 도달한 주방위군 병사 일부가 갑자기 돌아서서 13초 동안 약 67발의 총탄을 아래쪽 주차장과 기숙사 방향으로 발포했다. 이 발포로 인해 4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도 논란거리이며, 당시 병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주방위군 병력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고, 시위대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주방위군은 학생들을 언덕(Blanket Hill) 너머 축구 연습장까지 밀어냈다가 다시 언덕 위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언덕 정상 부근에 도달한 주방위군 병사 일부가 갑자기 돌아서서 13초 동안 약 67발의 총탄을 아래쪽 주차장과 기숙사 방향으로 발포했다. 이 발포로 인해 4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발포 명령이 있었는지 여부는 현재까지도 논란거리이며, 당시 병사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4. 사망자 ✎ ⊖
- 제프리 글렌 밀러 (Jeffrey Glenn Miller, 20세): 시위 참여자. 존 필로의 사진 속 인물이다.
- 앨리슨 B. 크라우스 (Allison Beth Krause, 19세): 시위 참여자.
- 샌드라 리 슈어 (Sandra Lee Scheuer, 20세): 시위와 무관하게 근처를 걷던 중 총격을 당함.
- 윌리엄 녹스 슈뢰더 (William Knox Schroeder, 19세): ROTC 소속 학생으로, 시위와 무관하게 길을 지나가다 총격을 당함.
부상자 9명 중 일부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사망자와 부상자 모두 수십 미터에서 백 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총격을 당했다.
5. 여파 ✎ ⊖
5.1. 전국적 학생 시위 및 휴교 ✎ ⊖
켄트 주립대 발포 사건은 미국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에 항의하여 전국적으로 약 400만 명의 학생이 동맹휴업에 참여했으며, 수백 개의 대학, 단과대학, 고등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생 시위였다. 워싱턴 D.C.에서는 약 10만 명의 시위대가 백악관과 의사당으로 행진하며 닉슨 대통령과 전쟁에 항의했다.
5.2. 조사 및 재판 ✎ ⊖
닉슨 대통령은 캠퍼스 불안에 관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2)를 구성하여 사건을 조사하도록 했다. 위원회는 1970년 9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주방위군의 발포가 "부당하고 정당화될 수 없다(unwarranted and inexcusable)"고 결론 내렸다.
8명의 주방위군 병사가 연방 대배심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1974년 연방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주(州) 차원의 기소도 이루어졌으나 유죄 판결로 이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주정부와 주방위군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오랜 법정 다툼 끝에 1979년 법정 밖 합의가 이루어져, 주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총 67만 5천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하고 "깊은 유감(deep regret)"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주정부나 주방위군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8명의 주방위군 병사가 연방 대배심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1974년 연방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주(州) 차원의 기소도 이루어졌으나 유죄 판결로 이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주정부와 주방위군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오랜 법정 다툼 끝에 1979년 법정 밖 합의가 이루어져, 주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총 67만 5천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하고 "깊은 유감(deep regret)"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주정부나 주방위군의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5.3. 정치적 및 사회적 파장 ✎ ⊖
켄트 주립대 발포 사건은 미국 사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보수층 일각에서는 시위 학생들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주방위군의 조치를 옹호하기도 했으나, 다수의 국민은 평화적으로 시위할 권리를 행사하던 비무장 학생들에게 군인이 발포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사건은 반전 여론을 더욱 확산시켰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 Ohio ✎ ⊖
사건 직후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Crosby, Stills, Nash & Young)은 닐 영이 작곡한 노래 Ohio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사건의 충격과 분노를 생생하게 담아내며 반전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