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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최근 수정 시각 : 2023-03-26 19:32:31 | 조회수 : 38
수양대군세조

世祖

묘호의 하나.

목차

1. 조선
1.1. 대군
1.2. 문종
1.3. 단종
1.4. 계유정난 후
1.5. 세조
2. 영상

1. 조선

조선의 제7대 국왕. 묘호인 세조만큼 대군 시절 칭호인 수양대군으로도 유명하다.

1.1. 대군

수양대군은 1417년에 태어나 5세 정도까지 사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는 세종의 즉위 이후 국장이 연이어 거행되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있다. 형 문종이 일찍 입궐하고 동생 안평대군도 궐에서 자란 것과 반대로, 부모와 떨어져 자란 것이 그의 체력, 운동신경,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입궐 후 1428년 진평대군이란 군호를 받았으나, 진평군과 혼동의 우려로 함평대군, 진양대군으로 연이어 호칭이 바뀐 끝에 수양대군이 되었다. 단 수양대군이란 호칭의 유명성과는 별개로 가장 오랫동안 존속된 호칭은 약 12년인 진양대군이다. 물론 수양대군도 10년 정도이니 큰 차이가 나진 않는다.

1.2. 문종

문종과 친밀한 형제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수양대군이 다쳤을 때 문종이 약과 의사를 보내거나, 수양대군이 새로운 진법을 연구해오자 문종이 이를 칭찬했고 이에 수양대군도 형님 덕분이라며 답했다거나, 문종이 자신이 제갈량보다 조금 부족하다고 하자 수양대군이 제갈량이 문종보다 부족할 것인데 비교할 수 있겠느냐며 아부한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문종이 병에 시름하자 슬퍼하면서 단종을 보필하는 김종서와 대신들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 대해 자신이 후계자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문종에게 신뢰를 쌓으려고 했던 행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문종은 편견과는 달리 유능하고 강한 왕권을 가진 임금이었다.

1.3. 단종

문종 사후 단종이 13세라는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사병을 키우고 사냥과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며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이 다수파가 되어 그를 견제하고자 나서자, 한명회, 신숙주, 흥달손, 양정 등 자신의 세력을 포섭함과 동시에 명나라에 사신(1)으로 가서 코끼리가 뒷걸음질을 쳤다던가, 중국인들이 수양대군을 보고 부처 같다는 등 칭찬을 했다든가와 같은 진실로 보기 어려운 설화들을 만들며 명나라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인맥을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야망을 실행에 옮기는 데 그것이 계유정난이다.

1.4. 계유정난 후

동생인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영의정부사, 중외병마도통사 등 요직을 겸직하며 권력을 장악한 뒤 정난공신을 책정했다. 이때 스스로를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 1등관으로 서훈하기도 했다. 또한 중신의 처나 자녀를 노비로 전락시키고 안평대군,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1455년 6월 세조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토벌, 숙청하였다.

1.5. 세조

집권 초기 중앙집권화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신하들의 권력을 제한하고 규율을 확립하여 중앙 집중식 정부 시스템을 확립했다. 대표적 정책은 다음과 같다.
  • 호패법 복권
  • 군제 5위 개편
  • 역로 개편
  • 찰방 설치
  • 예문관 장서 발간
  • 각 도에 거진 설치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각 지역의 수령은 왕이 직접 임명(2)하면서도 백성들에게 그들을 탄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또한 의정부서사제에서 직접 문서를 인가하고 국사를 통솔하는 6조 직계제도 추진했다. 예조참판인 하위지가 이에 대해 반대하다 수모를 당했고 이후 단종복위운동으로 사육신이 되어 참형을 당했다. 이 외에도 한명회를 주축으로 다음 정책들이 실행되었다.
  • 행정기관 개편
  • 향소부곡 폐지
  • 오가작통법 시행
  • 면리제 시행

또한 과전 폐지, 직전제 실시도 세조 때 이뤄졌다.

정치적으로는 김숙자, 김종직 등 사림파가 등용되며 중앙 정계에 진입했다. 그러나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지어 반정을 조롱했으며 그의 제자와 학파도 마찬가지로 반정을 찬탈로 규정 짓고 조롱했다. 이는 후일 무오사화가 일어나고 김일손이 처형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림의 중앙 정계 진입은 성종 대에 이르러 사림이 정파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법/문화적으로는 여러 법전과 서적들이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다음과 같다. 그 외에도 원구제를 실시했다.
  • 동국통감
  • 국조보감
  • 경국대전

군사적으로는 1459년 신숙주를 파견해 여진족을 무마시키고 토포사를 보냈고, 1467년 이시애의 난 진압, 건주여진 토벌 등을 이뤄냈다.

불교적으로는 다음 정책을 시행했다. 역사적으로 세조는 호불(好佛) 군주로 유명한데, 단종에 대한 죄책감, 약한 유교적 입지의 대응 등으로 분석된다.
  • 간경도감 신설
  • 원각경 편찬
  • 원각사 창건
  • 월인석보 간행

말년에는 병에 걸려 고생했다. 전설에선 현덕왕후의 원혼이 나타나 침을 뱉은 악몽을 꾼 뒤 병세가 심해졌단 얘기도 있다. #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1468년 신하들에게 왕세자 보필을 부탁한 뒤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날 사망했다. 시호는 혜장으로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들이 12월에 받아왔다.

2. 영상

(1) 본래 안평대군이 자청한 것을 대신 간 것이다.
(2) 관찰사의 현감, 현령 임명권을 회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