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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 Baekje
한반도 남서부에 위치했던 대한민국의 삼국 시대를 이룬 삼국의 하나이다.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존속하였다.
목차
1. 수도
2. 역사
2.1. 건국
2.2. 체제 정비
2.3. 전성기
2.4. 쇠퇴
2.5. 중흥
2.6. 멸망
2.7. 백제 부흥 운동
3. 문화
3.1. 학문
3.2. 종교
3.3. 고분
3.4. 예술
3.4.1. 음악
4. 보기
5. 영상
1. 수도
2. 역사
2.1. 건국
2.2. 체제 정비
2.3. 전성기
2.4. 쇠퇴
2.5. 중흥
2.6. 멸망
2.7. 백제 부흥 운동
3. 문화
3.1. 학문
3.2. 종교
3.3. 고분
3.4. 예술
3.4.1. 음악
4. 보기
5. 영상
1. 수도 ✎ ⊖
초기에는 위례성에 도읍을 두었으나, 이후 웅진과 사비로 천도하며 명맥을 이어갔다.
2. 역사 ✎ ⊖
2.1. 건국 ✎ ⊖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하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두 형제는 각각 미추홀과 위례성에 건국했지만, 이후 비류 세력이 온조에 합류하며 하나가 되었고 원래 십제였던 국명도 백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비류가 건국 후 땅이 좋지 않아 실패하고 자결한 뒤 합쳐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현대에는 우수한 철기 문화를 가진 유이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초기 백제는 마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였으나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해 가며 점점 세력을 키워 갔다.
초기 백제는 마한의 여러 소국 중 하나였으나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해 가며 점점 세력을 키워 갔다.
2.2. 체제 정비 ✎ ⊖
고이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며 국가 체제를 확립해 나가게 된다. 관등제, 관복제, 율령 반포 등이 이뤄졌으며,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2.3. 전성기 ✎ ⊖
근초고왕 대에 백제는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남으로는 마한 전역을 복속시켜 전라도의 비옥한 곡창 지대를 확보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황해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시키고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다.(1)
이 시기 백제는 한성을 중심으로 서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안정적인 교역망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선진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며 국부를 쌓았다. 372년에는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 유명한 칠지도 역시 이 시기에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른바 요서 경략설이라고 하여 중국 사서 송서, 양서에 기반해 백제가 요서 지방을 지배했다는 설이 있으나(2), 그 범위와 성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이 활발하다. 기록의 해석과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으로 인해 '진출'보다는 '교역 거점 확보'나 '문화적 영향력 행사' 정도로 보는 시각도 많다. 그래도 당시 백제의 해상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은 분명하다.
이 시기 백제는 한성을 중심으로 서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안정적인 교역망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선진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며 국부를 쌓았다. 372년에는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 유명한 칠지도 역시 이 시기에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른바 요서 경략설이라고 하여 중국 사서 송서, 양서에 기반해 백제가 요서 지방을 지배했다는 설이 있으나(2), 그 범위와 성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이 활발하다. 기록의 해석과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으로 인해 '진출'보다는 '교역 거점 확보'나 '문화적 영향력 행사' 정도로 보는 시각도 많다. 그래도 당시 백제의 해상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은 분명하다.
2.4. 쇠퇴 ✎ ⊖
5세기 들어 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엄청난 정복 활동으로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벌이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게 되면서 백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3) 아들인 문주왕은 긴급히 남쪽으로 피신해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또한 한강 유역 상실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해상 교역로의 위축은 국가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웅진 천도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또한 한강 유역 상실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해상 교역로의 위축은 국가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2.5. 중흥 ✎ ⊖
백제가 쇠퇴하던 중 동성왕은 왕권을 강화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남조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탐라를 복속시켰으며 신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였다. 또한,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귀족 세력의 반발로 동성왕이 피살되었다.
동성왕 다음의 무령왕 역시 백제를 중흥하고자 하였는데,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22담로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하고,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또한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며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1971년 우연히 발굴된 그의 무덤인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백제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무령왕 다음의 성왕은 교통이 편리한 사비성(지금의 부여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국호를 일시적으로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남부여라 하였다. 또한 제도 정비 및 불교 진흥으로 나라가 강성해졌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일시적으로 되찾는 데 성공하나, 신라의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다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출전한 성왕은 관산성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동성왕 다음의 무령왕 역시 백제를 중흥하고자 하였는데, 지방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22담로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하고,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또한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며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1971년 우연히 발굴된 그의 무덤인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백제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무령왕 다음의 성왕은 교통이 편리한 사비성(지금의 부여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국호를 일시적으로 부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남부여라 하였다. 또한 제도 정비 및 불교 진흥으로 나라가 강성해졌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일시적으로 되찾는 데 성공하나, 신라의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다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출전한 성왕은 관산성 부근에서 전사하였다.
2.6. 멸망 ✎ ⊖
성왕의 전사 이후 백제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를 발판 삼아 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의자왕은 즉위 초반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대야성(지금의 합천 부근)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등 신라에 대한 군사적 성과를 거뒀으나,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귀족 세력과의 갈등, 그리고 연이은 군사 활동의 피로 누적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소모되었다. 신라는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백제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한편 흔히 알려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는 패망국의 군주를 폄하하기 위한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으며(4),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귀족층의 이반이 멸망의 주요 원인이었다.
의자왕은 즉위 초반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대야성(지금의 합천 부근)을 공격해 함락시키는 등 신라에 대한 군사적 성과를 거뒀으나,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귀족 세력과의 갈등, 그리고 연이은 군사 활동의 피로 누적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소모되었다. 신라는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백제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한편 흔히 알려진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는 패망국의 군주를 폄하하기 위한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으며(4),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귀족층의 이반이 멸망의 주요 원인이었다.
2.7. 백제 부흥 운동 ✎ ⊖
백제가 멸망한 이후 충청도 지역에서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주류성에서 복신 등이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가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백제 유민들을 규합하여 나당연합군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200여 개 성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흥 운동 지도부 내의 권력 다툼과 분열, 그리고 왜의 수군 지원군이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부흥 운동은 동력을 상실하고 결국 4년 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부흥 운동 지도부 내의 권력 다툼과 분열, 그리고 왜의 수군 지원군이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부흥 운동은 동력을 상실하고 결국 4년 만에 진압되었다.
3. 문화 ✎ ⊖
백제는 세련되고 온화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특히 건축, 공예, 불교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 또한, 활발한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 왕조들 및 일본과 교류하며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중요한 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다시 일본에 전파되어 아스카 문화 등 일본 고대 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3.1. 학문 ✎ ⊖
백제는 일찍부터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교육했으며, 역박사, 의박사 등 전문 기술직도 운영했다.
3.2. 종교 ✎ ⊖
백제에는 종교가 융성하였으며 가장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고 중앙 집권 체제 확립 시기에 수용하였다. 불교는 강화된 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고 뛰어난 예술 작품도 많이 남겼다. 이를테면, 온화한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익산 미륵사지석탑, 정림사지 5층 석탑등이 있다. 백제는 이 불교를 일본에 전파하기도 하였다. 호류사 백제 관음상이 대표적이다. 또한, 미륵신앙도 유행하였는데, 미륵사가 창건되었다.
3.3. 고분 ✎ ⊖
백제는 고구려의 지배 세력이 건국한 것이므로 초기엔 고구려 형식인 계단식 돌무지무덤 형태의 고분이 많았으나 점점 백제만의 색깔을 띄었다. 굴식 돌방무덤이나 벽돌 무덤등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무령왕릉, 부여 능산리 고분이 있다. 계단식 돌무지무덤 형태로는 석촌동 돌무지무덤이 있다.
3.4. 예술 ✎ ⊖
3.4.1. 음악 ✎ ⊖
주로 종교 의식, 축제와 관련하여 발달하였으며 가요도 존재하였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인 정읍사는 당시 생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정읍사는 지금의 정읍 지역에 사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낸 노래이다.
4. 보기 ✎ ⊖
- 한국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