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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 울리치

최근 수정 시각 : 2023-08-14 00:47:02 | 조회수 : 47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


William Irish, 1903년 12월 4일 ~ 1968년 9월 25일

미국의 소설가. 윌리엄 아이리쉬라는 필명으로 유명하다. 아주 개성이 뚜렷했던 그의 미스터리 소설은 추종자도 모방자도 없을 만큼 독특한 것이었다. 그의 작품처럼 짜임새 있고 문학적 향기가 짙은 문체는 다시 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월리엄 아이리쉬와 같이 자기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작가는 아직도 보기 드물다. 전기작가 프랜시스 네빈스(Francis Nevins Jr.)는 울리치가 생존한 당시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로 대쉴 해밋, 얼 스탠리 가드너, 레이먼드 챈들러에 이어 울리치를 꼽았다.

목차

1. 생애
2. 작품
3. 참고

1. 생애

1903년 12월 4일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당초 그의 출생연도는 『20세기 작가사전』에 적혀있는 1906년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으나 윌리엄 아이리쉬가 사망한 뒤 한두 사람의 연구자에 의해 그 모순이 발견되었으며 사실은 그가 1903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듯 출생연도마저 애매하므로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부모는 그가 어렸을 적에 이혼하였고, 그는 토목기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혁명 당시의 멕시코에서 살다가 혁명이 끝난 이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울리치'라는 성도 어머니의 성을 따른 것이다. P S 10 (제 10 preliminary school)에서 다윗 클링턴 하이스쿨로 진학하고 이어서 동부의 명문인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지만 첫 장편 『요금』(1926)이 큰 성공을 거두자 대학을 중퇴해버린다. 원래 탭댄서나 될까 할 정도로 진로에 대한 뚜렷한 생각이 없던 그는 요양 기간 동안 여가 삼아 쓴 소설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이후 작가로 살기로 결심했던 듯 하다.

이후에는 곧 싸구려소설(pulp fiction)과 탐정소설(detective fiction)을 쓰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 소설인 《Children of Ritz》(1927)가 칼리지 유머 잡지 상을 수상하는 등 유명세를 타면서 - 상금 1만 달러는 파리에 놀러가 흥청망청 써버렸다 - , 아무런 영화계 경력도 없는 그를 할리우드 영화사가 채용. 영화업계에서 일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다.

그는 원래 동성애자였지만 영화 작가로 활동하던 1930년, 글무성영화 제작자 스튜어트 블랙톤의 딸인 글로리아 블랙톤과 결혼하였지만 3개월 만에 파경에 이르렀고, 결국 1933년에 이혼하였다. 부인에 의하면 울리치는 가장 친밀한 순간에도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그는 내게서 2피트가량 떨어져 앉은 자리에서, 결혼해주지 않겠느냐고 물었어요." 부인에게 일기장을 남겨놓았는데, 그 일기장은 사이가 안좋았던 부인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자신의 남성편력이 세밀히 적혀 있었다. 블랙톤의 자매인 매리안(Marian)이 네빈스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지저분하고 끔찍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기장이 결혼을 끝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기장이 들어있던 (그리고 자물쇠를 채운) 가방안에는 울리치가 상대를 찾아 밤거리를 배회할 때 입던 선원복도 있었다고 한다.

1932년부터는 뉴욕의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1957년까지 함께 살았다. 다만 어머니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는 듯. 자신의 수입으로 충분히 고급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허름한 호텔을 전전하였다.

말년에 건강이 안좋아 고생을 하였다. 아마도 젊어서부터 지나친 흡연과 음주를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65년에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사고를 당하거나 다쳐서 다리를 못쓰게 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자주 있는데, 바로 자신이 다리와 관련된 비극을 겪게 된다. 1967년 맞지 않는 신발을 억지로 신고다니다가 발에 괴저현상이 왔는데, 치료는커녕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면서 고통을 참다가, 결국 의사를 찾았을 때에는 너무 늦어버려서 무릎 위까지 절단해야만 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탔고, 건방진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나마 거의 가지도 않았지만) 파티에서 그의 작품을 칭찬하는 사람을 만나도 무례하게 물리칠 정도였다. 당연히 지인이라고는 손꼽을 정도밖에 없어서 작품을 누군가에게 헌정하는 일이라고는 없었으며, 있다고 해도, 자신이 쓰던 레밍턴 휴대용 타자기(《흑의의 신부》)나, 자신이 싫어한 호텔방(《환상의 여인》)정도였다. 자신의 나이를 세살, 때때로 일곱살까지 속이기도 했고, 결코 스스로 나서서 어린 시절이나 그외 사적인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기회만 되면 자신을 나타내는 문서에서 자신의 정보에 대해 속이려고 하였다. 가끔 론 굴랏(Ron Goulart)같은 젊은 숭배자들과의 교제로 사회적 교류를 유지하였지만, 말년의 그는 더욱 폐쇄적이 되어 버려서 1968년 트뤼포 감독이 만든 자신의 작품의 시사회가 뉴욕시에서 열렸을 때조차도 참석하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발표하는 작품도 거의 없어졌고, 고독한 말년을 보냈다. 다리수술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8년 9월 25일 한 차례 발작이 왔고 그는 이겨내지 못했다. 사망당시 몸무게는 40 킬로그램에 불과했다. 그의 죽음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미국의 유력지에 한 줄의 기사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독한 작가의 최후였다. 유해는 뉴욕 주 하츠데일(Hartsdale)의 페른클리프(Ferncliff) 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시가 약 85만불 정도인 자산을 모교에 남겨서 어머니를 기념하는 장학금(컬럼비아 대학 저널리즘 전공)에 쓰도록 하였다.

2. 작품

1940년부터 1948년까지 쓰여진 것들이 가장 우수한 작품들로 여겨진다. 이 시기가 되어서야 피츠제랄드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작품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범죄소설들을 써낼 수 있었다. 현재 대부분의 작품들이 절판되었고, 새로운 판은 저작권 문제로 출간이 늦어지고 있다. 새로운 단편집들이 1990년대 초에 출간되었다. 그가 남긴 미완성의 소설이 《Tonight, Somewhere in New York》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울리치는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으며, 작품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모호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러한 작가의 양면성과 격동하는 감정이 독특한 주제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예컨대 사랑은 행복의 요소인 동시에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는 것으로 작용하고(『흑의의 신부』,《환상의 여인》),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해 안전을 찾으려는 노력이 도리어 위험을 초래한다(《죽은 자와의 결혼》).

1920년 대에는 칼리지 유머, 매클레스, 스마트 셋 등의 참신한 잡지에 단편과 중편을 기고했던 듯하다. 그 뒤 1930년 대에는 블랙 마스크 및 그 밖의 미스터리 소설 관계의 여러 잡지에 미스터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트릭이 교묘하게 짜여진 많은 단편과 중편을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1940년에 발표한 미스터리 장편 『흑의의 신부』는 애인이 피살된 처녀가 범인을 차례차례 죽이는 복수담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묘사한 것으로, 그의 실력을 발휘한 이정표적인 걸작이다. 그러나 그의 진가를 세상에 알려준 것은 그로부터 두 해 뒤 1942년에 아이리쉬라는 익명으로 발표한 <환상의 여인>이다. <환상의 여인>은 아내를 죽인 혐의를 받고 사형선고를 받은 남자가 연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수수께끼의 여자를 찾는 이야기인데, 거의 찾았다고 생각하면 그 실마리가 차례차례 없어지고 만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사형집행일이 각 장의 제목으로 되어 있으며 이 작가가 지닌 특이한 서스펜스를 조성하여 마지막에 이르러 전혀 뜻밖의 해결을 보게 되는 기상천외한 작법을 쓰고 있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 소설에 없어서는 안될 여러 가지 조건을 1백 퍼센트 갖추고, 조금도 빈틈 없는 구성과 신선한 문체로 그의 대표작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그는 코넬 울리치라는 본명으로 표제에 <Black>이 드는 작품을 1년에 한 작품씩 계속 발표하여 <Black 울리치>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때까지의 가작 단편에 아직 발표되지 않은 단편을 한데 묶어서 단편집을 여러 권 출판했다. 아이리쉬의 걸작 순위는 <환상의 여인>, <새벽의 데드라인>, <흑의의 신부>의 차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남자가 살해된 애인의 복수를 하는 <상복의 랑데부>도 아주 뛰어난 걸작이다.

그 뒤에는 염가본을 두 권 출판했을 뿐 이따금 잡지에 발표된 단편들도 지난날의 빛이 가시고, 1965년에 그 즈음의 작품을 모은 단편집 <Dark side of Love>를 마지막으로 내놓고 그는 독자들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다.

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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