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가져온 문서/진보위키

Friedrich Ebert, 1871년 2월 4일 ~ 1925년 2월 28일
독일의 노동운동가 출신 독일 사회민주당(SPD)소속 정치인이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대통령을 지냈다.
1. 생애 ✎ ⊖
하이델베르크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지만 가난해서 대학진학은 못하고 제조업 노동자가 되어 떠돌아다니다 1889년에 SPD에 가입하였다. 그는 현장운동가로써 두각을 나타냈고 1904년 즈음이면 SPD내 온건파의 수장 격으로 취급받았으며 1905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SPD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SPD의 세력을 키우는 데 크게 일조하였으며, 1913년 아우구스트 베벨이 사망하자 휴고 하세와 함께 당의 의장이 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채권 발행에 찬성할 것을 독려하면서 적극적인 전쟁 찬성파가 되었고 SPD내 좌파들은 이에 반발하여 탈당 후 독립 사회민주당(USPD)과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하였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에베르트는 정치력을 많이 잃긴 했지만 우파정당들과 협력하는 노선은 버리지 않았다. 그의 스탠스는 1918년 베를린의 군수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을 때 아주 잘 드러났는데, 에베르트는 이 파업을 와해시키고 노동자들을 일터로 돌려보냈다.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당시 총리였던 바덴은 에베르트에게 총리를 이임하였다. 에베르트는 혁명에 대해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군주제 붕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공화국이 선포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고 총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에베르트는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구성에 가톨릭 중앙당, 진보당 등의 우파정당과 같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흑, 적, 황 연정을 구성하였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KPD가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일으키자 사민당 내 우파인 구스타브 노스케 등을 시켜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로자와 카를은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에게 재판 없이 비참하게 살해당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첫 선거에서 연정 파트너들의 지지를 받아 1919년 2월 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반발로 정권은 시작하자마자 지지를 상실하였고 에베르트는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쿠데타와 반란 진압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관련하여 대통령이 반역죄로 고소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에베르트는 스트레스를 아주 심하게 받았는지 맹장염, 충수염 등 거의 몸이 종합병동 수준이 되어 있었고, 재판 중인 1925년 패혈성 쇼크로 사망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전쟁채권 발행에 찬성할 것을 독려하면서 적극적인 전쟁 찬성파가 되었고 SPD내 좌파들은 이에 반발하여 탈당 후 독립 사회민주당(USPD)과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하였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에베르트는 정치력을 많이 잃긴 했지만 우파정당들과 협력하는 노선은 버리지 않았다. 그의 스탠스는 1918년 베를린의 군수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을 때 아주 잘 드러났는데, 에베르트는 이 파업을 와해시키고 노동자들을 일터로 돌려보냈다.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당시 총리였던 바덴은 에베르트에게 총리를 이임하였다. 에베르트는 혁명에 대해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군주제 붕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공화국이 선포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고 총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에베르트는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구성에 가톨릭 중앙당, 진보당 등의 우파정당과 같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흑, 적, 황 연정을 구성하였다. 1919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KPD가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일으키자 사민당 내 우파인 구스타브 노스케 등을 시켜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로자와 카를은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에게 재판 없이 비참하게 살해당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첫 선거에서 연정 파트너들의 지지를 받아 1919년 2월 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반발로 정권은 시작하자마자 지지를 상실하였고 에베르트는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쿠데타와 반란 진압으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급기야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관련하여 대통령이 반역죄로 고소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에베르트는 스트레스를 아주 심하게 받았는지 맹장염, 충수염 등 거의 몸이 종합병동 수준이 되어 있었고, 재판 중인 1925년 패혈성 쇼크로 사망하였다.
2. 평가 ✎ ⊖
사회민주당을 크게 성장시키고, 현대 국가들에 큰 영향을 준 바이마르 헌법을 기초했다는 점은 높게 평가받는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로써 한계를 드러내 인터내셔널을 한다는 정당을 이끌고 국가주의 전쟁에 가담한 것은 큰 비판을 받는다. 전쟁 후에도 노선은 다르긴 하지만 일단은 사민당 출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우익 민병대를 동원해 때려잡았다. 문제는 이들이 의회주의 좌파가 품지 못하는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흡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고, 그 반대편에 서있는 나치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베르트가 지원하던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에서는 후일 나치 고관들이 대량 배출되었다. 이 때문에 에베르트는 나치 집권의 토양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3. 트리비아 ✎ ⊖
2016년 촛불집회 참가자들에게 수여되었다는 에버트 인권상이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덕분에 로자 룩셈부르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상을 받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