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 1946년 9월 1일 |
사망일 | 2009년 5월 23일 |
한국의 변호사, 정치인, 제16대 대통령.
1. 삶 ✎ ⊖
1946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영중학교를 거쳐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어망 제조업체, 건설현장에서 근무하였다. 1968년 입대하여 1971년 전역하였고, 1973년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다. 이후 사법고시에 도전하여 3수만인 1975년에 합격하였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경제적 문제로 1978년 5월 사임 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조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상임위원을 맡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으며 6월항쟁에 참여하였다.
이석규의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3자 개입 등 혐의로 약 20일 이상 구치소에 수감된 후 업무 정지 및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경제적 문제로 1978년 5월 사임 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조세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상임위원을 맡았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으며 6월항쟁에 참여하였다.
1.1. 정치 ✎ ⊖
1988년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리고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노무현 명패 사건 등을 일으키며 일약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하였다. 그리고 3당 합당을 비판하며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을 함께하며 유명 정치인이 되었다. 민주당 입당 후 대변인을 지냈다.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5대 총선에서도 낙선하였다. 도중 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위원장,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1993년에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이 되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역임했고, 1998년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어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유명한 별명인 바보 노무현도 이 즈음해서 생겼다. 낙선 후 2000년 8월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임명되어 2001년 4월까지 지냈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최고위원을 맡았다.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5대 총선에서도 낙선하였다. 도중 14대 대통령선거 민주당 청년특위위원장,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1993년에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이 되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역임했고, 1998년 서울 종로구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어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유명한 별명인 바보 노무현도 이 즈음해서 생겼다. 낙선 후 2000년 8월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임명되어 2001년 4월까지 지냈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최고위원을 맡았다.
1.2. 대통령 ✎ ⊖
2001년말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2002년 노풍과
병풍 사건, 정몽준과의 단일화를 통해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2월 25일 취임하여 한미 FTA,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대처 등을 이뤄냈으나 새천년민주당 탈당 후 열린우리당을 결성함으로 인해 1년만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탄핵이 기각되며 대통령직에 복귀하였고, 남북 정상회담 개최, 국방개혁 추진 등의 정책을 실행했다. 그 중에는 이라크 전쟁 파병처럼 평가가 엇갈리거나, 위헌으로 이뤄지지 못한 행정수도 정책도 있다. 또한 대통령 개인의 직설적인 화법도 언론 등에서 논란이 되었다.
2008년 퇴임 후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의 봉하마을에서 농사 등을 지으며 활동하였다. 친환경 농사법, 생태 숲 조성 등 친농촌/환경적인 활동도 하였다. 봉하마을은 관광명소가 되어 여러 관광객이 방문했고 이들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조사(1)를 받으며 고생(2)하다가, 2009년
투신자살하여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사망 후 후진타오, 엘리자베스, 반기문 등 각계에서 애도를 표했다. 국민장으로 엄수되었고, 전국적으로 500만명이 각지에 설치된 분향소에 조문하였다. # 특히 덕수궁 대한문앞 분향소에는 장례 기간 동안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례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봉하마을도 애도 명목으로 방문자가 많았으며, 각 포털사이트와 언론사에는 추모 배너가 달렸다.
자살에 대해 정치적 타살이라며 이명박, 검찰 등을 비판하는 여론이 있었으며, 반대로 전직 대통령으로서 무책임하다며 비판하는 여론도 존재하였다.
2008년 퇴임 후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의 봉하마을에서 농사 등을 지으며 활동하였다. 친환경 농사법, 생태 숲 조성 등 친농촌/환경적인 활동도 하였다. 봉하마을은 관광명소가 되어 여러 관광객이 방문했고 이들과 소통하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사망 후 후진타오, 엘리자베스, 반기문 등 각계에서 애도를 표했다. 국민장으로 엄수되었고, 전국적으로 500만명이 각지에 설치된 분향소에 조문하였다. # 특히 덕수궁 대한문앞 분향소에는 장례 기간 동안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례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봉하마을도 애도 명목으로 방문자가 많았으며, 각 포털사이트와 언론사에는 추모 배너가 달렸다.
자살에 대해 정치적 타살이라며 이명박, 검찰 등을 비판하는 여론이 있었으며, 반대로 전직 대통령으로서 무책임하다며 비판하는 여론도 존재하였다.
2. 수상 ✎ ⊖
- 2004 영국 바스 대십자훈장
- 2008 무궁화대훈장
3. 저서 ✎ ⊖
- 여보 나좀 도와줘
- 노무현이 만난 링컨
-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