蜀漢正統論
촉한이 한나라를 정통으로 계승했다는 학설이다. 촉한정통관이라고도 한다. 송나라의 학자인 주희가 정립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희 이전에도 습착치가 한진춘추로 주장한 바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지 연의 또한 이 학설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어, 삼국지를 읽다보면 촉이 주인공 같이 느껴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상당히 밀어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비슷한 것으로 조위정통론이 있다.왜 손오정통론은 없을까
한 마디로 줄이면 촉빠라고 한다.
촉한이 한나라를 정통으로 계승했다는 학설이다. 촉한정통관이라고도 한다. 송나라의 학자인 주희가 정립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희 이전에도 습착치가 한진춘추로 주장한 바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지 연의 또한 이 학설이 상당히 반영되어 있어, 삼국지를 읽다보면 촉이 주인공 같이 느껴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상당히 밀어준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비슷한 것으로 조위정통론이 있다.
1. 논쟁 ✎ ⊖
인터넷의 발달로 삼국지 정사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실제 역사와 삼국지의 괴리에 대해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조에 대한 재평가와 세 국가를 대표하는 조조, 유비, 손권에 대한 인물 구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팬덤도 형성되었고, 그 정통성 또한 위-진인지 촉인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일각에선 이 촉한정통론이라는 것이 한족들이 몽골의 침략을 견디면서 반발심리로 생겼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서 한족의 민족성을 고취시키고자 북방국가인 위나라를 이민족=조조=악, 남방국가인 촉나라를 한족=유비=선이라는 구도로 임의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를 긍정하는 이들 중 몇몇은 삼국연의를 민족주의 프로파간다 서적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일각에선 이 촉한정통론이라는 것이 한족들이 몽골의 침략을 견디면서 반발심리로 생겼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서 한족의 민족성을 고취시키고자 북방국가인 위나라를 이민족=조조=악, 남방국가인 촉나라를 한족=유비=선이라는 구도로 임의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를 긍정하는 이들 중 몇몇은 삼국연의를 민족주의 프로파간다 서적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2. 역사 ✎ ⊖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조위에게 선양받은 사마씨에 의해 세워졌기에 조위정통론이 다소 우세하였다. 그러다 위에서 언급한 습착치가 한진춘추로 촉한정통론을 제기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습작치는 동진 사람으로, 사마씨가 세운 나라였음에도 이런 주장을 하였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선 습작치가 한진춘추를 저술할 때의 왕은 간문제 사마욱이었으며,
환온이 선양을 노리고 있었다. 이에 습작치는 한진춘추에서 조위는 역적인 조비가 세운 나라이므로 사마염 또한 선양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정통성을 획득한 것이 아니며, 진의 정통성은 촉한을 멸망시키면서 흥함에 따라 생겨난 것이란 주장을 폈다. 즉 환온이 선양을 받더라도 전통성이 생기진 않고 무효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 역사에서 환온의 아들 환현은 사마씨에게 선양을 받아 초나라를 세웠으나, 3개월만에 유유에게 멸망당했고 유송이 세워지게 된다. 유유는 촉한정통론을 보곤 옳다구나 하고 자신이 사마씨 정권을 무너뜨려 촉한의 복수를 했다면서 촉한전통론을 퍼뜨리며 촉한의 계승자로 대우받고 위세도 세웠다.
한편 남조의 상황과는 별개로 북조에선 흉노족인 유연(1)이 전조를 세워 유비와 유선에게 시호를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즉 나름대로의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선 습작치가 한진춘추를 저술할 때의 왕은 간문제 사마욱이었으며,
한편 남조의 상황과는 별개로 북조에선 흉노족인 유연(1)이 전조를 세워 유비와 유선에게 시호를 지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즉 나름대로의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1. 송, 명 ✎ ⊖
수, 당을 지나 송나라 때 다시금 역사적으로 정통론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조위정통론이 주류 견해로 인정되나 싶었으나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이 삼국 모두 통일왕조를 성립하지 못했다며 삼국 모두의 정통론을 비판하면서 두루뭉실해졌다. 단 민간에선 사실상 촉한정통론이 대세가 되어서, 조조나 유비, 관우 등 유명 인물에 대한 인식이 촉한정통론자들과 거의 일치하였다.(2) 이후 남송 시대가 되면서 화북 왕조를 악의화하기 위해 주자, 주희 등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촉한정통론이 대두되었고 이는 명나라까지 이어졌다.
2.2. 청나라 후 ✎ ⊖
소위 말하는 오랑캐 정복왕조임에도 촉한정통론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강희제 때는
역대제왕묘를 확대하며 다른 나라는 뺴고 유비와 관우, 조운과 같이 촉나라의 인물만 모셨다. 현대 중국에 이르러선 하나의 중국을 위해 조위, 사마씨, 서진 등을 통일왕조를 위해 노력했다며 우위로 놓기도 한다.
3. 학자 ✎ ⊖
- 주희
- 습작치
- 모종강